240화
풀물이 든 둣 푸르른 녹색 장발, 미소년 타입의 여리여리한 이목구 비,근육이 적당히 붙은 몸과 적절 하게 벌어진 어깨,엘프라면 누구든 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옅은 색의 아이라인.
엘프의 표본과도 같은 모습을 지닌 사내였다.
달리 특이한 것이 있다면 피부색이 보랏빛에,이마에는 초승달 문신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통상적으로 가이아 대륙에서 볼 수 있는 엘프와는 달랐다.
강현은 빙백검을 뽑아 간격을 재며
탐색에 나섰다.
“우린 초대장을 받은 기억이 없는 데 누군가가 멋대로 마중을 나왔 군.”
“아,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 께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 오전 8시 부터 저녁 6시까지 여기 서 있는답 니다. 마중을 나왔다기보단 언제 을 지 모르는 공략자 분들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공략자에게 베이기 위해서?”
“하하,성질 급한 분이시군요. 괜찮 습니다. 갑자기 꺼낸 말을 덥석 믿 는 분이라도 곤란하니까요. 제가 여 러분께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려면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 요. 전 그랜드 우드의 영역 3층 문 엘프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파로 스라 합니다.”
엘프 중에서도 문 엘프란 종족이라 고 한다.
이마의 달 문양이 문 엘프의 상징 인 듯하다.
파로스가 문 엘프라는 건 그리 놀 람지 않다.
그보다 문 엘프 종족의 마지막 생 존자라고 소개한 부분이 신경 쓰인 다.
강현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 하며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3
층에 있던 다른 문 엘프들은 다 죽 은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지.”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소개 문구치곤 피 냄새가 진하 군.”
“여러분이 오기 전에 문 엘프 사이 에서 다툼이 일어났답니다. 양보 없 는 싸움에 승자가 있을 리 없지요. 싸움이 끝났을 땐 저만 남게 되었더 군요.”
“심심해서 접근한 거라면 공에 얼 굴을 그리고 윌슨이라 부르는 걸 추 천하지.”
“ ■필슨,?”
“친구라면 다른 곳에서 찾으라는 뜻이야.”
“그리 말씀하지 마시고 절 당신네 파티에 끼워 주십시오. 잡일이든 뭐 든 다 하겠습니다.”
요 몇 년간 공략자가 찾아들지 않 는 동안에도 신화급 웨이브 내에선 아인족들이 저희들만의 생활을 이어 왔다.
토르족이 수년 동안 마룡의 허물을 차지하려고 많은 토르들을 희생한 것처럼,문 엘프도 자신들만의 목적 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다가 분쟁이 생겨 자멸한 것이었다.
계속 파로스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 동안 노이즈는 조금도 섞이지 않았 다.
강현은 빙백검을 거두되 경계심을
유지한 채로 파로스와의 관계적 거 리를 유지했다.
“좀 더 자세히 들어 보고 판단하도 록 하지.”
동료로 받아들이는 건 보류하고서 라도 3층의 상황을 좀 더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파로스를 받아들일지,말지는 4층 으로 가는 방법을 확인한 이후에 판 단해도 늦지 않았다.
파로스는 대화의 장을 연 것만으로 도 기쁜지 화색을 띠며 따라오란 손 짓을 했다.
“말이 통하시는 분들이라 다행이군 요. 내심 다짜고짜 공격해 오면 어 쩌나 싶어서 엄청 긴장했습니다. 아참,여기 계속 서 있기도 그런데 위 로 올라가시는 게 어떤지요? 제 거 처로 안내하겠습니다.”
강현 일행은 파로스를 따라 나선 계단을 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파로스의 첫 인상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파로스의 피부색이 요들족과 같아 서,더미를 씹어 먹던 팡이 떠올랐 다.
면접으로 치면 경쟁회사 라이벌로 항상 씹어 대던 자와 비슷한 느낌의 인물이 면접관 앞에 나타난 셈이랄 까.
나도 모르게 선입견이 가미되어 버 렸군.
요들족 이미지를 지우고 좀 더 객 관적으로 관찰해야겠어.
실제로 원래 세계에서 강현이 중견 기업 인턴체험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 겪은 일이기도 했다.
당시의 팀장이 경쟁회사에 아는 사 람과 비슷한 인상이라며 이유 없이 강현에게 꼬장을 부렸었다.
뭐 프로그램이 끝나고 바로 S사 내정을 받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 았지만 말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내가 그때 S사에서 출세하는 것만 생각했다면 어떻게 지냈을까 하고.
강현은 S사 입사 확정,최진철은
의대 과정 수료 중 모종의 사고로 인해 자퇴,박인환은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가 될 거라며 값비싼 장비 를 마련했다가 폭망,이하나는 전문 대 졸업 이후 백수.
가장 친한 친구들 중 오직 강현만 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그만큼 강현이 나머지 셋을 위해 말을 아끼 며 잘 다독여 주는 포지션을 맡아야 만 했다.
친구들끼리 있으면 가장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이 주변의 수준에 맞춰 서 자신을 낮추게 되지 않는가. 가이아 대륙에 소환되던 날에도, 인턴체험 프로그램에서 일한 대가로 학교에서 지원금이 나왔을 때 그 돈으로 한턱 쏘기 위해 모였었다.
만약 그때 모임에 나오지 않았더라 면 이세계로 소환될 일도 없었을 거 고,친구들의 수준에 맞춰 양보를 거듭하느라 1년을 낭비할 일도 없었 을 거다.
뭐 지금 와서 생각해 봤자 쓸데없 는 상상,사족에 불과할 뿐이지.
지금의 나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 니까.
생각에 잠겨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3층 입구에 서 있는 토템과 맞닥뜨 렸다.
[그랜드 우드 2층 토템]
-토템에 제1신화급 웨이브의 스탬
프 카드를 넣으면 두 번째 스탬프를 찍을 수 있습니다.
-스탬프 카드가 없는 자는 스탬프 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스탬프를 받은 자가 3 층에 들어서면 2층 필드가 초기화되 어 다른 필드로 바뀝니다. 초기화가 진행되면 필드에 남아 있는 자는 모 두 사망하게 됩니다.
-만약 남은 동료가 있다면 동료가 올 때까지 기다리든지,아니면 보상 을 받지 않고 다음 층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강현,김혜림,루나는 순서대로 토 템에 스탬프 카드를 넣어 두 번째 도장을 받았다.
그다음,파로스와 함께 3층에 들어 섰다.
3층으로 통하는 문을 열자 마나기 류 대신 곧바로 3층의 광경이 눈앞 에 펼쳐졌다.
그랜드 우드의 영역 3층은 봄의 숲을 표현하듯 온통 꽃밭이었다.
꽃이 너무 풍성하게 피어서 꽃가루 때문에 코가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살짝 축농증 기운이 있는 김혜림은 벌써부터 재채기를 해 댔다.
“에취! 크응,여기 필드에 점막이 약한 사람은 집중력이 저하되는 저 주가 걸려 있는 것 같은데요?”
“뀨응! 뀨응!”
“니아,너도 코가 약하구나? 동지 네.”
“뀨우.”
“같은 처지인 사람이 있으니까 그 나마 기분이 좀 낫네. 사람이 아니 라 소환수이긴 하지만.”
“니아,소환석으로 돌아가자.”
“뀨우.”
“후후,나 괴롭힐 땐 정말 칼같이 움직이신다니까.”
“괴로운 사람은 한 명이라도 줄어 야 하지 않겠어? 사람이 아니라 소 환수이긴 하지만.”
어깨를 으쓱이는 강현을 두고 김혜 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눈이 가려운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 다.
예전에 무심코 눈을 비볐다가 눈이 팅팅 부어서 며칠 내내 강현에게 놀 릴 빌미를 제공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다시는 같은 우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김혜림이었다.
그 이후로 김혜림의 아공간 반지에 는 항상 천 마스크가 준비되어 있었 다.
김혜림은 직접 만든 수제 천 마스 크를 찾기 위해 아공간 반지에 손가 락을 올렸다.
그녀가 천 마스크를 찾는 동안 강 현은 3층 입구에 박혀 있는 나무표 지판을 확인했다.
[그랜드 우드의 영역 3층 : 스프링 필드 공략법]
[3층에 숨겨진 네잎클로버를 찾아 문 엘프족 중 누군가에게 주어라. 네잎클로버를 받은 자가 그대들을 다음 층으로 이끌 것이다.]
3층에선 숲에 숨겨진 네잎클로버를 찾는 게 공략 방법인 듯했다.
신화급 웨이브 안이니 단순히 네잎 클로버를 가져다주는 게 전부는 아 닐 거다.
문 엘프 중에서 누구에게 네잎클로 버를 줄지 선택하는 과정에서 분쟁 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 문 엘프는 자멸했고 파로스만 남은 형국이었다.
네잎클로버를 찾아 봤자 줄 사람은 파로스밖에 없었다.
‘누구에게 줘야 하냐는 문제는 해 결되었군. 그렇다면 이 넓은 숲에서 어떻게 네잎클로버를 찾느냐가 관건 이겠어. 월리를 찾아라도 이 정도 난이도는 아닐 텐데 말이지.’
나무표지판을 다 읽었을 즈음,김 혜림이 아공간 반지에서 천 마스크 를 꺼내선 얼굴에 장착했다.
김혜림은 호흡을 정리하며 한결 나 아진 표정을 지었다.
“쓰읍 하아,마스크 끼니까 조금은 낫네요. 꽃은 좋아하지만 꽃가루는 싫어요.”
“그게 내가 꽃다발을 선물하지 않 는 이유야.”
“파로스…… 씨? 제가 이 사람한테 반격하려면 좀 더 숨 쉬기 편한 곳 이 필요하거든요? 거처까지 얼마나 걸리죠?”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파로스는 봄꽃이 만개한 꽃밭을 가 로질러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파로스를 따라 꽃잎을 즈려밟으며 걷고 있는데 드문드문 나뭇가지를 엮어 세운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만든 묘비였다.
묘비의 숫자는 수백 개에 달했다. 만개한 꽃잎 사이에 남아 있는 부러진 이빨과 개미가 달라붙은 썩은 살점,바닥에 얼룩진 핏자국 등이 동족상잔의 잔혹함을 여실히 드러내 고 있었다.
죽은 자가 무덤을 만들 린 없다.
파로스 혼자 죽은 문 엘프를 하나 하나 묻어다가 묘비를 세운 것이리 라.
이슬이 남아 있는 묘비에서 홀로 쓸쓸히 동족을 묻고 있는 파로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나마 김혜림이 눈이 따가워 끙끙 거린 덕분에 조금은 슬픈 분위기가 옅어졌다.
“쓰읍 하아,쓰읍 하아. 토르족이 쓰던 마스크 헬름이라도 쓰면 나아지려나. 강현 씨 어떻게 생각해요?”
강현은 꽃가루 차단 효과는 있겠지 만 부끄러움은 너의 몫이란 말을 남 기며 어깨를 으쏙였다.
잠시 후,강현 일행은 파로스의 집 에 도착했다.
파로스의 집은 거목의 나뭇가지 위 에 오두막집을 지어 놓은 형태였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떨어지지 않을 까 싶어 위태위태해 보였는데,막상 집 안에 들어가니 탄탄하고 아늑했 다.
파로스는 화로 위의 주전자에 물을 채우며 말했다.
“편한 곳에 앉으십시오. 금방 차를 끓여 내오겠습니다.”
강현은 의자에 앉는 대신 벽에 기 대며 입을 열었다.
“민감한 얘기지만 이거 하나는 꼭 물어 야겠군.”
“문 엘프끼리 싸운 이유를 묻고 싶 으신 거군요.”
“맞아. 대답해 주겠어?”
“그저……. 하아,아주 어리석은 자
들의 이야기입니다. 문 엘프의 전설 중에 ‘크리스털 클로버’를 가진 자 문 엘프의 왕이 되리란 전설이 있습 니다.”
“크리스털로 된 네잎 클로버?”
“나무표지판의 문구를 보셨으니 이
해가 빠르겠군요. 원래라면 공략자 가 찾아 주어 왕이 될 자격이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이 규칙이었습니다 만,몇 달 전에 문 엘프 중에서 누 군가가 크리스털 클로버를 찾아냈답 니다. 그게 이번 참극의 발단이 되 었지요.”
“서로 왕이 되기 위해 크리스털 클 로버 쟁탈전을 벌였다?”
파로스는 화로의 불빛 때문에 벌겋 게 상기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주전자 안의 물이 펄펄 끓을 즈음 파로스가 침묵을 쨌다.
“네,모두가 왕이 되고 싶어 했었 죠. 곁에 아무도 없는 왕이 될 때까 지……. 참……. 미련한 짓을 해 버 렸습니다.”
“유감이군.”
“하하,이거 한심한 모습을 보여드 렸군요. 아무튼 전 이곳을 떠나고 싶습니다. 각층마다 탈출구가 있단 건 알고 있는데 웨이브 내 주민은 사용하지 못해서 말이죠. 혹시나 공 략자와 함께라면 다른 출구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날마다 통로 에서 기다렸습니다.”
“네가 신화급 웨이브 바깥으로 나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확답을 주기 힘들어. 시도해 본 적이 없거드 ”
“그럼 이번에 시도해 보면 되겠군 요. 절 데려가 주십시오.”
“글쎄. 발목 잡을 인원은 포함시키 지 않는 주의라서.”
“발목 잡을 만큼 약하진 않습니 다.”
“자신 있게 말하는군.”
“하다만 이야기입니다만,크리스털 클로버를 누가 찾아냈는지 아십니 까?”
파로스가 말하다 말고 주머니에 손 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그의 손이 빠져나오면 서 크리스털로 이루어진 네잎클로버 가 함께 나타났다.
파로스는 크리스털 클로버를 애지 중지하는 보물을 보듯 애틋하게 어 루만지며 말했다.
“이거 하나 때문에 모두를 죽여야 했지요. 모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