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트럼프 미궁에서 나오자 썰렁한 가 을바람이 얼굴 가득 부딪쳐 왔다. 신선한 공기를 마셔 본 지가 언제 던가.
럽럽한 던전 공기만 마시다가 산속 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한 결 편안해졌다.
동녘이 어슴푸레 밝아지고 있는 걸 로 보아 새벽임을 알 수 있었다. 강현은 라이를 몰아 쉘터가 바라다 보이는 봉우리로 향했다.
이슬에 젖은 낙엽으로 미끄럽기 짝 이 없는 산길을 단숨에 타고 봉우리 에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봉우리 너머는 엉 망진창이 었다.
강현은 그랜드 마운틴 쉘터를 한눈 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난장 한번 성대하게 벌여 놨군.”
그랜드 마운틴 쉘터의 모습은 그야 말로 폐허가 따로 없었다.
쉘터 전체로 잿더미가 앉아 있었 고,그 주변 산등성이로까지 불길이 훑고 지난 둣 시커떻게 불타 있었 다.
강현이 불타 버린 쉘터를 파악하고 있는데 트럼프 미궁 던전 출구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김혜림과 루나,김윤중,지트였다.
김혜림은 강현의 무사한 모습을 보
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다행이다. 무사했네요.”
강현은 혁명군 소속인 김윤중이 함 께 있는 것에서 혁명군이 김혜림 일 행 역시 습격했음을 알아차렸다.
“그쪽에도 혁명군이 쳐들어갔었 나.”
“아,몰랐었어요?”
“나한테 모든 병력이 다 온 줄 알 았거든.”
강현에 대해 알고 있다면 강현 한 명을 잡는 것을 목표로 전력을 다해 야 한다는 걸 알 거다.
특히나 니케의 경우 고메즈조차 강 현을 잡는데 실패했음을 직접 목격 했지 않은가.
의심할 여지없이 자신을 잡으려고 전 병력을 다 끌고 온 줄 알았다. 그런데 니케는 어설프게 효율을 추 구한 나머지 스스로 전력을 반 토막 낸 채로 자신을 추격했던 것이었다. 그랬군. 김혜림과 루나 쪽에도 병 력이 갔던 거였나.
김혜림과 나 역시 멀쩡한 걸로 보 아 두 사람도 손쉽게 혁명군을 정리 한 것으로 보였다.
서로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옮던 가운데 강현의 시선이 김윤중에게 머물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 데 김윤중이었군.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혁명군
을 배신하고 항복을 해 온 건가.
꽤 오래전부터 니케와 함께 움직였 던 걸로 아는데 말이지.
쉽게 항복할 리가 없는 사람인 걸 로 아는데 의외군.
여태까지 혁명군이 보인 태도를 감 안하면 거짓 항복도 염두에 둬야 한 다.
강현은 노이즈를 감지하기 위해 귀 를 종긋 세우며 질문을 날렸다.
“김혜림,그쪽에 있는 사람과는 어 쩌다가 같이 다니게 됐지?”
강현이 경계심을 알아차린 김혜림 이 손사래를 치며 설명에 나섰다.
“아차,소개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강현 씨 인사드려요. 제 아버지예요.”
“오랜만이군,최강현. 줄곧 딸을 찾 아다녔는데 자네에게 신세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두 사람의 목소리에 노이즈는 섞이 지 않았다.
모두가 사실이라는 거다.
정말이지 의외의 인연이었다.
김혜림의 아버지가 김윤중이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김윤중이 김혜림 일행과 합류한 것도 이해가 간다.
강현은 예상치도 못하게 서로 이어 져 있었음을 알아차리며 검을 늘어 뜨렸다.
“그랬었습니까? 오해할 뻔했군요.”
“이번 일은 미안하네.”
“아저씨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 다. 모두 니케 잘못이지요.”
“혜림이한테서 자네가 세이아나와 손을 잡은 이유는 전부 전해 들었네. 세계의 초기화라……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우린 자네가 커뮤니티 와 손잡은 줄로만 알았으니……
“이번 일과 관련해서 여러모로 할 말이 많습니다. 일단 쉘터로 돌아가 시지요.”
“들어갔다 오게나. 난 쉘터 바깥에 서 대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김윤중은 쉘터 내의 누구에게도 손 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혁명 군 소속으로 쉘터를 습격했었다.
주민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게 분명했다.
괜히 자신이 함께 가서 강현 일행 과 주민들 사이에 분쟁의 씨앗이 될 바에는,바깥에서 기다리겠다는 뜻 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 사태의 무대 뒤에 관련된 이 야기가 있습니다. 다 같이 들으셔야 하니 따라오십시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만에 하나 분쟁이 생기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 다는 뜻이 전해져 왔다.
강현에게 있어,니케 사건이 이미 정리된 사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이토록 요란한 사건이었건만 강현 은 벌써 앞을 보며 달릴 생각만 하 고 있었다.
김윤중은 챙이 넓은 모자를 꾸욱 누르며 어깨의 힘을 뻤다.
‘나도 참 사람 보는 눈이 없었군.’
기껏 김혜림과 재회했는데 김윤중 만 따로 놔두게 되면,김윤중도 껍 껍하고 김혜림도 찜찜해진다.
자잘한 분쟁은 자신이 책임짐으로 서 김윤중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건 강현의 실력이다.
강현을 지원하기 위해 트럼프 미궁 에 들어갔으나 입장하자마자 던전이 클리어되어 모든 문이 개방되었다. 출구까지 일직선으로 질주하면서 2-1 구역에서 벌어진 전투의 흔적을 목격했었다.
매캐한 산성액 냄새와 불 탄 흔적, 죽은 니케와 혁명군 단원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투가 치열한 만큼 강현도 무사하 진 않을 거라 여겼는데 이게 웬 걸,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게 아닌가. 스텟량과 가진 스킬,보구 같은 객 관적인 지표로 평가할 사내가 아니 다.
김윤중은 강현을 너무 과소평가했 음을 깨닫곤 사과의 말을 꺼냈다.
“미안하게 됐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저 씨께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 셨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자네를 과소평가한 것에 대한 사과일세. 솔직히 니케를 상대로 고전할 거라고 여겼네.”
“그 얘기였습니까. 괜찮습니다. 모 두들 한 번씩은 거치는 과정이니까 요.”
“자네 보기보다 좋은 사람이군.”
“글쎄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물 이라고 해서 말이죠.”
“당하는 입장에선 무슨 말을 못하 겠나.”
“왠지 비행기 태워 주시는 느낌이
듭니다만. 달리 하고 싶은 말씀이라 도 있으십니까?”
“그게…… 자네는 혜림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최종적으로는 김혜림에 대한 강현 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것이었다. 아버지 되는 입장에선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김혜림이 강현에 대해 말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느껴진다. 김윤중으로선 김혜림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강현은 약간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 는 김혜림을 힐끗 보곤 그녀에게 들 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묵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강현의 말을 들은 김윤중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두 사람에겐 두 사람만의 속도가 있다는 건가.
참견할 생각은 없다.
그저 강현의 의향을 확인한 것만으 로도 만족한다.
김윤중은 강현과 마찬가지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다행이군. 나중에 본인에게도 꼭 들려주게나.”
?
그랜드 마운틴 쉘터로 돌아간 강현 은 지트를 시켜 주민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주민들은 절망에 빠져 있기보다는 의욕을 드러내며 복구 작업에 열중 이었다.
“오늘 묶을 공간부터 확보하자! 비 상용 창고로 가서 물자를 꺼내 와야 해! 남자들은 창고에서 천막을 꺼내 서 설치하고,여자들과 아이들은 필 요한 만큼만 식량을 꺼내! 아참참, 우물 확인 잊지 마! 물을 뜰 수 없 을 것 같으면 계곡에 가서 퍼 와야 해!”
발레나의 지시 하에 주민들이 일사 불란하게 움직였다.
평소부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온 듯하다. 방어병력이 전멸하긴 했지만 주민 들은 전원 살아남았다.
주민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되 시름 에 잠기지는 않았다.
죽은 자들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으 며 그들의 죽음을 부정하는 건 목숨 걸고 싸운 자들을 모욕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랜드 마운틴 쉘터의 주민들은, 살아남은 자들은 살아 남은대로 힘 을 내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다.
강현은 발레나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발레나,괜찮으십니까?”
“뭐 언젠간 벌어질 일이었으니까. 상대가 커뮤니티 척살대가 아니라, 혁명군이었다는 건 의외지만 말이 야.”
비상창고까지 준비되어 있는 걸로 보아 쉘터를 버리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평소부터 훈련을 해 온 모양이 다.
추수는 끝내 놓았고,집은 다시 지 으면 될 일이다.
쉘터가 남아 있으며,집터가 남아 있고,아이들이 무사하다.
세이아나가 거두기 전의 비참한 삶 을 경험한 이들에게 이 정도 사태는 일도 아니었다.
강하다는 건 단순 무력만 두고 말 할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일어날 기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게 강한 것이 아닐 까.
그랜드 마운틴 쉘터 주민들의 강한 의지를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강현은 지트와 라이에게 고갯짓을 했다.
“지트,라이. 복구 작업에 동참하도
?록
“냐?”
“알겠습니다,주군.”
지트와 라이를 보낸 강현은 발레나 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혁명군과 싸우면서 알아낸 게 있
습니다. 따로 얘기를 했으면 합니다 만.”
“중요한 이야기니?”
“세이아나의 신변과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강현의 말에 발레나의 얼굴이 딱딱 하게 굳었다.
“샬롯! 잠깐 자리를 비울 테니 나 대신 현장지휘 좀 해 주렴.”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강현은 발레나뿐만 아니라 김혜림, 루나,김윤중을 데리고 조용한 공터 로 이동했다.
모두가 경청할 준비가 된 걸 확인 하고 나서야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의 첫 마디는 다른 이들에겐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다.
“니케가 강해질 수 있도록 손을 쓴 자가 있습니다.”
김윤중은 표정을 달리하며 미간을 좁혔다.
“잠깐 기다리게. 니케는 망자의 섬 에서 석 달간 지내면서 실력을 키웠 네. 자네의 말대로라면 니케가 본인 능력껏 살아남은 게 아니라,그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자가 있다 는 뜻으로 들리네만.”
강현은 김윤중 쪽으로 고개를 돌리 며 대답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누군가의 도 움 없이 단기간에 지역장급으로 성 장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내가 니케를 데리러 갔을 때 다른 자의 흔적은 찾지 못했네.”
“대놓고 니케를 도와준 게 아니라 니케 본인조차도 모르게 몰래 도와 주있겠지요.”
“단언하기에는 너무 단서가 부족하 지 않나? 정말로 니케가 혼자서 강 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만. 아, 자네의 의견에 딴지를 거는 건 아닐 세. 내 생각은 이렇다고 말하는 거 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는 알 겠습니다. 하지만 니케와 싸우다 보 니 확실하게 느껴지는 게 있더군 요.”
“그게 뭔가?”
“니케의 전투 방식이 너무 단순하 더군요. 감당하기 힘든 몬스터들을 상대로 살아남은 자의 움직임이 아 니었습니다. 경험상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해 탐색전부터 하기 마련이 지요. 그런데 니케는 무식하게 화력 자랑부터 하더군요.”
루나가 공감하는 바가 있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루나도 처음에 지트랑 라이랑 사 냥할 때 그랬었어! 지트랑 라이가 몬스터 약화시켜서 몰아주면 무조건 한 방에 처리하는 것만 생각했었어. 아?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 립다?”
“김혜림,얘한테 아저씨 말투 같은
거 가르치지 마라.”
“네? 제가 가르친 거 아녜요.”
“맞아! 엄마한테 배운 거야!”
“노처녀 생활이 길어지면 세이아나 처럼 되는 건가. 담금주 수집할 때 부터 알아보긴 했다만.”
강현은 삼천포로 빠져드는 대화를 바로 잡았다.
“세이아나가 아저씨 같다는 걸로 마무리하도록 하지. 윤중 아저씨,하 다만 얘기를 이어서 하자면 니케는 망자의 섬에서 편하게 사냥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극한의 환경 속에서 익힌 전투 습 관이라는 건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 는다.
아무리 분노에 차 있다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오히려 습관대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니케는 강현을 앞두고 맹목 적이고 단순하게만 움직였었다. 김혜림과 루나는 강현의 말을 듣고 고민하더니 금세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낸다는 방식 에 익숙해졌기에 강현의 말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윤중은 강현 일행의 방식 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자네 말대로 니케가 다른 이의 개
입 덕분에 강해졌다고 하세. 그렇지 만 뭘 어떻게 개입해야 본인 모르게 지원을 할 수 있는 건가?”
“간단합니다. 2? 3억 CP가 든 CP 교환기를 이전 도전자의 유품인마냥 적당한 곳에 떨어뜨려 놓으면 될 일 이지요. 스텟만 높으면 안전한 곳에 서 사냥만 해도 스킬과 보구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김윤중은 니케를 마중 나갔을 때 그가 해안가에서 머무르고 있던 것 을 떠올렸다.
니케의 성향상 우연히 주운 CP교 환기 덕분에 강해졌다고 말할 리가 없다.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니케 혼자만
의 힘으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김윤중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강한 충격을 느끼며 손으로 턱을 매 만졌다.
“그럼 니케가 강해진 건……
“2~3억 CP를 서슴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건 커뮤니티 지역장 이상급의 인물뿐입니다. 지역장급 이상의 인 물이 니케와 제가 싸우게 하도록 손 을 썼다고 봐야지요.”
“일이 잘 풀리면 자네를 제거할 수 있고,실패하더라도 손 안 대고 혁 명군을 제거할 수 있으니 어느 쪽이 든 커뮤니티는 이득을 본 셈이군. 후우,처음부터 놈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던 거였나.”
김윤중이 코로 긴 숨을 내쉬며 눈 을 질끈 감았다.
니케는 물론이고 혁명군 전부가 분 노하는 동안 커뮤니티 놈들이 얼마 나 비웃었을까.
농락도 이런 농락이 없다.
더 답답한 건 혁명군은 아직도 강 현이 적인 줄 안다는 거다.
자신들이 커뮤니티의 소모품이 되 어 가고 있단 것도 모르고.
한창 이야기가 니케에게 초점이 맞 춰져 있던 중 잠자코 있던 발레나가 세이아나를 언급했다.
“그럼 세이아나는? 세이아나는 어 떻게 되는 거니? 커뮤니티에서 너와 세이아나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세 이아나도 위험해지는 거 아니니?”
강현은 검지로 검갑을 튕기며 진지 하게 말했다.
“이제부터가 본론입니다. 우리가 잘못 움직이면 세이아나가 죽으니 집중해서 들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