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사이젠은 얼굴의 주름을 일그러뜨 리며 의문을 표했다.
“지역장들 중 한 번도 문제를 일으 킨 적 없던 아이다. 이제 와서 무슨 바람이 불어 배신을 한다는 것이 냐?”
“수면이 고르다 하여 물 밑까지 고 요하단 법은 없지요.”
“혁명군이 밀정의 존재를 알아차리 고 거짓 정보를 흘린 거라면? 그리 될 경우 애꿎은 세이아나만 잃는 셈 아니더냐.”
지역장끼리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장로회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지미의 말마따나 세이아나가 고메 즈를 처리하고,전설급 웨이브도 공 략해 냈다면 그 공적은 마땅히 치하 받아야 한다.
그리되면 7인의 지역장 중 세이아 나의 영향력이 가장 커질 터.
지미로선 막고 싶은 사태다.
혹여나 지미가 세이아나를 견제하 기 위해 지어낸 말이 아닐까?
지미는 사이젠이 자신을 의심의 눈 초리로 보고 있는 것이 어이없을 따 름이 었다.
‘기껏 정보를 가져왔더니 역으로 의심을 살 줄이야.’
세이아나는 명색이 커뮤니티 창단
멤버 중 한 명이다.
여태껏 커뮤니티 내에서 문제를 일 으킨 적도 없고,정치에 참여한 적 도 없다.
커뮤니티 내에서 몇 안 되는 청렴 한 이미지의 인물이라는 거다.
그런 탓에 누구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지미는 머리를 굴려 계책을 짜냈 다.
“그럼 이리하시는 건 어떨지요. 먼 저 세이아나를 이리로 불러들이는 겁니다. 명분으론 고메즈 처리 건과 전설급 웨이브 공략을 한 공적을 치 하하기 위해서라고 해 두면 되겠지 요.”
“그 후에는 어쩔 생각이더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혁명군의 새로운 수장인 니케가 현재 최강현 을 치기 위해 세이아나의 지부로 향 하고 있다는군요. 정보가 사실이라 면 조만간 세이아나의 지부가 혁명 군에게 공격당하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대로라면 세이아나가 최강 현과 함께 있었다는 게 증명되겠 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만약 계획 이 잘 풀리면 최강현은 세이아나 없 이 혁명군을 상대해야 하고,우리는 본부에 도착한 세이아나를 포박하면 될 일입니다.”
즉 세이아나를 본부에 불러들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는 뜻이었다.
세이아나가 정말 배신자라면 그녀 의 곁에는 최강현이 있을 거다.
현재 세이아나는 자신의 지부로 복 귀 중일 거고,최강현이 함께 움직 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 니케는 최강현을 치기 위해 세이아나의 지부를 공격할 거다.
니케가 세이아나의 지부를 공격한 것 자체가 최강현이 있다는 증거이 며,그것은 곧 세이아나의 배신을 뜻한다.
그 뒤에는 본부에 도착한 세이아나 를 체포하면 될 일이다.
사이젠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상
념에 잠겼다.
그가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 래 걸리지 않았다.
“세이아나에게 종이 전서구를 띄워 라. 당장 본부로 오라고 하도록.”
*
강현 일행은 근 한 달간 남쪽으로 이동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퍼석퍼석한 들판 대신 산간지대가 많이 보였다. 카니발 대륙 북부 지방이 평야지대 라면,카니발 대륙 중부 지방은 대 부분 산간지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산간지대에 쉘터를 세 우는 건 매우 비효율적이다. 주거지역으로 쓸 수 있는 땅이 적 으니까.
경사진 곳이 많아서 교통편이 불편 하고,일교차의 차이도 큰데다 날씨 변덕까지 심하다.
여러모로 편히 지내기에는 적합하 지 않다.
그러나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쉘터의 크기는 실면적이 아니라 평 면적을 기준으로 측정된다.
산이 높다 하더라도 둘레가 얼마 되지 않는다면 산 전체를 쉘터로 삼 을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산의 특색을 살린 임업이나
고랭지 농업,계단식 전답,화전으로 식량문제 또한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쉘터 유지비 관리가 쉽 다.
라이를 몰며 그랜드 마운틴을 오르 던 강현이 질문을 던졌다.
“쉘터 근처 반경 5km 이내에 던전 이 5개 이상 있으면 유지비가 늘어 나는 게 아니었나?”
세이아나는 데릭로우스를 몰아 높 은 바위 위에 훌쩍 오르며 검지로 선을 그렸다.
“도상거리가 아니라 실제거리 5km 로 계산해야 해. 쉘터와 던전 사이 에 봉우리 하나만 있어도 실제거리 5km 정도는 그냥 넘어가지.”
보통은 평지에 쉘터를 세우니까 반 경 5km로 계산하는 거지,실제거리 5km가 정확한 계산법이라고 한다. 산간지대는 지형 특성상 경사면이 많고,경사면의 실거리는 도상거리 보다 훨씬 길다.
고로 쉘터 근처에 던전이 많이 생 겨나도,실제로 유지비에 영향을 주 는 던전의 수는 평지보다 적을 수밖 에 없다.
“그래서 평지의 쉘터보다 던전 정 리에 인력과 비용이 덜 든다고 한 거였나.”
“맞아. 지부에 머무르는 동안 CP 를 수집할 던전은 넘쳐나니까 마음껏 공략하도록 해.”
“스렛도 각성시키고,쌓여 있는 던 전도 정리하고 일석이조로군.”
“한 달 동안 이동만 해서 좀이 쑤 시나 봐?”
“너무 쉬면 머리가 둔해져.”
“후후,그거 운동 중독이랑 같은 거 아냐? 이 경우엔 공략 중독이려 나.”
봉우리 하나를 넘자 눈앞에 그랜드 마운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부채처 럼 겹쳐져 있어 웅장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먼 옛날,겸재가 금강전도를 그렸 을 때 이러한 풍경을 보고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봉우리 사이의 계곡마다 미처 증발 하지 못한 습기가 안개를 이루고 있 었고,울창하게 자라나 있는 삼림 사이로 갖가지 형태의 던전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보였다.
강현 일행은 좁은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첩첩산중으로 들 어갔다.
김혜림은 피부에 들러붙는 산모기 들에게 손바닥 철퇴를 내리쳤다.
짜악!
“본의 아니게 헌혈 시간이 되어 버 렸네요.”
엘리스가 깜빡 했다는 양 이마를 두드리며 작은 약병을 몇 개 꺼냈다.
“아차차,바르는 모기향을 드린다 는 걸 깜빡했네요. 다들 이거 얼굴 이랑 팔에 바르세요.”
“킁킁,한약 냄새랑 조금 비슷하려 나. 뭘로 만든 거예요?”
“그랜드 마운틴에서 나는 약초를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었답니다. 피 부에 좋은 약이니까 듬뿍 바르세 요.”
“강현 씨,얼른 발라요. 요즘 피부 도 안 좋아졌는데 그냥 아예 통째로 붓죠.”
“넌 내가 직접 먹여 주지. 뱃속에 까불벌레 좀 퇴치하게.”
김혜림은 벌레 쫓는 약을 바르면서
세이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 지부를 세우게 됐어요?”
“대단한 이유는 아냐. 원래 그랜드 마운틴은 세금 못 내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숨던 곳이었거든. 가만히 죽 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내가 직접 월터를 세우고 주민으로 받아들여 줬지.”
한번 숨으면 쉽사리 발각되지 않 고,평지보다는 클로징 포션 없이 지내기 쉬운 곳이다.
죄수가 되어 제물로 바쳐지는 것보 단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산속 생활이 쉬울 리가 없 다.
그 비참한 난민 생활에서 구해 준 게 세이아나였던 것이다.
강현은 예전에 세이아나가 자신의 디스트로이들을 두고 했던 말을 떠 올렸다.
‘커뮤니티의 디스트로이가 아니라 나 세이아나의 부하들이야.’
오직 세이아나에게만 충성을 다하 는 부하들이라 했는데 이제야 이해 가 간다.
난민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준데 다,디스트로이 수준으로 성장하게 끔 키워 주기까지 했다.
그녀들에게 있어 세이아나는 대신 목숨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을 은인인 셈이었다.
한참을 이동하던 강현 일행은 이윽 고 산기슭에 위치한 쉘터 관문에 도 착했다.
커뮤니티 제복을 입은 자들이 창을 교차하려다가 세이아나를 발견하고 는 경례를 취했다.
“세이아나 지역장님. 수고 많으셨 습니다. 볼일은 잘 보셨는지요.”
“그럭저럭이야. 발레나는 안에 있 어?”
“계십니다. 지금이 오후 2시니까 아마 수업 중이시지 않을까 싶습니 다. 지역장님이 오셨다고 전할까 요?”
“아냐,내가 나중에 따로 부르겠 어.”
“알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 오.”
문지기들이 세이아나 뒤에 있는 자 들의 모습을 훑었다. 그러곤 묵념하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떠날 때보다 디스트로이의 숫자가 적어졌다.
임무 중에 전사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경건한 태도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를 갖춘 것이었 다.
관문 안엔 산골 마을의 정경이 펼 쳐져 있었다.
계단식 전답에선 밀짚모자를 쓴 농 부들이 때늦은 새참을 먹고 있었고,화전을 했는지 검게 그을린 밭두렁 에선 아이들이 소독차라도 만난 양 연기를 쫓아다녔으며,포도 밟는 아 낙네들의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지럽 혔다.
쉘터 안이 평화롭다고 느끼기는 처 음이었다.
세이아나의 집으로 가던 중 루나가 산등성이 부근을 가리켰다.
“오빠오빠,저기 봐 봐. 애들이 잔 뜩 모여 있어.”
산등성이에는 운동장 크기의 공터 가 딸린 목조 건물이 있었다.
공터에선 루나만치 작달만한 아이 들이 공을 차고 뛰어놀거나,그네 혹은 시소를 타며 놀고 있었다.
다소 조잡하긴 하다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강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넌지시 말을 꺼냈다.
“학교처럼 보이는 곳이 있군.”
“학교처럼 보이는 곳이 아니라 학 교야. 내 쉘터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무료로 학교에 다닐 수 있어.”
“검술이나 마나운용법을 가르치나?”
“후후,병력 양성용으로 만든 게 아냐. 원래 세계 어디에나 있던 학 교지. 수학이랑 과학,세계사와 일반 상식을 가르치고 있어. 카니발이라 고 해서 농사짓는 법이랑 싸우는 법 만 익혀야 된다는 법은 없잖아? 내 쉘터에 사는 사람만큼은 인간 냄새풍기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어서 설립한 거야.”
학교의 모든 시설과 선생의 임금은 세이아나가 자비를 들여 유지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이세계에 소환된 자들 이야 원래 세계에서 기초교육을 받 았지만,이세계에서 태어난 아이들 은 원래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다.
적어도 자신이 어디 사람인지,어 떻게 살아야 하는지,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줄 기 관이 필요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정말 별거 아 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쉬이 행할 수 없는 작은 기적이기도 했다.
학교 옆을 지나고 있는데 운동장의 아이들이 데릭로우스를 보곤 세이아 나가 귀환했음을 알아차렸다. 아이들이 두 팔 벌려 세이아나를 환영했다.
“와! 세이아나 님이다!”
“세이아나 님! 저 어제 수학 만점 받았어요!”
“저도요! 저도요!”
“이제 피망 꼭꼭 잘 씹어서 먹을 수 있게 됐어요!”
세상에서 가장 큰 업적은 아이가 홀로 걸음마를 뗄 수 있게 되는 것 이라 했던가.
아이들의 자랑 역시 그 연장선에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거다. 세이아나는 세상을 다 가진 양 행 복한 미소를 지었다.
운동장이 시끌벅적해지자 목조건물 에서 푸근한 인상의 40대 여인이 나왔다.
“이 녀석들! 쉬는 시간 끝났으니까 얼른 교실로 들어가! 들어가기 전에 손 씻는 거 잊지 말고!”
“선생님! 세이아나 님이 돌아오셨 어요!”
“세이아나가? 오,진짜네. 선생님 잠깐 얘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들어가서 자습하고 있어.”
“네에?”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학교 안 으로 들어갔다.
그와 교차하듯 40대 여인은 운동 장을 가로질러 강현 일행이 있는 곳 으로 다가왔다.
세이아나는 데릭로우스에서 내리며 여인과 포옹을 나누었다.
“돌아왔어요,발레나.”
“고생 많았다,얘야. 이번 일은 생 각보다 오래 걸렸구나. 하려던 일은 잘 마무리 됐니?”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과는 좋은 편이에요.”
세이아나가 쉘터에 귀환하자마자 발레나란 사람을 찾았었다.
세이아나와 친밀한 사이인 듯하다.
발레나는 세이아나의 등을 부드럽 게 토닥여 주다가 포옹을 풀었다. 그러곤 문득 생각난 게 있는 듯 치 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 다.
“네가 없는 동안 본부에서 종이 전 서구를 보냈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