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화
하시모토로선 미치고 팔짝 될 노릇 이었다.
봉인 마법을 발동하는 순간 자신의 부하들이 한순간에 전멸당한 셈이지 않은가.
그것도 10? 20명도 아니고 무려
70명이나 되는 인원이 말이다.
봉인 마법진 발동과 함께 원래 부 하로 데리고 있던 디스트로이는 물 론이고,각 지부에서 끌어온 실력자 들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소멸당해 버렸다.
개중에는 장로회에서 반드시 임무 를 성공시키라며 붙여 준 그랜드 마스터도 3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부하들의 증발로 얼이 빠져 있는 사이,죄수들은 울타리를 넘어 진지 바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모래집이 무너지자마자 탈출하는 개미 떼처럼 말이다.
하시모토는 황급히 정신을 가다듬 으며 대처에 나서고자 했다.
‘놓치면 안 돼! 지금 제물까지 놓 쳤다간 정말로 봉인할 수 없게 된다 고!’
부하 70명이 제물로서 소멸당했으 니 나머지 130명을 추가로 바치면 웨이브 보석을 봉인할 수 있다.
허나 제물로 써야 할 귀중한 죄수 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 이상 도망치게 놔둬선 안 된다.
하시모토는 손을 위로 들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팔목에 착용한 팔찌가 붉은 빛을 머금더니 지름 5미터짜리의 거 대 불구슬이 소환되었다.
하시모토가 소유한 전설급 보구인 ‘세븐즈 링’의 효과였다.
7개의 SSS급 스킬을 사용할 수 있 게 해 주는 보구로서,그중에서도 ‘헬 볼’은 단순무식할 정도로 강력 한 광역 스킬이었다.
하시모토가 헬 볼을 소환한 상태에 서 언덕 아래를 향해 일갈을 내질렀 다.
“멈춰라! 전원 잿더미가 되고 싶으
냐!”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악바리 를 쓰며 내지른 일갈이다.
그 일갈이 메아리처럼 넓게 퍼지며 죄수들의 귀에 닿았다.
도망치던 죄수들이 무시무시한 열 기를 뿜어내는 거대 불구슬을 목격 하곤 발걸음이 얼어붙었다.
불구슬 주위로 이글거리는 아지랑 이며,눈 뒤집히기 직전인 하시모토 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어,어쩌지? 저런 게 날아온다면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도 제물로 죽는 건 마찬가지야. 아까 조직 놈들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다들 봤잖 아.”
“난 집으로 돌아갈 거야! 되도 않 은 누명 때문에 이딴 곳에서 죽는 건 사양이라고!”
가족,미래,꿈.
갖가지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 왔던 그들이다.
전설급 웨이브 봉인이라는 되도 않 은 계획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누명 을 뒤집어쓰고 여기까지 끌려왔다. 제물로 바쳐져 죽나,불에 타 죽나 어차피 죽는 거라면 조금이라도 발 버등 쳐 보겠다.
하시모토의 협박이 되려 도주 의지 에 불을 붙였는지 죄수들이 아까보다 더욱더 필사적으로 내달리기 시 작했다.
하시모토로선 임무를 위해 죄수들 을 죽일 수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죄수들 따위에게 무시당했 다는 사실이 하시모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감히 죄수들 따위가.
감히 나 하시모토 앞에서.
이놈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내 말을 무시해?!
너희와 나는 태생부터 다르다는 걸 알려 주마.
반쯤 눈이 돌아간 하시모토가 냅다 헬 볼을 언덕 아래로 내리 던졌다. 화르르륵!
이대로 헬 볼이 작렬했다가는 죄수 들은 물론이고 전설급 웨이브 보석 주변이 온통 불바다가 될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헬 볼의 작렬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장장 15미터짜리 거대 스노우 맨이 솟아났다.
스노우맨이 수류탄을 받듯 앞으로 엎어지면서 헬 볼을 깔아뭉겠다.
철퍽! 과과과과콰!
스노우 맨과의 충돌 때문에 헬 볼 이 언덕 중턱에 작렬하며 남쪽 언덕 전체가 불길로 휘감겼다.
15미터짜리 거대 스노우맨은 금세 녹아내려서 언덕을 질펀하게 적셨 다.
언덕 아래에선 세이아나가 부스스 한 은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흐암? ,바비큐 파티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 아냐?”
하시모토가 이마의 핏줄을 실룩거 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세이아나,지금 건 내게 시비를 건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어머,머리에 똥만 찬 인간의 표 본이라도 될 생각이야?”
“뭐라고? 지금 당장 관 속에 들어 가고 싶나?”
“묘비명엔 ‘제물로 쓸 죄인들을 죽 이려 한 반역자’를 막으려다 죽은 여자라고 쓰면 되겠네.”
“그건……
일순 하시모토의 말문이 막혔다.
방금 전 홧김에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리될 경우 가장 곤란에 처하는 것은 하시모토 본인이었다.
장로회에 임무 실패 보고를 할 때 홧김에 제물을 죽여서 일이 실패했 다고 보고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잠시 주춤했던 하시모토가 팔을 붕 붕 휘두르며 악을 썼다.
“됐으니까 죄수들을 잡아와라! 이 대로 가다간 제물로 쓸 자들이 모자 라게 된다!”
세이아나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 쓱거렸다.
“그건 네 사정이지.”
“건방진 년,내 뒤에 누가 있는지 잊었나? 잔말 말고 임무에 협조하란 말이다!”
“도움을 요청할 때는 좀 더 정중하 게 부탁하라고 하지 않던?”
“크옥,정녕 내가 임무에 실패해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글쎄? 중요한 건 이제 와서 내가 쫓아 봤자 절반도 못 잡을 거란 거 지. 정 제물이 필요하면 혼자서라도 쫓아가 보든가.”
“젠장 맞을!”
하시모토가 부리나케 데릭로우스를 소환하며 죄수들을 쫓기 시작했다. 하시모토도 세이아나가 수작을 부렸음을 눈? 치채고 있을 거다.
그러나 그녀가 범인이란 증거가 없 었다.
게다가 지금은 도망친 제물들을 한 명이라도 회수하는 게 더 급했다. 하시모토가 허겁지겁 진지 바깥으 로 나간 후.
엘리스가 석궁을 꺼내며 세이아나 에게 말을 걸었다.
“완전히 등을 드러냈는데 지금 쏴 서 정리해 버릴까요?”
커뮤니티의 전력 감소와 세이아나 에게 무례를 범한 무뢰한이라는 점 때문에 모두가 하시모토를 척살하고 싶어 했다.
정리할 수만 있다면 지금 정리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세이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하시모토가 가게 놔두었다.
“놔둬. 응석받이 무능력자 같지만 명색이 지역장이야. 너무 궁지에 몰 아세우면 필사적으로 송곳니를 드러 내겠지. 굳이 입지 않아도 될 피해 를 입을 필요는 없잖아?”
사냥꾼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있 다.
초식 동물은 도망갈 생각조차 못하 게 하고,육식 동물은 도망갈 생각 만 하게 만들어라.
하시모토도 지역장급의 무력을 갖 추고 있는 만큼 마냥 얕볼 수만은 없다.
너무 몰아세워서 사생결단을 하고 덤벼 오면 세이아나 측도 피를 볼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한다.
게다가 아직 드뷔레가 남아 있다. 아마 북쪽 언덕 너머에선 드뷔레가 정신없이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을 터.
강현 정도의 실력자라면 혼란을 틈 타 드뷔레와 말단 조직원들을 정리 할 수 있을 거다.
허나 강현이 그러지 말고 하시모토 와 드뷔레 모두 살려 두자고 했었 다.
'둘 다 살려 둬. 고메즈가 바보가
아니라면 하시모토가 봉인을 꾀하는 걸 알아차리겠지. 녀석의 성격이라 면 날 직접 처리하고 싶어 할 테니 어떤 형태로든 하시모토와 부딪칠 거야. 지역장끼리 붙으면 어느 쪽이 든 성친 않을 테니 우린 굿이나 보 고 떡이나 먹으면 돼.”
아직 전설급 웨이브 보석 주변에 가짜 마법진이 남아 있으니 고메즈 가 바보가 아니라면 하시모토의 임 무를 알아차릴 거다.
고메즈는 강현의 척살을 위해 웨이 브 봉인이 아닌 자신이 직접 처리하 길 원할 거고,하시모토는 장로회의 임무로 봉인을 원한다.
당연 둘 사이에 분쟁이 생길 수밖 에 없다.
그야말로 어부지리 아니겠나.
'생각대로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리 확신하며 말했으니 믿어 볼 수밖 에. 그나저나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시네. 뭔가 할 게 없으려나.’ 강현을 기다리는 동안 가만히 있기 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세이아나는 문득 그녀와 그녀의 부 하들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 했다.
하시모토의 천막은 주인 없이 텅 비어 있고 말이다.
길바닥에 떨어진 지폐를 줍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세이아나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 다.
“다들 대기하고 있어. 볼일 좀 보 고 을게.”
신랄한 투로 대기명령을 내리며 하 시모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는 세 이아나였다.
그녀는 한참 동안 천막 안에서 복 작거리더니 몇몇 물건을 들고 바깥 으로 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전리품(?)을 얻은 가운데 북쪽 언덕 너머에서 강현과 드뷔레,말단 조직원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몬스터를 정리하는데 꽤 애를 먹었 는지 대부분이 지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드뷔레는 진지에 복귀하자마자 의 아함을 드러냈다.
“음? 세이아나 지역장님,진지가 텅 빈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 었습니까?”
“봉인에 실패했어. 죄수들은 죄다 도망갔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봉인이 실패했다니요? 아니,그 전에 제가 없는 동안 봉인 의식을 진행한 겁니 까?”
“나한테 물어 봤자야. 지금 하시모 토가 죄수들 잡으러 갔으니까 따라 가서 물어보든지.”
“봉인이 실패했으니 우린 들어가서 공략을 재개하겠어.”
“기,기다려 주십시오. 아직 실패했 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다시 준비를 갖춘 뒤에 우리 한테 나오라고 전해 주든가. 너희들 기다리다가 공략 실패하면 책임질 거야?”
“그건……
“더 이상 할 말은 없는 것 같네. 자자,다들 어제 하루 푹 쉬었으니 까 곧바로 15층까지 뚫어 보자.”
세이아나는 드뷔레에게 더 이상 말 할 틈을 주지 않으며 전설급 웨이브 보석으로 향했다.
그녀를 따라 그녀의 부하들이 일렬
로 움직였다.
강현도 자연스럽게 드뷔레에게서 멀어지며 전설급 웨이브 보석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강현 일행은 약 이틀 만 에 공략을 재개하게 되었다.
웨이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이 아나가 강현을 와락 끌어당기며 어 깨동무를 했다.
“이열?, 진짜 생각한 대로 척척 잘 들어맞던걸?”
“더우니까 떨어져.”
“또 그런다. 빙백검으로 계속 냉방 하고 있는 거 알거든?”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로브를 눌 러 쓰고도 덥다는 소리를 안 하는데엔 다 이유가 있다.
빙백검에 마나를 담아 옅은 냉기를
풍기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강현의 로브 안쪽은 여름철 은행 창구마냥 시원하기 그지없었 다.
강현은 세이아나의 팔을 걷어 내며 입을 열었다.
“15층까지 빠르게 클리어 하도록 하지.”
“아참,이거 받아 둬. 예의 없는 녀석의 천막에서 발견한 거야.”
세이아나가 아공간 목걸이에서 붕 대가 칭칭 감긴 미이라의 팔 같은 물건을 꺼냈다.
예의 없는 녀석이라면 하시모토를
말하는 걸 거다.
하시모토가 죄수들을 쫓아간 사이 에 그의 천막을 뒤져서 쓸 만한 물 건을 꺼내 온 모양이다.
강현은 미이라의 팔을 받아선 감정 서를 붙여 보았다.
[제사장의 원혼이 담긴 팔]
등급 : SSS
타입 : 소모품
특성 : 과거에 기우제를 올리던 제 사장이 쓰던 의수. 효과는 두 가지 가 존재한다. 어느 쪽으로 쓰든 총 3번까지 사용 가능하다.
(남은 사용횟수 3/3)
-제사장의 원혼이 담긴 팔에 닿은
몬스터는 그 즉시 소멸한다. SSS랭 크 이하의 몬스터에게만 사용할 수 있으며 보스 몬스터에겐 사용할 수 없다. 소멸한 몬스터에게선 전리품 과 경험치를 얻을 수 없다.
-제물을 쓰는 마법진 혹은 웨이브, 던전 내에서 제물 대신 사용할 수 있다.
아무래도 죄수들이 중간에 병으로 죽거나,불의의 사고로 줄어들게 되 면 그를 대체하기 위해 가져온 듯하 다.
강현이야 라이가 있으니 제물 걱정 은 없다.
대신 몬스터를 즉시 소멸시키는 능
력 하나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듯 하다.
보스 몬스터에겐 쓰지 못한다 하더 라도 한 구간을 지키는 몬스터쯤은 손쉽게 제거할 수 있을 듯하다. 강현은 제사장의 팔을 아공간 주머 니에 넣으며 짤막하게 한 마디 던졌 다.
“잘 쓰도록 하지.”
“그럼 10층에서 보자.”
“W층에서 볼게 있나. 10층까지 같 이 올라가도 되는데 말이야.”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후후,그럼 함께 올라갈까? 가자,루나.”
이틀 내내 자고 일어난 루나가 스 스로 뺨을 토닥토닥 치며 정신을 깨웠다. 그러곤 강현과 세이아나의 사 이에 파고들며 위로 향하는 나선계 단에 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뒤따르는 부하 들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 탔다.
*
이틀 후,하시모토와 드뷔레가 말 단 조직원들을 이끌고 웨이브 진지 에 복귀했다.
그들의 몰골은 죄수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이틀간 날밤을 꼬박 새며 죄수들을 추격했건만 고작 W명밖에 잡지 못했다.
이제는 정말로 임무를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드뷔레는 하시모토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렇게 된 이상 세이아나 지역장 님과 함께 공략을 하시는 게 어떻습 니까? 공략이라도 해 두면 장로회에 서도 임무 실패의 책임을 묻진 않으 실 겁니다.”
하시모토는 피로로 인해 붉게 충혈 된 눈을 부릅뜨며 실성한 양 웃어 댔다.
“킥킥,아직이다. 아직 방법은 있 어.”
“방법이라 하심은?”
“인근 쉘터로 가서 죄수들을 끌고 오너라.”
“무,무리입니다. 이미 죄수란 죄수 는 죄다 끌어왔다는 걸 아시지 않습 니까?”
“없으면 만들면 될 것 아니더냐. 뭐든 좋다. 대충 아무 죄나 뒤집어 씌워서 120명만 끌고 와. 아! 그렇 군,죄수들을 데리고 와서 바로 봉 인 의식을 거행하는 거야. 그러면 안에 있는 세이아나 그 계집년도 함 께 봉인되겠지. 킥킥킥,좋아 좋아 아주 좋아.”
하시모토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 해 반쯤 미쳐 있었다.
장로회 회장인 아버지의 후광 덕에
스트레스와는 거리가 먼 생활만 했 던 하시모토다.
그런 마당에 허용량을 넘는 스트레 스를 받았으니 광기에 휩싸이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다.
드뷔레를 포함한 조직원들이 아무 런 말도 못하고 몸서리만 치고 있을 때.
누군가가 하시모토에게 조롱을 날 렸다.
“누군가 했더니 늙은 원숭이의 아 들이었군. 꼴 한 번 역겹구나. 짓밟 아 버리기 전에 꺼지거라.”
어느 간덩이 부은 놈이 지역장에게 무례하게 구는가!
드뷔레가 얼른 장검을 쥐며 목소리
가 날아든 곳을 확인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장본인을 확인한 순간 드뷔레는 몸이 굳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지역장 중에서 가 장 위험한 사람이었기에.
하시모토에게 비아냥거린 고메즈가 데릭로우스 위에서 오시하듯 드뷔레 를 내려다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세이아나가 이곳에 있으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