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하는 플레이어-182화 (182/381)

182화

넘어진 하시모토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세이아나를 노려보았다.

때때로 어떤 사람에겐 절대 건드려 선 안 되는 역린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하시모토는 선을 넘어 놓고 도 반성의 기미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피해자인 양 세이아나 를 매도했다.

“더러운 암캐년,이번 일은 기억해 두마. 어떻게 될지 한번 두고 보자 고.”

순간 세이아나가 얼음장처럼 시린 표정으로 스태프를 겨누었다.

스태프는 정확히 하시모토의 미간 을 겨누었다.

동시에 스태프에 마나가 맺히기 시 작했다.

당장이라도 파이어볼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

한데 불현듯 세이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히 자신이 쥐고 있던 스태프가 갑자기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은백색의 장검 한 자루였다. 강현은 이 갑작스런 상황을 한순간 에 눈치챘다.

강제무기교환.

일전에 융륭이 썼던 기술이군.

'누가 기술을 썼지?’

짧게 눈동자만 휘돌려 스태프를 찾 았다.

바로 등 뒤에 있던 드뷔레가 세이 아나의 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강제무기교환이 얼마나 뛰어난 기 술인지는 강현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피를 묻힌 무기여야 만 교환가능하다는 조건 때문에 사 용하기 까다로운 스킬이기도 하다.

언제 세이아나의 스태프에 피를 묻 힌 걸까.

분명 스킬을 이용해서 묻힌 게 틀 림 없다.

그것도 세이아나가 스태프를 뽑는 즉시 반응하는 순발력을 보였으리라.

비행 능력이 있는데다 강제무기교 환 스킬까지 있다.

돌발상황에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 고 허겁지겁 실드만 끌어올리던 하 시모토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확실히 하시모토 따위보다 이쪽이 더 성가시겠군.’

강현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드 뷔레가 천막 안의 상황을 중재했다.

“죄송합니다,세이아나 지역장님. 취한 자의 주정이라 여기시고 흘려 넘겨 주십시오. 조만간 어떤 형태로 든 벌충하겠습니다.”

“드뷔레 네 녀석,지금 그 태도는 뭐냐! 내가 잘못했다 이거냐?”

“하시모토 지역장님. 장로께선 임 무를 최우선 과제로 삼으라 하셨습 니다. 두 분께서 본격적으로 싸우시 면 진지가 남아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되면 죄수들까지 휘말릴 테지 요. 서로 곤란한 일만 벌어질 테니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싸움의 여파로 진지가 무너지면 다 시 세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제물이 휘말리면 얘기가 다 르다.

여기까지 오며 거쳐 온 지부에서 죄수란 죄수는 죄다 끌어온 마당이 다.

더 이상은 죄수를 끌어올 곳이 없 다.

굳이 끌어온다 하더라도 더 이상 카니발 대륙 북서부에선 끌어오기 힘들다.

수송에 2, 3달이 넘게 걸리는 다 른 지방에서 끌어와야 한다.

그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전설 급 웨이브가 터져 버리니 사실상 이 번에 죄수를 잃으면 봉인은 불가능 하다고 봐야 했다.

드뷔레는 분을 씹어 삼키며 거칠게 축객령을 내렸다.

“전부 나가. 쉬고 싶으니 내일까지 아무도 들이지 마라.”

세이아나도 냉정을 되찾았는지 아 까보다 열이 식어 있었다.

그 뒤 강현,세이아나,드뷔레가

천막에서 나왔다.

드뷔레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세 이아나에게 사죄의 말을 올렸다.

“죄송합니다,세이아나 지역장님. 여독이 번진 데다 술을 마셔서 실언 을 하신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 십시오.”

“녀석이 머저리라는 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야. 하지만 이번 건 도 를 넘었어. 죄송하다는 말로 그냥 넘어가 줄 수 없겠는데.”

“후에 어떻게든 벌충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지금 당장 벌충하 면 되니까.”

“네? 지금은 준비된 게 없습니다 만……

“없기는 왜 없어? 장로회에서 봉인 석을 수집하려는 이유. 그 이유를 말해.”

성질 더러운 하시모토가 뜻을 제 분노를 꺾으면서까지 임무를 우선시 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장로회에서 웨이 브 봉인석 수집에 상당한 가치를 두 고 있다는 뜻이 된다.

드뷔레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꼬리 를 흐렸다.

“기밀사항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드뷔레. 내가 지금 부탁을 하는 것처럼 보여? 상사의 잘못을 뒤집어 쓰기로 했으면 남자답게 뜻을 관철해야지. 안 그래?”

세이아나가 스태프를 어깨에 걸치 듯 비스듬히 세웠다.

언뜻 보면 별것 아닌 몸짓처럼 보 이지만 스태프의 끝이 죄수들이 갇 힌 수레로 향해 있었다.

세이아나가 봉인보다 공략을 선호 한다는 건 이미 표명한 바이다. 장로회건 뭐건 하시모토를 물 먹이 기 위해서라면 죄수들을 정리하는 것도 서슴지 않겠다는 의지가 또렷 하게 전해졌다.

그 무언의 압박이 통했는지 드뷔레 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어쩔 수 없군요. 저도 자세 히는 모릅니다만……. 아무래도 장로회 측에선 하위차원 정복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봉인석은 그 계획 중에 사용될 예정인 것 같 고요.”

“아직도 하위차원 정복에 미련을 못 버렸나 보네. 카니발 관리하기도 빠듯한데 말이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함입니다. 세 이아나 지역장님께서도 부디 협조해 주십시오.”

드뷔레의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강현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드뷔레란 놈의 편린이 엿보였다.

‘이놈도 그저 광신도에 불과했군.’ 과거 디벨롭이 가이아 대륙에서 어떤 방식으로 세력을 불려 나갔는지 기억하는가.

놈 역시 이세계인 우월주의를 이용 해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다수의 실력자들이 잘못된 신념을 지닌 채 자신만이 옳다 믿으며 제국 전복을 꾀했었다.

드뷔레 역시 마찬가지다.

우직한 성격이긴 하나 방향이 잘못 되었다.

세이아나나 강현을 배려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같은 조직원이기 때문에 보이는 모습일 뿐,같은 편이 아니 라는 게 확정되는 순간 그는 주저 없이 돌변할 것이었다.

드뷔레의 본성을 알아낸 이상 이용

할 방법은 차고 넘쳤다.

‘이런 타입일수록 단순한 작전이

잘 먹히는 법이지. 하시모토의 병력 을 줄이면서 봉인을 막는 쪽으로 작 전을 짤 수 있겠군.’

*

이후 드뷔레가 부하들을 시켜 강현 일행이 머무를 처소를 만들어 주었 다.

특히 세이아나에겐 사과의 의미를 담아 하시모토 못지않게 내부를 호 화로이 꾸며 주었다.

세이아나의 천막 안.

강현과 세이아나는 단 둘이 의자에

앉아선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땐 건 세이아나 쪽이었

다.

“어때? 괜찮은 수였지? 저쪽에서 멋대로 도발해 준 덕분에 귀한 정보 를 얻었다니까.”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 거짓 분노를 내비쳤다는 뜻인가.

간파에 의한 신호는 들려오지 않는 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다고만 했다기 에는 너무도 살벌했었다.

하시모토의 도발 때문에 실제로 화 가 났고,냉정을 되찾은 순간 분노 를 이용해 정보를 빼내는 수법을 떠 올렸을 것이다.

나이는 30대 초반이지만 관록만큼 은 백전노장급이다.

강현은 삼삼한 말로 적당히 대꾸해 주었다.

“나쁘진 않더군.”

“근데 오늘은 내가 루나를 데리고 자도 될까?”

“편한 대로 해.”

“제 구실도 못한다는 말……. 신경 쓰이지 않아?”

강현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굳이 불필요한 간섭으로 일을 만드 는 성격이 아니었다.

세간에선 그를 두고 오지랖이라 한 다지.

하지만 세이아나가 털어놓고 싶어

하는 눈치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정도는 해 줄 의향이 있다.

강현은 세이아나의 가슴 부근을 보 며 말했다.

“오늘은 꺼내도 좋아.”

세이아나는 강현의 눈길을 알아채 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슴을?”

“아공간 목걸이를 말한 거야. 술 있잖아.”

드뷔레가 두고 간 술이 있지만 저 쪽에서 준비한 건 입에 대고 싶지 않다.

세이아나가 카니발 차이나타운에서

죽엽청주를 사서 아공간 목걸이에 넣어 둔 걸 알기에 한 말이었다. 세이아나가 피식 웃으면서 죽엽청 주 한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넌 눈치도 빠르고 다 좋은데 너무 무뚝뚝하단 말이지. 뭐,그런 점이 매력이라 할 수 있지만.”

강현은 술을 살짝 부어 잔에 밑잔 을 깔았다. 그러곤 술을 털어 내 먼 지를 씻어 낸 후 재차 잔을 채웠다. 안주로는 강현이 사 두었던 고기맛 푸드스톤을 펼쳤다.

뭔가 털어 내고 싶어 하던 것치곤 세이아나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한 잔,두 잔,세 잔..

조용히 술병 안의 수위만 낮아지며

시간이 흘러갔다.

강현이 한 일이라곤 조금의 재촉도 없이 그저 같이 있어 주는 것뿐이었 다.

이윽고 술 한 병이 거의 밑바닥에 이르렸을 무렵에야 세이아나가 입을 열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자는 반 쪽짜리 여자인 걸까?”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몰라 고 민한 끝에 내놓은 말이었다.

심지어 질문의 형식을 취하며 빙 돌려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당찬 성격의 그녀라도 이성 에게 있어 최악의 인상을 남길지도 모르는 말을 선뜻 꺼내긴 힘들었나보다.

강현은 빈 술잔을 가볍게 내려놓았 다.

어설픈 위로보단 얘기를 들어 주고 인기척을 내 주는 것이 낫다.

세이아나는 술병을 들었다. 그러곤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모두 술잔 에 털어 부으며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 옛날에 신화급 웨이브를 공략하다가 풀 수 없는 저 주에 걸렸거든. 지금도 내 몸 속에 는 독을 품은 피가 흐르고 있어.”

게드팅스에서 처리한 뉴튼도 치료 할 수 없는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 다.

그와 같은 부류의 공격을 당한 듯

하다.

세이아나가 말하길 자신은 몸에 항시 독이 흐르는 저주에 걸렸다고 한다.

독 면역 스킬로 계속되는 중독을 막긴 했지만 그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세이아나는 술잔에 비친 자신을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우수에 젖어 있었 다.

“그래서 더더욱 루나를 내 아이처 럼 여기는 걸지도 몰라. 훗,웃기는 얘기지. 만들 땐 도구로서 만들어 놓고 상황이 바뀌니까 이제 와서 부 모 노릇을 하려 들다니.”

“벌써 마지막 잔이네. 한 병 더 꺼 낼까?”

강현은 세이아나의 잔에 채워진 마 지막 술을 대신 비워 주며 일어났 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조금 모자란 감이 있지 않아?”

“다음을 위해서 남겨 둬.”

후에 또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질 때가 오면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언제든 부담 없이 얘기를 들어 주 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 음이 편해지니까.

덕분에 세이아나는 애수를 털어 내

며 기운을 차렸다.

천막에서 나가기 직전,강현이 걸 음을 멈추며 한마디를 남겼다.

“아무리 그래도 과자의 집은 만들 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현은 천막에 서 나갔다.

그가 자리를 뜨고 천막 안에는 세 이아나 혼자만이 남게 되었다.

홀로 남은 세이아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과자의 집? 무슨 소리지?”

?

천막에서 나온 강현은 맵시 나는

슬랜더 타입의 흑인 여성과 마주쳤 다.

세이아나의 부하 중 한 명인 엘리 스였다.

엘리스는 펄럭이는 천막 입구를 기 웃거리다가 강현을 발견하고 말을 꺼냈다.

“세이아나 지역장님 주무셔요?”

“취했으니까 자게 놔둬.”

“으음,보고할 게 있는데 내일 해 야 되려나.”

“뭔데?”

“웨이브 봉인 절차를 알아냈어요. 웨이브 보석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에 각각 원형 마법진을 그려서 밑그림을 따라 미스릴 조각을 박아둔다고 해요.”

“제물을 바치는 방식은?”

“원형 마법진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마법진을 발동하면 제물이 사라진다 고 하네요. 바쳐진 제물이 200명이 되면 웨이브가 봉인되는 방식이고 요. 하시모토가 이틀 안에 완성하라 고 엄명을 내렸다고 하니 이틀 안에 봉인을 막을 작전을 짜야겠죠.”

이틀이라……. 그 정도면 봉인을 막을 작전을 펼치기엔 충분하다. 권위에 절어 있어 현장검토 따윈 하지도 않을 듯한 성격의 하시모토. 상관의 명령이라면 불복종이란 절 대 없을 성격의 드뷔레.

그리고 먼 길을 달려오느라 지쳐서

죄수 관리에 소홀해진 조직원들. 갖가지 요소들이 조합되면서 한 가 지 작전이 떠올랐다.

강현은 상념에서 벗어나며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엘리스,죄수들에게 음식과 약을 챙겨 주도록 해. 다른 조직원들에게 는 들키지 않도록 전해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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