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화
또 다른 지역장이 도착했다고 한 다.
아직 던전의 길 4층이 공략 중이 니,나간다 하더라도 바로 5층으로 갈 순 없을 거다.
고로 필연적으로 하피냐란 자와 마 주치게 된다.
강현이 굳이 빙백검을 뽑지 않는다 면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정체를 들키기 전에 먼 저 기습공격을 날리느냐,정체를 감 추면서 최대한 추이를 살펴보다가 싸우느냐의 차이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지역장과 바로 싸
우는 건 손해밖에 없다.
어찌어찌 기습이 잘 먹혀들어서 하 피냐를 쳐 낸다고 치자.
웨이브 안에서 지부장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과 대놓고 죽이는 것엔 큰 차이가 있다.
대놓고 죽인다면 이곳 전설급 웨이 브에 모인 모든 조직원이 강현의 존 재를 알아차릴 거고,뒤이어 도착할 다른 지역장도 공략은 뒷전으로 두 고 강현부터 쫓을 게 분명하다. 어차피 비밀방을 찾을 때까지는 계 속 웨이브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최대한 웨이브의 특성을 이용하며 지역장을 제거하는 게 낫다.
그리하면 공략 중에 죽은 걸로 위 장할 수 있으니까.
‘공략 중에 규칙을 이용해서 제거 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겠지. 게다가 조만간 고메즈가 을 테고.’
커뮤니티 내의 골칫덩이가 된 고메 즈를 이용하기로 한 이상 벌써부터 고군분투할 이유가 없다.
강현은 두 수,세 수 앞을 내다보 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루나와 함께 SSS랭크 웨이브에서 나오자 3층과 이어지는 계단 쪽에서 몇몇 사람들이 올라왔다.
10명쯤 되는 인원이었는데 그중 9 명은 디스트로이 제복을 입고 있었 다.
나머지 한 명은 다른 이들과 다른 특이한 복장이었다.
빛바랜 회색빛 양복 정장,자주색 넥타이,베이지색 프렌치 코트. 그리고 갈색 머리칼의 댄디한 중년 백인 사내였다.
아무리 봐도 공략에 어울리는 차림 은 아니었다.
중년 사내는 검지로 중절모 챙을 살짝 올리며 강현을 보았다.
“세이아나의 디스트로이로군.”
아직 강현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 건만 시작부터 정체를 가늠하는 말 을 꺼내고 있었다.
허나 마냥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 다.
세이아나가 먼저 들어왔다는 보고 를 들었고,강현이 걸친 디스트로이 제복으로서 손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강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 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놀랄 것 없네. 세이아나가 먼저 도착했다는 건 아래에서 이미 들었 으니까. 그렇다면 먼저 도착해 있는 디스트로이는 세이아나의 디스트로 이란 소리지.”
중년 사내는 자신의 추리를 자랑스 럽게 늘어놓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할 수 있 는 추리를 말이다.
'자신이 똑똑한 부류라고 착각하는 타입인가 보군.’
더불어 세이아나를 부를 때 지역장 님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로 보아 이 중년 사내가 하피냐 인 듯했다.
하피냐는 사라지고 있는 SSS랭크 웨이브 보석을 보며 말했다.
“지금 막 공략을 마치고 나온 거였 나. 생존자는 너희들뿐이고?”
“네.”
“SSS랭크라면 죄수들을 데리고 들 어갔을 텐데,그런데도 사망자가 발 생했다라……. 수상한 냄새가 풍기 는군. 보통은 죄수만 죽고 조직원들 은 살아남는 편인데 말이지. 마치 공략 중에 서로 죽이기라도 한 것처 럼 보이는군.”
하피냐의 눈썹이 안쪽으로 휘었다.
의심 가득한 눈빛이 강현과 루나를 훑고 지나갔다.
나름 머리 좀 굴릴 줄 아는 놈인 건가.
만약 내 정체를 의심하는 거라면 미리 짜 두었던 계획이 통째로 꼬이 게 된다.
꼬였다고 이제 와서 물러날 순 없 다.
기습적으로 선제공격을 해서 기선 을 제압하는 게 나으리라.
강현의 손이 조심스럽게 빙백검 손 잡이로 향했다.
그러나 강현이 빙백검을 뽑는 일은 없었다.
하피냐의 입에서 아주 생둥맞은 추 리가 튀어나왔다.
“보구 배분 문제로 서로 싸웠나 보 군. 어디 한번 대답해 보게. 내 말 대로 보구 때문에 서로 싸운 건가?”
추측을 하기는 했는데 1차원적인 생각에 그쳤다.
역시나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추측 에 불과했다.
철썩같이 세이아나의 디스트로이라 고 믿고 있는 듯하다.
정체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 강현은 빙백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러곤 하피냐의 얄팍한 추측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말씀대로입니다.”
“하하하,너희들이 하는 짓이야 뻔 하지.”
하피냐가 우쭐거리며 웃어젖히자 그의 부하인 디스트로이들이 아부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지역장님이십니다. 도착하자 마자 바로 상황을 파악하다니 대단 하십니다.”
“내가 늘 말하지 않느냐. 조그마한 단서에서 해답을 끌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하긴 평범한 사람들에게 천 재의 방식을 알려 줘 봤자 알아듣기 힘들 테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공략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도 어디까지나 지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연출에 불과했다.
하피냐를 보고 있자니 원래 세계의 어떤 부류가 생각난다.
어릴 적부터 영재 취급을 받다가 성인이 된 이후에 아무런 성과를 못 낸 자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성격이 다.
‘영재라고 불렸으면서 그것밖에 못 해?’
‘와? ,명문대 엘리트면서 이런 것 도 못하네. 생각했던 것보다 별거 아니 구만.’
영재도 성인이 되면 범재라 하지 않던가.
잘난 사람을 깎아내리기 바쁜 사회 풍조 속에서 한때 영재라 불렸던 자 들이 열등감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자신이 천재인 줄 알았다가 세상의 벽에 부딪쳐서 좌절하는 자들은 크 게 두 가지 패턴을 보인다.
하나는 논문 표절,사기 증명 등으 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 의 이미지를 지켜 내거나,그럴듯한 말로 주변 사람들을 낮춰서 자신의 천재성을 자꾸 강조하거나.
하피냐는 후자 쪽이었다.
웨이브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도 언 제나 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서 나온 복장인 듯하다.
'대학시절에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사람을 몇 명이나 봐 왔었지.’
하피냐는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을 리며 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놓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요?”
“웨이브 내에서 얻은 보구 말일세. 자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하면 순순하게 구는 것이 좋지 않겠나?”
즉 입막음용 비용을 내라는 것이었 다.
강현은 태연하게 서 있는 반면 옆 에 있던 루나가 긴장하며 마나를 끌 어올렸다.
‘오빠 성격에 순순히 넘겨줄 리 없 어. 당연히 싸울 테니까 내가 확실하게 엄호해 줘야 해.’
강현이 누구인가.
기싸움에서 밀리는 걸 끔찍하게 싫 어하는 남자다.
하물며 한번 손에 넣은 물건을 순 순히 넘겨줄 리 만무하다.
필시 검을 뽑아 전투에 돌입할 터.
그래서 언제든지 스킬을 쓸 수 있 도록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루나의 예상과 180도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갑자기 강현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여신의 공작털과 소를 지키는 자의 눈을 꺼내어 넘기는 게 아닌가.
하피냐는 우월감에 찌든 표정으로 보구 두 개를 낚아챘다.
“계산이 빠른 친구로군. 자네 같은 타입이 사회생활 잘하는 타입이지. 안 그런가?”
강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 다.
오로지 루나만이 강현의 눈치를 살 피며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필요 없는 보구에 집착하느라 괜한 싸움을 하는 것이 싫은 것인지,아 니면 달리 꾀하는 바가 있어서 보구 를 넘긴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막상 보구를 건네받은 하피냐는 감 정서를 붙여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 다.
“뭐야. SS급치고는 쓰레기군. 너희
들이나 가지거라.”
마치 쓰레기 버리듯 제 부하들에게 던지는 하피냐였다.
루나로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뺏어 가 놓고 필요 없으니까 바로 버리다니.
그것도 빼앗긴 장본인 눈앞에서.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 지!
그때 강현이 루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늘진 로브 아래로 평소와 다름없 이 무뚝뚝한 강현의 얼굴이 비쳤다.
‘가만히 놔둬.’
루나는 어깨에 힘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강현이 당하고 가만히 있던 적이 있던가.
당한 게 있다면 몇 배로 되돌려주 는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넘긴 게 아니라 무 언가 뜻이 있어 넘긴 걸 거다.
하피냐가 몇 배로 더 되돌려받을 걸 생각하니 되려 동정이 갔다.
卞》필 시비를 걸어도 오빠한테 걸 었담. 저 아저씨 곱게 죽진 못하겠 네.’
각자의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4 층 12시 방향에 있던 문이 열렸다.
던전의 길 쪽에서도 4층 공략을 마쳤다는 걸 의미했다.
하피냐는 자신이 4층까지 전부 공
략한 것마냥 당당하게 5층으로 향했 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세이아나는 항상 던전 공략이 늦군. 쯧쯧,그만 한 화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쓸 줄을 모르는구만.”
하피냐와 그의 디스트로이들이 먼 저 5층에 오르고,뒤이어 강현과 루 나가 따라 올라갔다.
5층은 휴식공간인지라 던전도,소 형 웨이브 보석도 없었다.
대신 녹음 짙은 숲과 시원한 냇가 가 있어서 어느 곳이든 캠프를 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강현과 하피냐 일행은 5층 3시 방 향에 있는 문을 통해 을라왔고,맞은편에 있는 9시 방향 문에서 세이 아나 일행이 올라왔다.
두 무리는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멈춰 섰다.
하피냐는 뒷짐을 지며 능글맞은 투 로 인사를 건넸다.
“이거 오랜만이구만,세이아나. 자 네는 참 늙지도 않는군. 업무는 제 쳐 두고 치장에만 신경 썼나 보지?”
“어머,하피냐 지역장의 애인들보 단 덜 신경 쓰는 걸요? 그 호박들 에게 수천만 CP를 퍼부으신다 들었 어요. 참 아량도 넓으셔라.”
“말솜씨가 원시인 수준인 건 여전 하군.”
“학력 사칭이나 하시던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죽고 싶나? 내가 그 얘기는 꺼내 지 말라고 했을 텐데?”
“먼저 시작한 건 그쪽이라는 걸 아 셔야죠.”
세이아나와 하피냐 사이에서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지역장끼리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 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피냐의 신경을 건드리던 세이아 나가 문득 강현을 힐끗 보았다. 그녀가 눈짓으로 숲 안쪽을 가리켰 다.
강현은 숲 안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았다.
숲을 이루고 있는 아름드리 거목들
사이로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었다. 허수아비 아래에는 좌판이 깔려 있 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5층마다 휴식공간과 좌판이 마련 되어 있다 했었지. 확인할 수 있게 시간을 끌어 주겠다 이거군.’
하피냐는 세이아나와 신경전을 벌 이고 있고,하피냐의 디스트로이들 은 신경전에 정신이 팔려 주의가 산 만해져 있었다.
하피냐보다 먼저 좌판을 확인하려 면 지금이 기회다.
‘빨리 가는 게 좋겠어. 시간을 끌 어 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강현은 조용히 디스트로이들에게서 멀어지며 숲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 사이로 들어가자 허수아비와 좌판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허수아비로 말할 것 같으면 나무를 동그랗게 깎아서 만든 머리에 밀짚 모자를 씌워 놨고,팔에는 거적때기 를 덮어놓은 게 전부였다.
조잡하게 만들어진 허수아비 아래 로는 나무 좌판이 깔려 있었다. 특이한 건 좌판 위에 그 어떤 물 건도 없다는 점이었다.
물건 대신 있는 거라곤 메뉴판과 몇 줄의 문구뿐이었다.
[커즌즈의 탑 5층 좌판]
-탑 포인트 측정기(수량 무제한) :
0 CP
-기력 포션(수량 무제한) : 2만
CP
-해독 포션(수량 무제한) : 3만
CP
-소켓 생성기(1)(수량 30개) : 60 만 CP
-S급 보구 변환서(수량 10개) :
150만 CP
-SS급 보구 변환서(수량 3개) :
700만 CP
-개인 마켓 스텟 포인트 5퍼센트 할인권(수량 1개) : 1, 000만 CP -비밀방 열쇠 조각(수량 1개) : 0 CP (메뉴판 중 구입할 물건의 이름에 검지를 대고 허수아비의 얼굴에 CP 교환기를 대어 CP를 지불하시면 물 건이 나옵니다. 실수로 CP를 잘못 지불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매진된 물건은 메뉴판에서 이름이 사라지니 그 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