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고메즈의 짜증이 극에 치달았다.
아직 본부에서 새로운 차원관리자 선정을 하지 못한 나머지 계속 경비 원만 세워 뒀었다.
경비원이라곤 해도 마나 마스터급 으로 3명이나 배치했다.
하위차원에서 어지간히 작정하고 뚫지 않는 이상 거의 뚫릴 일이 없 는 전력이다.
거기에 차원의 경계는 환각 보구를 이용해 철저히 감춰 뒀지 않은가.
고메즈는 손에 힘을 주어 쥐고 있 던 호두를 바스라트렸다.
와드득!
“배치한 경비원들은 뭘 하고 있던 게냐?”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아마 전멸당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있는 병력으로라도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
“새,생각보다 그년의 성질이 드세 서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지역장님 께서 직접 나서 주셔야……. 크옥!”
쾅!
고메즈가 일어나면서 디스트로이를 우악스럽게 밀쳤다.
디스트로이는 내동댕이쳐져선 꼴사 납게 바닥을 굴렀다.
고메즈는 신경조차 쓰지 않으며 바 깔으로 나갔다.
넘어진 디스트로이에게 최진철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고메즈 지역장께서 성격이 사납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 었지만 생각보다 맞춰 주기 힘들군 요.”
“이해합니다. 그래도 커뮤니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이니 힘내 야죠. 앞으로 보고는 제가 하겠습니 다. 성가신 일은 한 명이 도맡는 게 나을 테니까요.”
“아뇨,그럴 수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부담스러워 마십시오.”
최진철은 정신적으로 디스트로이를
보듬어 주며 바깥으로 나갔다. 모두가 신입밖에 없는 고메즈의 디 스트로이 부대에서 최진철은 차츰차 츰 자리를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
고메즈는 지부 내의 디스트로이를 이끌고 차원의 경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반나절을 꼬박 달려서 해당 지점에 도착하자,죽어 있는 커뮤니티 조직 원들이 보였다.
개중 몇몇은 이번에 새로 뽑은 디 스트로이였다.
기껏 인원을 보충해 놨더니 며칠
되지도 않아서 또 인원이 줄었다. 속이 뒤집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 었다.
고메즈는 띄엄띄엄 서서 얼 타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성질을 부렸다.
“적은 어디 두고 너희들만 서 있느 냐! 놓쳤다는 말을 지껄였다간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다!”
“고,고메즈 지역장님! 아직 교전 중입니다! 그년이 워낙 신출귀몰해 서 찾기가 힘듭니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느냐!”
고메즈가 조직원들을 닦달하는 사 이,최진철은 죽은 조직원의 시체를 살폈다.
죽은 자의 대부분이 화살에 몸이
꿰뚫려 있었다.
개중 몇몇은 산성액이라도 뒤집어 쓴 듯한 몰골이었다.
가이아 대륙의 궁수 중에 산성 화 살을 쓰며,단신으로 차원의 경계를 넘어올 동기를 가진 여자.
짚이는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에게 여자가 한 명 있다고 했 었지. 적어도 현이와 연락하고 온 건 아닌 것 같군. 녀석이라면 좀 더 고차원적인 작전으로 그녀를 불러들 였을 테니까. 현이 한 명만 바라보 고 강행돌파를 해 온 건가. 대단한 집념이군.’
최진철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고메즈는 다른 관점에서 전투 흔적을 살폈다.
꽤나 거친 전투가 벌어진 것치곤 깨끗한 지대가 몇 군데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깨끗하다기보단 전투에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흙이 가지런하다고나 할까.
고메즈는 의심 가는 지대를 발로 훑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유리판 이라도 있는 양 발끝에 무언가가 걸 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메즈의 미간에 주름 한 줄이 늘 었다.
“쳇,허접하기 짝이 없는 수를 쓰 고 있군.”
고메즈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서 모닝스타 한 자루를 꺼냈다.
모닝스타에 그랜드 오러를 부여하 자 돌기 달린 철구에 누런빛이 깃들 었다.
얼마나 마나를 많이 때려 넣었는지 심지가 되는 철구보다 그랜드 오러 의 크기가 몇 배는 더 컸다.
고메즈는 바닥을 향해 힘껏 모닝스 타를 내리쳤다.
쿠응!
거석이라도 추락한 양 바닥이 움푹 파이면서 강렬한 충격음이 울려 퍼 졌다.
충격은 곧 흙먼지를 동반했다.
홁먼지는 뭉게구름마냥 넓게 피어 올랐고,충격의 진원지 근처에 있던 자들은 새하얗게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홁먼지가 가라앉자 의외의 광경이 보였다.
전장 곳곳에 네모난 유리판이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원래는 투명해서 안 보이던 유리판 이 흙먼지를 뒤집어씀으로서 윤곽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가장 높이 떠 있는 유리판은 지상 에서 10미터쯤 되는 높이에 있었다. 고메즈는 10미터 높이에 떠 있는 유리판을 보며 하찮다는 듯 눈을 가 늘게 떴다.
“별것도 아닌 것이 시간낭비하게 만드는군.”
유리판 위엔 먼지를 뒤집어쓴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다.
스킬로 유리판을 만들어 그를 발판 삼아 포인트를 옮기며 저격을 했던 것이다.
고메즈는 10미터 허공에 위치한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단지 그것뿐이었건만 여자의 움직 임이 멎었다.
더불어 고메즈가 새로이 창 한 자 루를 꺼내어 소멸 부여 스킬을 가미 했다.
여자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그 여부는 아무래도 좋다는 양 바로 죽일 심산이었다.
지금의 고메즈의 목적은 최강현을 죽이러 가는 일 이외에는 없었다.
소멸 부여가 된 창이 여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허나 창이 여자에게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갑자기 소환석 하나가 중간에 끼어 들더니 방패 모양의 몬스터가 소환 되어 대신 창에 적중했기 때문이다. 파사사삭!
고메즈가 다른 물체를 공격하자 여 자를 속박하고 있던 능력이 풀렸다. 여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주 하려 했다.
그때 최진철이 여자를 불렀다.
“김혜림! 나다,최진철! 괜히 오해 불거지게 하지 말고 내려와! 지역장 님깬 내가 설명드리마!”
고메즈는 소환석을 던진 게 최진철 임을 알곤 이 갈린 목소리로 노기를 표출했다.
“최진철,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라. 납득할 만한 설명이 아니라면 가만 두지 않겠다.”
“죄송합니다,지역장님. 디스트로이 숫자가 부족하다고 하셔서 하위차원 에 있던 지인을 호출했습니다. 아무 래도 경비원들과 오해가 빚어져서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그걸 지금 설명이라고 하느냐? 저 년 한 명에게 당한 병력이 몇인데!”
“오합지졸을 모아 봤자 거치적거릴 뿐입니다. 이번 일로 저 아이의 능 력은 증명된 셈이니 따로 실력 검증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겠지 요.”
최진철의 말마따나 머릿수보다 중 요한 건 병력의 질이다.
경비원으로 세워 둔 디스트로이들 을 처리하고 들어왔으니 최소한 디 스트로이 중에서는 상급에 속하는 인재라 볼 수 있다.
최진철의 말을 듣고 나니 고메즈는 죽은 놈이 쓸모없는 자였을 뿐이라 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설득에 성공한 최진철은 여전히 경 계태세를 풀지 않고 있는 김혜림에 게 재차 고함을 질렀다.
“이제 괜찮으니까 내려와! 지역장
님께 인사를 드려!”
최진철과 김혜림이 눈을 마주쳤다. 그녀 역시 방금 흙먼지를 일으킨 일격으로 고메즈의 실력을 알았을 터.
게다가 처음에 김혜림의 움직임을 속박한 기술 또한 걸림돌로 남아 있 다.
단지 손을 뻗기만 했는데도 김혜림 의 움직임이 봉쇄당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공격을 피 했을 거다.
뭐로 보나 지금은 최진철과 말을 맞추는 게 나았다.
김혜림은 유리판에서 내려와서 고 메즈와 최진철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다만 인사를 올리는 대신 기세등등 한 태도를 취했다.
“다짜고짜 공격해 오는 작자들에게 갖출 예의 따윈 없어.”
“최진철,이년이 지금 뭐라고 지껄 인 것이냐?”
“죄송합니다. 카니발에 대해서 아 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터라 모르는 게 많습니다. 오늘 내로 설명을 해 둘 터이니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고메즈는 김혜림을 위아래로 훑었 다.
앙칼진 표정과 언제든 단검을 뽑을 수 있는 공격적인 자세.
아무리 카니발의 섭리를 모른다 하
더라도 대담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 다.
우물쭈물거리며 답답하게 눈치만 보는 무능력한 것들보단 훨씬 낫다.
최근 따라 눈치만 보고 제대로 일 도 못하는 놈들밖에 없었지.
그런 면에서 최진철과 김혜림의 태 도는 매우 홍미로웠다.
고메즈는 먼지 붙은 로브를 펄럭이 며 등을 돌렸다.
“오늘 내로 교육을 마쳐 놔라. 그 리고 앞서 말한 토벌대 소집도 끝내 놓도록.”
“네,내일 새벽에는 최강현을 추격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 놓겠습니 다.”
일부러 최강현의 이름을 언급하는 최진철이었다.
김혜림에게 어렴풋하게나마 현재 상황을 암시해 주기 위해서 말이다.
최진철은 김혜림의 얼어붙을 듯 차 가운 시선을 느꼈다.
한때 강현과 척을 진 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진철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김혜림의 귀에 속 삭였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지. 최강 현에 대해서 말이야.”
*
지부 내의 디스트로이 숙소 안.
김혜림은 간략하게나마 최진철에게 서 카니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카니발이 어떤 곳인지,커뮤니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최강현과 커뮤 니티가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김혜림의 앙칼 진 눈매는 풀리지 않았다.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후.
최진철은 김혜림의 집념에 감탄하 듯 말을 꺼냈다.
“차원관리자가 없다곤 해도 경계의 틈을 발견하긴 쉼지 않을 텐데 용케 도 찾아왔군.”
여기까지 오는 길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크레인 공국에서 강현의 흔적을 뒤 쫓던 중에 나탈리아에게까지 다다랐 고,데이낙스 남작을 통해 베니스 백작가에 불만이 있는 자들을 끌어 모아 큰 소동을 벌인 끝에 나탈리아 를 궁지에 몰아넣어 강현이 어디로 갔는지 토해 내게 했다.
결국 강현이 어느 협곡 안쪽에 있 는 것까지 알아냈고,몇날며칠을 탐 색할 끝에 경계의 틈까지 도달한 것 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최진철이 사정을 구 구절절 늘어놓을 사이는 아니다. 김혜림은 최진철의 감탄을 가볍게 무시하며 본론으로 넘어가고자 했 다.
“날 끌어들인 이유를 설명해.”
“눈빛 한번 무시무시하군. 눈빛만 으로도 베이겠어.”
“입은 헛소리를 지껄이기 위해서 달려 있는 게 아니지. 뭣하면 당장 이라도 꿰뚫어 주겠어.”
“내가 알기론 녀석은 좀 더 활기찬 여자가 취향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김혜림이 벌떡 일어나며 아공간 반 지에서 매끄럽게 활을 꺼내 들었다. 활시위에 대지의 화살이 소환되고 화살촉 머리가 최진철을 겨누었다.
“배신자 주제에 함부로 그이랑 친 한 척하지 마.”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나는 녀
석에게 아무런 악감정도 없어서 나 도 모르게 평범히 대하고 말거든.”
“내 귀에는 쏴 달라는 소리로 들리 는데 말이야.”
“넌 쏘지 못해.”
“과연 그럴까?”
“날 쏘기에는 넌 너무 최강현을 사 랑하지. 날 이용하지 않으면 최강현 을 쫓을 수 없어. 그러니 쏠 수 있 을 리 없지.”
홧김에 최진철을 쏜다고 해서 나아 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얻는 거라곤 커뮤니티의 블랙리스 트에 오르는 게 전부였다.
이제 막 카니발에 들어선 그녀가 고메즈의 지부 안에서 그의 추격을 뿌리치며 최강현까지 찾는 건 상당 한 무리수를 감수해야 했다.
차라리 고메즈의 디스트로이에 포 함되어 최강현에게 닿을 때까지 숨 죽이고 있는 게 낫다.
하지만 김혜림에겐 이득이 된다 하 더라도 최진철의 꿍꿍이를 모르는 이상 도움을 받아도 꺼림직할 뿐이 었다.
최진철은 손을 뻗어 김혜림의 활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네 존재를 보자마자 좋은 작전이 떠오르더군. 만약 성공하면 난 바로 지부장으로 승격하고,넌 바로 최강 현과 재회할 수 있겠지.”
“제안을 할 때는 상대를 납득시킬
만한 근거를 동반해야 하지 않겠 어?”
“물론 그래야지. 일단 작전의 첫 단계로……
최진철이 조곤조곤 자신이 떠올린 작전을 을었다.
작전을 듣는 내내 김혜림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작전 설명이 끝난 후,김혜림은 입 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을 꺼냈다.
“과연 배신의 아이콘다워. 너 같은 놈들에게 딱 어울리는 작전이야.”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그래서 대 답은?”
김혜림은 활을 아공간 반지에 도로 넣으며 겉모양뿐인 미소를 지었다.
“임시지만 서로 잘 이용해 보자 고.”
*
강현 일행은 한 달간의 이동 끝에 불칸에 다다랐다.
불칸 지방에 들어선 강현은 지평선 너머에 솟아나 있는 거대한 물체를 볼 수 있었다.
웨이브 보석,그것도 흰색 웨이브 보석이었다.
강현은 태산만 한 크기의 웨이브 보석을 지그시 바라보며 중얼거렸 다.
“저게 전설급 웨이브 보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