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황제가…… 죽어?”
“내가 죽기 전에 죽었으니 꽤 시간 이 흘렀겠군. 예전에 한번 마나폭주 를 겪어서 심장이 안 좋았었는데 결 국 임종을 맞이하고 말았지.”
그럴 리가 없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버젓이 슈타인 백작가 사건을 두고 국정회의에 참 가했었지 않은가.
게다가 메이아 황녀 유배를 결정한 것도 황제다.
황제의 궁에는 여전히 황제가 머무 르고 있다.
허나 현자의 말 속에 노이즈는 포
함되어 있지 않았다.
모든 게 사실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황제 노릇을 하고 있는 자는 누구지?”
“뭐 황제가 무언가 뜻이 있어서 대 역을 맡긴 거겠지. 솔직히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능력은 탁월 했다네. 특히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 하나는 타고났었지. 허허,천재 박명이라 했으니 하늘에서 인재가 필요해서 데려간 걸지도 모르겠어.”
말투는 익살스러워도 눈빛에는 애 잔함이 담겼다.
눈빛만 봐도 현자와 황제가 돈독한 사이였다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히 황제였기에 따른 것이 아니
었다.
그에게 있어 황제가 너무나도 특별 했고 인간적으로 존경할 만한 존재 였기에 지을 수 있는 눈빛이었다. 어찌 보면 형태만 다를 뿐 임모벨 백작과 비슷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 다.
그 역시 말로는 황제가 싫다 싫다 해도 말투에선 존경심이 묻어 나왔 으니까.
현자는 감상에서 벗어나며 강현에 게 질문을 던졌다.
“얼추 상황을 이해한 것 같으니 역 으로 묻겠네. 모든 걸 안 지금은 어 떻게 할 건가?”
현자로선 강현에게 행동을 강요할
권한이 없었다.
앞으로의 모든 일은 강현 스스로가 판단하고 나아가야 한다.
강현이 더 이상 위로 향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살겠다고 하 면 그러려니 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 다.
강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 답을 꺼냈다.
“우문이로군. 여기까지 와서 물러 날 것처럼 보이나?”
초상화 속 현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실언을 인정했다.
“자네 말대로 우문 그 자체였군. 여기서 포기할 사람이라면 히든 시 스템의 시험을 통과할 수도 없었겠지.”
“초기화를 위한 사육장 안에서 살 생각은 없어.”
“창조급 웨이브를 공략하게나. 자 네가 공략한다면 절망한 자로 선정 되더라도 괜찮겠지.”
강현은 슬며시 입꼬리를 씨익 올렸 다.
“그걸론 부족해. 이 망할 시스템을 부숴야 수지가 맞지 않겠어?”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가면에 약간 의 균열이 생겼다.
균열 사이로 자신감과 의욕이 뚝뚝 묻어났다.
현자는 강현과 앨버런이 오버랩되 는 걸 느끼며 저 역시 피식 웃었다.
“뭐야 얼음물 뚝뚝 떨어지는 얼굴 을 하고선 속은 열탕이구먼. 자네가 위로 올라갈 생각이라면 좋은 걸 가 르쳐 주지. 히든 시스템의 프레임은 내가 만들었지만 히든 시스템의 옵 션을 만든 건 세이아나라는 아이일 세.”
“세이아나라면 개방의 서와 업적의 서를 줬던 그 여신상?”
“아,그건 내가 그녀를 본떠서 만 든 안내역일세. 어디 보자,당시에 그녀의 나이가 10대였으니 특별히 누군가에게 당하지 않았다면 아직 살아 있을 걸세. 그녀를 찾아가게 나.”
“그녀를 찾아가면 뭐라도 있나?”
“지금 각성의 서는 3차 각성까지 가능하겠지?”
“맞아.”
“내가 죽기 전에 그녀에게 부탁해 뒀었네. 각성의 서의 등급을 올릴 수 있는 스킬북을 만들어 두라고 했 었지. 아마 그녀가 계속 연구를 해 왔다면 3차 각성 이상으로 올라갈 방법을 만들어 줬을 걸세.”
각성의 서를 비롯한 히든 시스템의 스킬북은 전부 최초의 이세계인들이 신화급 웨이브에 들어가서 얻은 ‘스 킬북 용지’란 보구로 만들었다고 한 다.
마음대로 스킬을 만들 수 있지만 사기적인 능력을 적을수록 그에 걸맞은 조건이 붙는 보구였다.
처음부터 사기적인 능력을 적으면 아예 스킬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조건이 붙기 때문에,대부 분의 히든 스킬을 성장형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성장형으로 만들면 그나마 조건이 덜 까다로워진다는 게 이유였다.
용지 중 대부분은 현자가 살아 있 을 무렵 히든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 전부 썼고,죽기 전에 마지막 한 장 을 세이아나에게 넘겼다.
그녀가 현자의 부탁을 들어줬을지, 아니면 변절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썼을지는 모른다.
어쨌든 그녀를 찾아가면 모든 게
명확해질 것이다.
현자는 떠나기 앞서 강현에게 섬에 서 나갈 방법을 알려 주었다.
“2층에 보구를 조금 남겨 놨으니 떠나기 전에 챙겨 가게나.”
“나가는 길도 알려 줬으면 해. 해 저동굴은 이미 무너졌거든.”
“수수께끼 못 맞췄나? 그 정도면 가이아 대륙 출신은 얼추 맞을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가이아 대륙 출신이기 전에 이세 계인이니까.”
“그것도 그렇군. 북쪽 해안가에 배 가 한 척 있으니 그걸 타고 가게 나.”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어?”
“말해 보게나.”
“신화급 웨이브에 들어갔을 정도라 면 당신들도 꽤 강했을 텐데 왜 창 조급까지 도전하지 않았지? 그쪽이 히든 시스템을 이용했다면 도전해 볼만 했을 것 같은데.”
곁들이 질문처럼 던졌다만 의외로 현자가 대답치 못했다.
사정이 있는 건지 한참 동안 침묵 이 이어졌다.
현자는 고개를 저으며 기나긴 침묵 을 쨌다.
“나를 비롯한 내 동료들은 전부 한 번씩 세상을 등진 자들이었다네. 그 중에서도 나는 특히나 더 구제불능 이었지. 자신이 집도한 수술로 손자 를 죽인……. 빌어먹을 돌팔이였지. 우리들로선 도저히 신화급 이상으로 올라갈 자신이……. 언젠가 신화급 웨이브에 들어가면 조심……. 그곳 은……. 너무나도 위험"?…
중간부터 말이 조금씩 끊기나 싶더 니 끝내 현자의 말이 멎었다.
어느새 초상화가 흐려지면서 액자 안에 현자의 얼굴 대신 흐릿한 배경 만이 남아 있었다.
마법진이 오래된 탓에 결국 기능을 상실한 것 같다.
강현은 로브 후드를 뒤로 넘기며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묵념 후,고개를 드니 현자 의 얼굴을 이루고 있던 물감이 홀러 내리는 것이 보였다.
마법진이 산화되면서 생긴 열기에 의해 수증기가 맺히면서 물감과 함 께 홀러내린 것이었다.
그것이 죽은 손자를 보러 가게 되 어 홀리는 기쁨의 눈물인지,살아생 전 스스로를 탓하며 살아온 자가 흘 리는 후회의 눈물인지…….
강현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강현은 벗었던 로브 후드를 다시 덮어쓰며 몸을 돌렸다.
로브 후드 아래로 김이 뿜어져 나 옴과 동시에 강현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세이아나를 찾으러 가자.
*
자신의 쉘터로 복귀한 고메즈는 대 뜸 눈살부터 찌푸렸다.
자리를 비운 동안 불청객 한 명이 자신의 지역장실에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메즈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있는 호리호리한 몸집의 젊은 흑인을 향 해 말했다.
“지미,거기에 앉아 있다는 건 아 케론을 건너고 싶단 뜻으로 해석해 도 되겠지?”
7인의 지역장 중 한 명인 지미.
고메즈의 관할 지역 바로 남쪽에 있는 지역을 담당하는 자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지역장이 직접 찾아왔다.
좋은 일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 쯤은 고메즈도 알아차렸다.
안 그래도 강현 때문에 속이 뒤틀 린 마당에 불청객까지 왔으니 기분 이 안 좋을 수밖에.
고메즈가 겪은 일을 알고 있는지 지미가 더더욱 고메즈의 속을 긁었 다.
“사양하죠. 아직 입 속에 동전을 물기에는 이른 나이거든요.”
“비켜.”
“너무하시군요. 자리를 비우신 동
안 밀린 업무를 대신 처리해 줬는데 말이죠.”
“무슨 일로 왔는지 말해라.”
“별거 아닙니다. 고메즈 지역장께
서 디스트로이를 모두 잃고 비루먹 은 개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서 말 이죠. 장로회에서 엄청 걱정하더군 요. 오죽하면 저 보고 직접 상태를 살펴보란 명령까지 내렸겠습니까? 뭐 모습을 보니 스스로 목을 매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조롱기가 서려 있다.
지역장끼리라고 서로 사이가 좋진 않다.
서로 차기 본부장을 노리고 있는
만큼 다들 경쟁자나 다름없다. 더구나 고메즈의 경우 악질이나 마찬가지인 성격 때문에 지역장들 사 이에서 붕 뜬 존재였다.
그런 만큼 한 번 약점을 노출했을 때 날아드는 조롱 또한 남달랐다.
고메즈는 정색하면서 고요히 적의 를 표출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말하라고 했을 텐데?”
지미는 고메즈의 자리에서 몸을 일 으키며 한없이 우쭐거렸다.
“최강현을 처리하라는 임무는 완수 했습니까?”
“그건 왜 묻지?”
“큭큭,반응으로 봐선 완수하지 못
했나 보군요. 용건은 별거 없습니다. 장로회에서 이리 전달하라더군요. 루키 따위에게 당하는 지역장이라니 커뮤니티의 수치다. 반년간 CP감봉 에 근신을 명하고,고메즈 지역장의 임무는 저 지미 라이어트가 이어 받 으라고 하셨습니다.”
커뮤니티 지역장의 연봉은 수억CP 에 달한다.
그걸 12개월로 쪼개면 한 달에 수 천만 CP를 받고 있는 셈이다.
얻고 있는 CP만 스텟에 투자해도 한 달에 수십 스렛을 올릴 수 있었 다.
그러므로 반년간 감봉은 굉장히 큰 처벌이었다.
허나 고메즈 입장에선 감봉보다 임 무 인계가 더 크게 다가왔다.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여 겼던 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굴 욕을 당했다.
직접 최강현을 처리하지 않고선 직 성이 풀리지 않는다.
손수 놈의 숨통을 끊지 않고선 발 뻗고 잘 수 없다.
그런데 감히 내게서 앙갚음의 기회 를 빼앗아 가려고 해?
나 고메즈에게서?
감히 장로회 따위가?
내가 누군 줄 알고!
고메즈의 속은 이미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지미가 도화선에 불을 지피 는 한 마디를 던졌다.
“한 마디도 못하는 걸 보니 본인도 퇴물이란 자각은 있나 보군요.”
분노가 한계치를 넘은 탓에 머릿속 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고메즈는 눈이 반쯤 뒤집혀선 지미 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회색빛이 홀러나오고 있 었다.
고메즈의 전매특허인 소멸 부여 스 킬이 었다.
지미로선 같잖을 따름이었다.
'움직임이 이리 조잡해서야 원. 아 무리 사기적인 능력이라도 닿지 않 으면 의미가 없단 걸 알아야지.’
지미도 지역장 중 한 명이다.
고메즈 못지않은 스렛과 스킬을 가 지고 있다.
어차피 같은 지역장끼리 죽고 죽이 는 싸움을 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간단한 이동기로 회피할 생각이었 다.
그 순간,고메즈의 입이 달싹였다.
“블루워터 마운틴에서 재미있는 장 난감을 손에 넣었지.”
지미는 어느샌가 몸이 움직이지 않 는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스킬과 보구 능력까지 발동 하지 않았다.
마치 상대방의 선공이 날아들 때까 지 모든 게 정지된 양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
가.
고메즈에게서 스킬이나 보구를 쓰 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고메즈는 간단하게 지미의 실드를 소멸시키곤 그의 팔뚝을 잡았다.
소멸 부여의 힘이 작용하면서 팔뚝 살점 일부가 증발했다.
지미의 팔뚝에서 피가 쏟아짐과 동 시에 허연 뼈가 드러났다.
고메즈의 선공을 허용하고 나서야 지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미는 팔을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쳤다.
“크으옥! 고메즈 지역장! 본부의
명령에 불복하겠다 이겁니까!”
고메즈는 뒷걸음질 치는 지미의 멱 살을 잡아다가 책상 위에 내리꽂았 다. 그러곤 고통으로 일그러진 지미 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어릴 적에는 곤충 채집이 취미였 지. 잡은 벌레를 하나하나 해체하면 부들부들 떠는 게 상당히 재밌더 군.”
“무,무슨 소리를……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야.”
고메즈가 소멸 부여가 된 손을 지 미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시야 가득 들어오는 회색 손을 앞
에 두고 지미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덥석!
잠시 후,고메즈는 지미의 얼굴에 서 손을 뗐다.
지미의 얼굴은 멀쩡했다.
손이 얼굴에 닿기 직전,소멸 부여 를 푼 것이었다.
하지만 축축하게 젖은 지미의 바지 는 그가 느낀 공포심을 허실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고메즈는 지미에게서 물러나며 살 기 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회에 가서 전해라. 최강현,그 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죽인다 고.”
지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 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기에 부 축할 사람을 불러야만 했다.
고메즈는 바깥에 대고 사람을 불렀 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러자 말단 조직원 명찰을 달고 있는 젊은 동양인 남자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 냄새 나는 놈을 방까지 옮겨 라.”
“네,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동양인 남자는 비틀거리는 지미를 부축하여 바깥으로 나갔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그의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최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