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강련은 루나를 안은 채로 경사 진 눈밭을 굴렀다.
미끄러지듯 아래로 구르다가 아까 파 놓은 에어포켓 구멍 속으로 두 발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강하게 몸 을 비틀어서 에어포켓까지 한달음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구멍이 뚫려 있긴 해도 매몰을 막 기 위해 비스듬히 팠으니 에어포켓 이 통째로 무너질 일은 없을 거다. 한편 강현과 루나가 내려간 것과 교차하듯 얼마 떨어진 곳에서 라이 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르르르,
라이로선 강현이 파 놓은 출구로 나올 수가 없어서 저 홀로 출구를 파내야만 했다.
앞발을 열심히 놀리면서 눈을 파낸 끝에 지금에서야 바깥으로 나온 것 이었다.
하지만 라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눈사태 였다.
라이는 밀려오는 눈사태를 보곤 영 문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 다.
“냐?”
동시에 눈사태가 라이를 휩쓸고 지 나갔다.
불쌍한 유리 사자는 대자연에게 농 락당하면서 하염없이 눈더미에 파묻히고 말았다.
두 번째 눈사태가 지나간 후,강현 은 왼손을 쥐락펴락하며 제왕의 화 염검을 써 보았다.
“아직 안 나오는군. 좀 더 있어야 하나.”
시선을 통한 스킬 봉인 및 보구 능력 봉인은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 마련이다.
전투를 벌이며 상당한 시간이 홀렸 건만 아직 봉인이 풀리지 않았다.
예전에 크라이머 던전에서 싸웠던 석상 호걸에겐 봉인 스킬이 없었다. 아마 석상 호걸의 소환석에 스킬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석을 추가 한 게 아닐까 싶다.
‘이제 남은 건 석상 호걸뿐이야. 녀석을 치려면 일단 여기서 나가야 겠군.’
출구를 뚫으려고 빙백검을 위로 향 하던 찰나.
지상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 다.
투응! 투응! 투응!
석상 호걸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 니 이내 곧 조용해졌다.
후드 위에 손을 얹어 귀를 막고 있던 루나가 슬그미니 손을 떼며 말 했다.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나 봐.”
순간 강현이 냉큼 루나의 로브 뒷덜 미를 낚아채며 옆으로 밀어젖혔다.
“온다. 비켜.”
“엥? 에엥?”
과과과과!
루나가 옆으로 밀려남과 동시에 에 어포켓 천장이 무너지면서 굵직한 검이 떨어져 내렸다.
흉흉한 기세와 함께 마나 블레이드 의 검날이 강현에게로 쇄도했다. 강현은 수정 스렛의 효과를 최대한 발휘하여 석상 호걸의 검을 최대한 밀어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빙백검의 손 잡이를,왼손으로는 검면을 받치며 석상 호걸의 검을 비스듬히 받아 냈 다.
끼기기긱!
날카롭게 벼려진 마나끼리 충돌하 면서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발생했 다.
마찰면에서 불꽃이 튀는 가운데 강 현이 수를 썼다.
강현은 지면에 박힌 석상 호걸의 검 위에 발을 디디며 루나를 향해 외쳤다.
“루나! 파이어볼!”
“응! 파이어볼!”
루나가 있는 힘껏 마나를 부여하여 천장을 향해 파이어볼을 쏘았다.
이미 석상 호걸의 검에 의해 천장 기능을 하던 바위에는 구멍이 뚫린 상태다.
거기에 열기를 가득 머금은 파이어
볼이 작렬하면서 구멍이 넓어졌다. 강현은 석상 호걸의 검을 밟고서 넓어진 구멍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 곤 빙백검으로 석상 호걸의 다리를 그었다.
투응!
검을 통해 물컹거리는 타격감이 전 해져 왔다.
공격무효화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주변을 보니 벌써 부서진 석상 낭 인,석상 응인들이 회복된 후였다. 그래도 상관없다.
관통 스렛의 효과가 발동했으니까. 공격무효화 능력 너머로 석상 호걸 의 다리에 기다란 금이 생겨났다. 금이 생겨난 부위를 기준으로 석상호걸의 다리와 발이 분리되었다.
쩌적!
발을 잃은 석상 호걸은 균형을 잡 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졌다.
강현은 덩그러니 남아 있는 석상 호걸의 발을 디딤대 삼아 뛰어올랐 다. 그러곤 떨어지면서 빙백검을 거 꾸로 쥐고 쓰러진 석상 호걸의 목에 내리찍었다.
투응!
이번에도 공격무효화 능력에 검이 막혔지만 데미지는 그대로 전달되어 석상 호걸의 목이 꿰뚫렸다.
석상 호걸이 죽으면서 주변에 있던 부하 석상들도 모두 움직임이 멎었 다.
강현은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 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아까 그 퀴즈. 정답은 가이아 대 륙이었군.”
상체와 하체는 가이아 대륙의 북대 륙,남대륙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늘로 향해 있는 손은 천공섬을 말하고,바다로 향해 있는 손은 해 저섬을 말하는 것일 터.
설명에 포함되어 있던 열기는 태양 을 말하는 것으로 태양이 있으면 밝 아지고,태양이 없으면 어두워진다. 가이아 대륙에 있는 해저동굴과 똑 같은 구조의 해저동굴,석상 응인과 석상 낭인 사용했던 제국 5대 검술 을 보고 정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뒤에선 루나가 출구를 엉금엉금 기 어 올라오고 있었다.
강현은 루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 어올려 주었다.
“또 방어 설비가 있을지도 모르니 까 조심해서 이동하자고.”
“응. 어라? 근데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루나는 검지를 턱에 대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금방 고민을 접었다.
“아무것도 아냐. 별거 아니겠지 뭐.”
두 사람이 산등성이 너머로 향한 후.
한참이 지나서야 산 아래쪽 눈이
들썩거리며 라이가 고개를 내밀었 다.
라이는 바둥거리며 눈 위로 올라와 선 아무도 없는 능선을 보곤 어리둥 절해했다.
“냐?”
*
다행히도 석상 군단 외의 방어 시 설은 없었다.
덕분에 아무런 방해 없이 산등성이 를 넘을 수 있었다.
반대편 산 능선 중턱 즈음에 반듯 한 2층짜리 오두막집 한 채가 덩그 러니 세워져 있었다.
연구소라 했지만 실제론 현자가 살 던 집을 연구소라 부르게 한 모양이 었다.
강현과 루나는 오두막집에 다가갔 다.
오두막집 처마에는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겨우살이가 매달려 있었다. 오랜 기간 햇볕과 해풍을 맞은 탓 에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락거리며 잎이 부서져 내렸다.
강현은 마른 겨우살이 아래로 허리 숙여 들어가며 문고리를 돌렸다.
끼익! 철컥!
오두막집 안은 생각보다 추웠다.
온도 때문이라기보단 오랫동안 사 람 발길이 닿지 않은 탓에 생겨난 싸늘함이 었다.
내부의 살림 또한 을씨년스럽기 그 지 없었다.
텅 비어 있는 벽난로와 낡은 침대, 먼지 쌓인 카펫,옷장과 부엌살림이 전부였다.
과연 그 대단한 히든 시스템을 만 든 곳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의문을 느끼는 강현과 다르게 루나 는 거실 안을 방방 뛰며 돌아다녔 다.
“여기야 여기! 나 계속 여기서 살 았었어.”
“먼지 날리니까 조심해서 다녀. 목 감기 걸린다.”
“헤헤,오빠오빠,이리 와 봐. 이게
현자님이야.”
루나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현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벽을 보았다.
벽에는 사람 얼굴만 한 액자가 있 었고,그 안에는 어느 노인의 초상 화가 들어 있었다.
단안경을 쓰고 머리는 대머리에 허 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모습이 었다.
강현은 현자의 머리와 수염을 번갈 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래로 자라는 게 위로 자랐다면 볼만했겠군.”
“젊은이,초면에 실례되는 말을 하 는구먼.”
순간 강현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초상화에서 말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초상화의 얼굴이 움직 이고 있었다.
마치 그림 자체가 살아 있는 양 표정이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루나도 깜짝 놀란 나머지 강현의 다리 뒤에 숨어선 얼굴만 빼꼼 내밀 었다.
“우와! 깜짝 놀랐네.”
“허허,루나야 오랜만이구나.”
“현자님이야?”
“허허허,요놈아 애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저리 말이 짧아졌느냐. 하 긴 저편이 더 어울리긴 하군.”
죽은 현자가 언젠가 찾아올 히든 시스템 계승자에게 설명을 해 주려 고 사념체를 남겨 둔 것이리라. 강현은 팔짱을 끼며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이 현자로군. 여러모로 묻고 싶은 게 많아.”
“당연히 많아야지 요놈아. 내가 괜 히 루나를 만들어 뒀겠느냐.”
“루나는 사역마 겸 안내역으로 만 들어 둔 모양이지?”
“히든 시스템을 이어받은 녀석이 카니발에 와서 처음으로 비밀방에 들어가면 나오도록 해 놨느니라. 히 든 시스템이 왜 만들어졌는지 궁금 하니까 카니발까지 온 것이지 않느냐. 나도 일부러 초상화에 사념체까 지 남겨 가면서 방문자를 기다린 것 이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가 보군. 그럼 한번 설명해 보실까?”
“허허허,요놈 보소. 당돌한 게 꼭 앨버트 녀석과 비슷하구나.”
“앨버 트?”
“엘리오스 킨 앨버트 말이다. 히든 시스템은 전부 녀석의 지시로 만들 어 졌지.”
엘리오스 킨 앨버트.
귀에 익은 이름이다.
강현은 곧바로 앨버트란 이름을 기 억해 냈다.
“히든 시스템을 만들라고 한 게 빌
로스 제국의 황제였단 소린가?”
엘리오스 킨 앨버트는 다름 아닌 현재 빌로스 제국의 황제였다.
최근 몇 년간 제대로 얼굴조차 비 치지 않고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 는 베일 너머의 황제이기도 했다. 그나마 내리는 명령도 황제의 기사 라 불리는 자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 하고 있었다.
초상화 속의 현자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말을 이었다.
“테라 시스템 발발 초기에 나를 비 롯해서 몇몇 사람들이 가이아 대륙 에 처음 도착했었지. 게다가 떨어진 곳이 하필이면 황제의 처소 안이었 단 말일세. 황제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얼마나 황당했겠나?”
“잠깐. 최초의 이세계인은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고 죽은 걸로 안다 만.”
“황제가 우리의 존재를 은닉했으니 까.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웨이브는 재앙이라 불렸었지. 우리가 재앙의 근원으로 몰릴까 싶어서 숨겨 주었 다네. 황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 해서 웨이브를 좀 더 깊이 조사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여겼었지. 덕분에 우린 아무도 모르게 웨이브 를 드나들면서 많은 것을 조사했다 네. 아마 우리가 커뮤니티보다 훨씬 먼저 카니발의 존재를 눈치했을 게 야.”
“이미 한참 전에 카니발의 존재를 알았는데도 세상에 공표하지 않았다 는 건가?”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카 니발에 넘어와서 대부분의 동료들이 죽었지. 희생은 컸지만 수확이 없던 건 아니네. 테라 시스템이 만들어진 이유를 알아냈으니.”
중요한 대목이었다.
사실상 강현을 비롯한 수많은 이세 계인들이 이동한 이유나 다름없었기 에.
앨버트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무거 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테라 시스템은 절망한 자를 만들 기 위해 생겨났네.”
“절망한 자?”
“달리 말하면 최종병기라 할 수 있 겠군. 세상 모든 걸 초기화하기 위 한 자를 만들기 위해서 세계 스스로 가 만들어 낸 양육 시스템이랄까.”
“양육이라기보단 사육에 가깝군.”
“그거나 이거나. 아무튼 테라 시스 템의 특성상 사람이 사람을 이용할 수밖에 없도록 짜여져 있지. 위로 올라갈수록 아무도 믿을 수 없고, 타락하기 쉬워.”
“동감해. 사람 엿 먹이는 규칙들뿐 이니까.”
“아무튼 테라 시스템의 목적을 황 제에게 보고하니 이리 말하더군. 절 망하지 않고 최정상에 올라 테라 시스템을 끝낼 사람을 육성하기 위한 방법을 만들라고. 그래서 남은 동료 들끼리 만든 게 히든 시스템일세. 이걸 만들기 위해서 마탑의 지식까 지 끌어다 썼다네.”
“최정상에 오르면 테라 시스템이 끝나나?”
“가설일 뿐이지만 우린 그렇게 결 론을 냈네. 계속 오르고 올라 창조 급 웨이브를 공략하는 자가 나타나 면 그자는 테라 시스템이 절망한 자 로 선정되지 않을까 하고 말일세. 만약 그자가 세상의 더러움에 절망 하지 않은 자라면 최강의 힘을 가지 고도 세상을 멸하지 않을 테지.”
즉 황제는 절대로 타락하지 않을
선한 자를 선출하여 히든 시스템으 로 부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강현은 황제와 아무런 접점 이 없다.
선출되어 히든 시스템을 익힌 게 아니라 단순히 함정에 빠져서 우연 히 각성의 서를 접했을 뿐이다. 강현은 그 점을 짚었다.
“난 황제에게 부탁 받고 히든 시스 템을 접한 게 아니다만?”
“물론 그랬겠지. 원래는 황제가 직 접 후보자를 선출해서 개발한 모든 히든 시스템을 부여해 줄 생각이었 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겨났지. 그래서 계획을 변경해야 했네. 힘이 없어도 혼자 살아남을 기지를 가진 자,더불어 이성과 감 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현명한 자 를 선출할 수 있도록 히든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바꿨지.”
“그게 현재의 히든 시스템이로군.”
“제국 북쪽의 귀족가에 부탁해서 영지의 빈 던전을 개조했네. 저레벨 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살아남을 기량을 가진 자,각성의 서를 발견 할 정도의 재치를 가진 자를 선별하 기 위해서 말일세.”
강현은 자신이 제물로 바쳐졌던 크 라이머 던전을 떠올렸다. 그러곤 현 자의 말에서 다소 인위적인 뉘앙스 가 풍겨져 나옴을 느꼈다.
“마치 던전에 바칠 제물을 구하는
것 자체가 후보자 물색이었던 것처 럼 들리는군.”
“제물로 바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절 망하지 않을 자가 필요했으니까. 우 리로선 그 방법밖에 없었네. 혹시라 도 우릴 탓하고 싶다면 탓하게나.”
“별로 악감정은 없어. 크라이머 던 전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 나라도 당신 입장이었다면 같은 방법을 썼겠지.”
“이해해 줘서 고맙네. 이어서 말하 건데 몇몇 비밀방은 다른 이와 계속 협력한 자만 들어갈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지도록 설정해 놨었다네. 자 네도 느꼈나?”
생각해 보면 명계의 서나 군단의
서는 혼자서 얻을 수 없는 구조였었 다.
다른 이에게 속지 않을 정도의 이 성을 겸비하고 있되,사람간의 관계 를 잊지 않는 감성 또한 있어야만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절망한 자가 되 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강현의 의문을 읽은 둣 현자가 호 탕하게 웃었다.
“허허허,자네가 좋은 사람인지 아 닌지 좀 더 쉽게 구별할 방법이 있 지.”
“그거 참 좋은 능력이군.”
“능력이라고 할 것도 없네. 질문
하나면 끝날 일이니까. 루나야.”
줄곧 강현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루나가 입을 열었다.
“불렀어?”
“요 젊은이 녀석이 좋은 녀석 같더 냐?”
“응! 오빠 좋은 사람이야!”
“허허허,그렇구나. 자네 좋은 녀석
이구먼.”
아이는 있는 그대로 본다 했던가. 괜히 사역마를 천진난만한 아이로 만든 게 아니었군.
테라 시스템이 만들어진 이유,히 든 시스템이 만들어진 이유는 대강 알았다.
그런데 현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강현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질 문을 던졌다.
“아까 변수가 발생해서 계획을 변 경했다고 했었지. 어떤 변수였길 래?”
현자는 의외라는 양 눈썹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음? 아직도 황제의 죽음이 공표되 지 않은 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