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김혜림의 작전은 채택되었다. 처음에는 작은 천주머니 하나로 뭘 할 수 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천주머니 안에 있는 물건을 보여 주자마자 몽발리 후작의 허락 이 떨어졌다.
*
뿌우우!
성벽 위에서 저녁 6시를 알리는 뿔고등 소리가 울려 퍼진다.
석양을 등진 나팔병의 어두운 실루 엇이 하루의 고단함을 대변한다.
병사들은 먼지 앉은 투구를 내려놓 고,모닥불은 부드러이 불길을 넘실 거리며 피로에 지친 이들을 불러들 인다.
몽발리 후작의 저택에서 나온 김혜 림은 천막으로 만든 막사 사이를 거 닐 었다.
뒤이어 빅터가 김혜림에게 따라붙 으며 나란히 걸었다.
“작전의 취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혼자 떠나는 건 무모하지 않겠습니 까?”
몽발리에서 크레인 공국으로 넘어 가려면 빌로스 제국 북부를 횡단해 야 한다.
알다시피 빌로스 제국 북부는 두
공작파의 세력권이다.
산을 타고 이동하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김혜림이 강현을 찾으러 나선다고 일부러 정보를 흘려야 하니까.
드리안 공작이 이 기회를 놓칠 리 가 없다.
필시 마나 마스터를 포함한 추격대 를 편성하여 김혜림을 제거하려 들 거다.
김혜림의 입가에 수묵화의 첫 획 마냥 열은 미소가 그려졌다.
“이번 작전은 혼자가 아니면 의미 가 없어요. 그리고 제가 어디 가서 죽을 사람으로 보이나요?”
“으음,단장님을 가장 가까이서 보
아 오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 다고 혜림 양이 굳이 단장님처럼 하 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강현 씨처럼 못할 거라고 생 각하세요?”
“단장님은 특별하지 않습니까.”
김혜림은 투구를 벗어서 옆구리에 끼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요염함을 더했다.
그녀는 밤의 커튼이 내려앉고 있는 하늘을 보며 아련히 말했다.
“저와 강현 씨는 올롬보르에서 처 음 만났죠. 그때만 하더라도 몬스터 한테 상처를 입기도 하고,용병들과 눈치 싸움도 하고,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던전 공략법을 찾기도 했었 죠
“단장님께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 요.”
“저도 처음에는 강현 씨가 특별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같이 다니다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그 이의 손바 닥을 본 적 있으세요?”
“자세히 본 적은……. 없는 걸로 기억합니다.”
“언제 한 번 손을 잡았는데 정말 사람 손인가 싶을 정도로 거칠더라 고요. 그때 느꼈죠. 원래부터 잘나서 그 위치까지 간 게 아니라 피나는 노력으로 올라간 사람이구나. 그래 서 더 걱정돼요.
연필심도 너무 뾰족하게 깎으면 오히려 부러지기 쉽 잖아요? 짐을 덜어 줄 누군가가 있 으면 좋을 거고,그게 저였으면 좋 겠어요. 그러니 위험부담을 감수해 서라도 가고 싶어요.”
진지한 얘기이건만 듣고 있던 빅터 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 았다.
현재 김혜림의 위치가 어떻던가.
아군에겐 든든한 여장부,적에겐 무서운 냉혈한이다.
그러나 강현 얘기를 할 때는 한 명의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게 강현이 있을 때의 김혜림이며 원래 그녀의 모습이다.
빅터는 어깨에 힘을 빼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혜림 양은 단장님 옆에 있을 때가 가장 보기 좋습니다.”
“둘이 잘 어울린다는 뜻이죠?”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습니까.
뭐 더 이상 위험하니 마니 하는 말 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 이상 말리 는 건 참견일 테니까요.”
“믿어 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이 말만은 해야겠군요.”
“뭔데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등을 맡기던 전우에게 최선의 인사 를 건네는 빅터였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어느덧 간 부 막사에 다다랐다.
서로 다른 건물에서 지내기에 이제 갈라져야만 한다.
막사에 도착하면 바로 배낭을 꾸려 떠날 예정이다.
헤어지기 앞서 김혜림은 벤젠 기사 단의 단장 대리 빅터를 향해 경례 자세를 취했다.
“벤젠 기사단 소속 김혜림. 원정 나간 단장을 데리러 다녀오겠습니 다.”
*
몽발리 북부에 위치한 벌판.
추수를 끝낸 벌판에는 드리안 공작 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드리안 공작은 따뜻한 공기가 감도 는 천막 안에 들어서며 파이프를 입 에 물었다.
같이 따라 들어온 철갑기마대 단장 사이런스가 성냥으로 파이프에 불을 붙여 주었다.
드리안 공작이 연기를 내뿜으며 말 을 꺼냈다.
“김혜림이 혼자 최강현을 찾으러 나섰다고 했나?”
“네,밀정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수상쩍은 정보로군. 그 계집이 자 리를 비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 를 리가 없을 텐데? 거짓 정보일 가능성은 없나?”
“확실한 정보입니다. 아마 정말로 최강현을 발견한 게 아닌가 싶습니 다.”
드리안 공작의 눈썹 사이에 세로 주름이 잡혔다.
그에게 있어 강현은 껄끄럽기 짝이 없는 상대다.
무력도 무력이거니와 전략적으로 무슨 짓을 꾸밀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다.
강현 한 명이 돌아오는 것만으로 전선에 배치된 모든 부대의 전략전 술 및 예정을 변경해야 한다.
거론된 대상이 보통 인물이 아닌 만큼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이상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최강현,그놈을 마중 나갈 이유가 없어. 그놈 수준에 호위가 필요할 까? 놈의 입장에선 아무도 마중 나 오지 않고 혼자 조용히 성에 들어가 는 게 편할 텐데 말이야.”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마 중 나간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가 있 을 겁니다. 김혜림이 직접 최강현을 찾으러 나선 것이든지,마중 나가는 시늉으로 우릴 압박하려든지……. 뭔가 진짜 목적이 있겠지요.”
“내 감으론 직접 최강현을 찾으러 나선 것 같군. 일부러 마중 나가는 시늉을 하는 것도 우리가 함부로 추 격대를 파견하지 못하게 압박을 주려는 것이겠지.”
강현이 오고 있다면 김혜림에게 함 부로 추격대를 파견할 수 없게 된 다.
예전에 강현을 잡으려고 스카텐드, 요단,겔로그 세 명의 마나 마스터 를 투입했는데도 역으로 전부 당해 버렸다.
드리안 공작의 부대에 포함되어 있 는 마나 마스터는 사이런스와 압둘 이 전부다.
김혜림을 추격하다가 강현과 맞닥 뜨리면 괜히 애꿎은 마나 마스터만 죽기 일쑤다.
마나 마스터가 아까워서라도 추격 대를 파견하지 못하게 된다.
그게 바로 김혜림이 노리는 부분일 거다.
속셈을 안 이상 속아 줄 이유가 없다.
“사이런스,기사들을 이끌고 가서 김혜림 그년을 내 앞으로 끌고 오너 라.”
“사살이 아닌 생포 임무입니까?”
“그년이 최강현의 여자라는 건 유 명한 이야기지. 혹시나 나중에 최강 현이 돌아오면 그년을 인질로 쓸 수 있을 거다.”
“저 사이런스 드리안 공작님의 혜 안에 감탄했습니다.”
“하하하,말솜씨가 늘었구나, 사이 런스.”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 다.”
“알겠으니 당장 추격에 나서도록.”
“네!”
*
김혜림은 몽발리를 떠나서 구름다 리가 있는 북서쪽을 향해 이동했다.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최대한 산 길을 이용했고,적의 검문소가 있는 구역에선 카모플라쥬를 활용했다. 처음 사흘 동안은 아무런 트러블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가 발생한 건 나흘째 아침이었 다.
슈타인 백작가 뒷산을 지나며 쪽잠 을 자고 동굴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머리 위를 지나치던 까마귀 한 마 리가 크게 선회하더니 김혜림의 머 리 위에 머물렀다.
김혜림은 스킬이 걸린 까마귀임을 직감했다.
‘동물 조종술에 걸린 까마귀인 게 분명해. 지금 사이런스가 쫓아오고 있구나.’
동물을 조종하며 시야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은 사이런스의 장기다.
김혜림을 찾기 위해 까마귀를 이용 한 것이었다.
지금 막 까마귀의 눈을 통해 김혜 림의 위치를 확인했을 터.
김혜림은 아공간 반지에서 가이아 보우를 꺼내서 대지의 화살을 소환 했다.
시위를 놓자 단단한 촉을 지닌 대 지의 화살이 하늘로 솟구치며 까마 귀를 꿰뚫었다.
“갸악!”
더불어 김혜림도 ‘엿보기 유령’이 란 스킬을 발동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두 마리의 투명 한 유령이 소환되었다.
공격력이 없고,원격 조종이 가능 하며,사용자와 시야를 공유하는 유 령이 다.
빅터의 하멜론의 쥐와 비슷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벽을 관통할 수 있다는 것과 소환시간이 10분으로 제한된다는 점이었다.
김혜림은 엿보기 유령을 공중으로 날려서 산 아래를 탐지했다.
지금 막 산어귀에서 사이런스를 비 롯한 철갑기마단 기사 15명이 올라 오고 있었다.
신중을 기하려는 듯 5인 1조로 조 를 짜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산길임에도 불구하 고 체력 안배 없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마나 마스터 1명에 마나유저 중, 상급 15명이네. 기력포션을 먹은 거 려나. 아주 다들 작정하고 달려오 네.’
남자들이 몰려오는 것에는 익숙하 다.
들고 오는 게 꽃다발이 아니라 검 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김혜림은 적당한 절벽 위에 올라가 서 천주머니를 열었다.
천주머니 안에는 쪽지 한 장과 아 공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김혜림은 아공간 목걸이를 꺼내선 그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바깥으로 꺼내 놓았다.
‘어떤 것’을 절벽 위에 배치한 그 녀는 활을 꺼내 들며 산 아래를 향 해 내려갔다.
*
사이런스는 까마귀가 죽자마자 소 리잔에 대고 명령을 내렸다.
“타깃을 발견했다. 위치는 산 남쪽 능선 부근.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공작님의 엄명이 있었으니 상대함에 있어 주의를 기울여라. 살아만 있으 면 되니 팔다리 정도는 베도 좋다.”
5인 1조로 짜 놓은 세 개의 조가 포위망을 형성하며 김혜림을 찾으러 나섰다.
얼마 전에 산불이 났던 산인지라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김혜림이 원거리에서 저격한다 하 더라도 사전에 발견할 수 있는 환경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저 멀리 검게 그을 린 바위 위에 김혜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교묘하게 태양을 등진 채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사이런스는 햇살 때문에 눈살을 찌 푸리면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산개해! 마나 애로우가 날아들 거 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나 애로우가 덧씌워진 애시드 애로우가 날아들었 다.
애시드 애로우는 산개하는 기사들 사이를 지나치며 뒤쪽에 있던 나무 에 적중했다.
치이익!
마나 애로우의 관통력과 애시드 애 로우의 산성 능력이 동시에 작렬하 면서 나무 하나가 흔적도 없이 녹아 내렸다.
사이런스는 급하게 피하느라 흐트 러진 균형을 다잡으며 검을 뽑았다.
“산개해서 접근해! 접근만 하면 제 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활의 특성상 근접전에서 약세를 보 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사이런스를 비롯한 철 갑기마대 기사들은 어떻게든 김혜림 에게 접근하려 했다.
김혜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화살을 연이어 쏘았다.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다지만 모
두가 김혜림의 화살을 피할 순 없었 다.
잠깐 멈칫하기만 하면 여지없이 화 살이 날아들어 미간을 꿰뚫기 일쑤 였다.
“커어억!”
“쿠억!”
김혜림에게 접근할수록 철갑기마대 기사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어느덧 사이런스와 기사들은 50미 터 거리까지 다가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림에게선 도주할 기색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사이런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
꼈다.
‘이만큼 다가섰는데도 도망가지 않 는다고? 아무리 엄폐물이 적은 곳이 라지만 보통은 치고 빠지는 전법을 쓸 텐데 어째서지?’
김혜림의 지척까지 다가섰을 때.
사이런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문득 절벽 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걸 발 견했다.
동시에 걸음이 멎고 말았다.
절벽 위에 흑발에 차가운 인상,푸 른 빛깔의 비늘로 이루어진 검을 든 사내가 서 있었기에.
사이런스는 믿을 수 없다는 양 입 을 쩌억 벌렸다.
“어,어째서 최강현이 이곳에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