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화
내전이 시작된 지도 어언 3달째.
몽발리 후작은 군사회의 시작과 동 시에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빅터 경,다시 한 번 말해 주게.”
빅터는 오늘 전투에서 발생한 아군 의 피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
“남쪽 성벽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천인장 2명과 백인장 5명이 사망했 습니다. 병사들 중 사망자는 약 500 명에 달합니다. 부상자는 브리튼 교 의 사제들이 전원 오늘밤 내로 치료 를 마쳐 주겠다고 하니 염려하지 않 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후우,다른 건 둘째치고 매일같이
지휘관이 당하고 있다는 게 문제로 군.”
“압둘의 소행입니다. 놈의 스킬은 원격 폭발인데다 촉매가 필요 없는 능력이라 마나유저 중급,초급 수준 의 지휘관들로선 막아 낼 수 없는 실정입니다. 지휘관을 병사들 뒤에 세워도 조금만 틈을 보이면 곧바로 스킬을 사용해서 지휘관만 속속들이 사살하고 있습니다.”
“골치 아픈 능력이구만. 얄밈게 알 맹이만 먹고 빠져 버리는데다 은밀 하기까지 하니 손쓸 도리가 없군. 이대로 가다간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걸세. 그 전에 다들 대책을 내어 보게.”
덕장이라 불리는 몽발리 후작이다.
그런 그가 지휘관들을 닦달할 정도 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3달 전.
불이 붙은 도화선마냥 터지기만을 기다리던 내전이 드디어 발발했다. 먼저 드리안 공작가의 철갑기마대 가 빌링턴을 점령하면서 내전의 봉 화를 피웠다.
그에 대응하여 황궁에서는 황제가 에르델에게 지휘권을 위임했다.
에르델은 이미 리바시치를 쳐내면 서 황궁의회를 완전히 장악했기에 그 누구 하나 반대하는 자가 없었 다.
그녀의 지휘 하에 대대로 황가에
불변의 충성을 바쳐 온 그란데 백작 가의 그란데 백작을 대장군에,공국 의 사냥개라 불리는 네베르 백작을 우장군에,황제의 동생이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경력이 있는 동발리 후 작을 좌장군에 봉했다.
거기에 오크 평원의 오크들까지 빌 로스 제국과의 오랜 친분을 생각하 여 1만의 오크전사를 보내 주었다. 강현에 의해 3명의 마나 마스터를 잃은 공작파에게 승산은 없어 보였 다.
허나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내 전은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압둘,카슈아딘,엘딘.
지저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세 명
의 마나 마스터가 공작파에 합류했 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죽은 요단,겔로그,스카텐 드의 공백을 메우는 정도가 아니라 공작파의 힘을 배가시켰다.
공작파는 압둘,카슈아딘,엘딘의 합류에 힘입어 큰 피해 없이 남하를 강행했다.
현재 동발리에선 드리안 공작이 직 접 끌고 온 3만의 대군을 상대로 한 달간 필사적인 수성전을 벌이고 있었다.
동발리 후작이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때,지휘관 중 누군가가 조심 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오늘 김혜림 경이 압둘에
게 화살을 적중시켰지 않습니까? 멀 리서 봤는데 어깨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습니다. 그 정도 상처라면 앞으 로 사나흘간은 움직이지 못할 겁니 다.”
“후우,공작파의 후방부대를 맡고 있는 자들을 잊은 겐가?”
“아,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 니다.”
황제파에 브리튼 교가 있다면 공작 파에는 이교도들이 있다.
카슈아인이 지저감옥에 갇힐 때, 이교도들의 대다수가 미리 피신하여 대륙 곳곳에 몸을 감췄다.
그때 검거하지 못한 이교도들이 카 슈아인의 탈옥과 함께 응집하여 공작파에 합류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브리튼 교에서 파생
된 종교이기에 브리튼 교와 마찬가 지로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것도 최고의 치유회복 보구라 불 리는 불사조의 깃털과 동급인 마법 을 말이다.
고로 숨통을 끊는 게 아니면 의미 가 없었다.
회의실 안은 답답함을 대변하는 한 숨 소리만이 가득했다.
빅터는 답이 없는 상황이 안타까운 나머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럴 때 단장님이 계셨더라면
강현이 개인적인 사정을 피로하며
사라졌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 었다.
만약 그가 있었더라면 이토록 상황 이 나빠지지 않았을 거다.
모두의 표정에 침울함이 감돌던 중.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조롱이 날 아들었다.
“전쟁이 무서워서 도망친 놈을 그 리워하다니 제국군의 위신도 떨어질 대로 떨어졌군.”
모두의 이목이 회의실 입구로 향했 다.
회의실 입구에선 막 황자 드래코프 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요 며칠간 몽발리에서 머무르
는 중이었다.
표면상으로는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문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디벨롭이 떠나고 리바시치까지 정 리당하면서 황궁 내에서 드래코프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이번 기회에 민심이라도 확보하고 자 전장 방문이라는 얕은꾀를 짜낸 것이다.
허나 정작 전장에 방문해서 하는 일이라곤 방 투정,음식 투정,옷 투정뿐이었다.
빅터는 드래코프의 도발을 듣곤 정 색하며 반박했다.
“단장님은 더 중요한 일을 위해 따
로 움직이고 계실 뿐입니다.”
김혜림에게 강현의 메시지가 전달 된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강현이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으니 필시 내전보다 더 중요한 일 일 터.
그러나 드래코프의 조롱은 멈출 기 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전보다 더 중요한 일 따위가 있 을까 보냐. 있다면 어디 한 번 듣고 싶군.”
“드래코프 황자님,장병을 위로하 러 온 사람의 말투로는 어울리지 않 는 것 같습니다.”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뭐가 문 제지? 아니라고 하지만 속으로는 찔리는가 보군. 제 일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겁쟁이를 그리워할 시간에 이길 수 있는 작전이나 짜내도록.”
드래코프가 말을 꺼낼 때마다 회의 실 안의 모두가 공포심에 물들었다. 드래코프는 오랜만에 더할 나위 없 는 쾌감을 느꼈다.
이게 나다.
내 말 한 마디에 모두가 벌벌 떨 던,이게 원래 내가 보아오던 경치 란 말이다.
오랜만에 황자의 기분을 만끽하던
중.
드래코프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회의실 안의 모두가 자신이 아닌 자신의 등 뒤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드래코프는 의문에 휩싸이며 뒤를 보았다.
고개를 돌린 순간,그는 전신에 소 름이 돋고 말았다.
바로 등 뒤에 귀기에 휩싸인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김혜림이 서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얼어붙은 듯 정적이 흘렀 다.
정적을 깬 건 몽발리 후작이었다.
“다들 혜림 경을 말리게! 얼른!”
가장 먼저 빅터가 의자를 박차며 김혜림과 드래코프 사이에 끼어들었 다.
“혜림 양! 진정하십시오! 기분은
알겠지만 상대는 황족입니다!”
회의실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이 허 겁지겁 드래코프의 양팔을 잡아끌었 다.
드래코프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으면서도 입만 살아선 고함을 질렀다.
“이거 놓아라! 저깟 계집이 감히 날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 가 뭐 틀린 말한 것도 아니거늘!”
동발리 후작은 얼른 드래코프의 등 을 떠밀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전 황자님이 껄끄 럽습니다. 하지만 불청객도 손님은 손님. 제 저택 안에서 손님이 죽는 꼴만은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동발리 후작의 말은 너무나도 심각 하여 도저히 허세나 위선으로는 보 이지 않았다.
드래코프는 몽발리 후작의 어깨 너 머로 김혜림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싸늘한 눈빛으로 드 래코프를 보고 있었다.
어찌나 온도가 낮은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드는 것 같았다. 필요하다면 황궁조차도 적으로 돌 릴 기세다.
정말 최강현의 옆에서 출싹거리던 그 여자랑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언젠가 리바시치가 한 말이 뇌리를 스친다.
‘그냥 여자 최강현입니다. 최강현
이 떠나기 전에 똑같은 년을 남겨 두고 갔습니다.’
당시에는 코웃음을 치며 넘어갔었 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허언이 아 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붕새를 쫓던 참새인 줄 알았건만 봉황의 새끼였던가!
드래코프는 본의 아니게 꼬리를 내 리며 도망치듯 저택에서 나갔다.
드래코프가 떠난 이후,회의실 안 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몽발리 후작부터 시작하여 말단 지 휘관까지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김 혜림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직위는 여전히 일개 기사에
불과하지만 동발리 내의 그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몽발리의 1만 병력으 로 드리안 공작의 3만 병력을 막아 낼 수 있는 건 전부 김혜림 덕분이 었다.
그녀가 부순 투석기와 사다리만 수 십 개,사살한 적만 수백 명,불태 운 식량만 수백 포대에 달한다. 압둘이 대놓고 활동하지 못하는 것 도 김혜림의 화력이 억제력으로 작 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발리 후작은 간을 졸이며 어렵사 리 말을 꺼냈다.
“저……. 혜림 경? 드래코프 황자 가 멍청하다는 건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네. 그러니 염두에 두지 말게.”
빅터를 비롯한 지휘관들도 안절부 절못하며 김혜림을 달랬다.
“어차피 가만히 놔둬도 무너질 사 람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빅터 경 말이 맞소. 강현 경이 영 응이라는 건 만인이 인정하는 바요. 모자란 사람 때문에 흥분할 이유가 없지. 암암 그렇고말고.”
그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드리안 공작군이 처음 몽발리에 도 착했을 무렵.
전투 시작 전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린답시고 드리안 공작군에서 백인 장 몇 명이 성벽 가까이 다가왔었다.
그들은 각종 모욕적인 언사로 동발 리 후작의 병사들을 도발했고,병사 들이 발끈하여 날린 화살을 가볍게 막아 보이며 드리안 공작군의 사기 를 올렸다.
참상은 어느 백인장이 무심코 내지 른 말에서 비롯되었다.
‘너희가 그리 자랑하던 최강현은 어디 갔느냐? 마주치면 당장에 회를 떠서 안주로 삼으려 했건만 어찌 알 았는지 꽁지 빠지게 도망가고 보이 질 않는구나!’
그게 그 백인장의 마지막 말이 되 었다.
그 말을 뱉은 직후,김혜림이 쏜
화살이 백인장에게 적중했다.
대량의 마나가 가미된 마나 애로우
가 작렬하면서 백인장의 몸은 그 자 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화살을 맞춘 후에 김혜림이 중얼거리길.
“아,나도 모르게 마나낭비를 해 버렸네. 그래도 헛소리를 하면 어떻 게 되는지 알았으니 상관없으려나.”
그녀의 앞에서 강현을 모욕하면 어 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사례였다. 적들은 물론이고 아군에게도 가차 없이 철퇴를 가하겠다고 말한 거나 다름없는 일화였다.
그 이후로 황제군 내에서 농담으로 라도 강현의 험담은 금기시되었다. 모두가 김혜림의 눈치를 보던 중. 정작 김혜림 본인은 신경도 안 쓰 는 듯 무심히 한 마디 내뱉었다.
“무턱대고 죽일 정도로 막 나가진 않아요.”
아직은 건수가 없기 때문에 놔두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어조가 건조한 게 오히려 더 무섭 게 느껴졌다.
게다가 지금은 드래코프 따위보다 눈앞의 적부터 퇴치하는 게 급선무 다.
김혜림은 생각한 바가 있는지 몽발 리 후작을 불렀다.
“몽발리 후작님.”
“응? 어? 아,날 불렀나? 무슨 용 무인가? 듣고 있으니 하고 싶은 말 이 있다면 말하게.”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죠?”
“희소식이랄 만한 건 없네. 동부 전선은 엘딘의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언데드 때문에 고생 중이고,서부 전선은 이도교의 꾀임에 넘어간 백 성들이 밀정 노릇을 하고 있어서 작 전 유출이 심각하다는군.”
“상황이 안 좋다는 거네요.”
“뭐……. 굳이 따지자면 안 좋은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
“제게 한순간이나마 전선의 분위기
를 한번에 역전시킬 비책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어요?”
안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던 터라 곤란하던 참이다.
역전의 비책이란 말이 이리 반가울 수가 없다.
동발리 후작은 간만에 화색을 띠었 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먼. 얼른 말해 보게.”
“먼저 강현 씨를 찾으러 나서야 해 요. 절 크레인 공국으로 보내 주세 요.”
대단한 비책을 기대했던 몽발리 후 작은 공기 빠진 고무공마냥 추욱 늘 어 졌다.
강현이 있다면 이 내전을 금방 해 결할 수 있다는 것 정돈 누구나 아 는 사실이다.
허나 정작 당사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까 문제인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크레인 공국에서 발견 되었다는 것까지만 알지 그 이후엔 어디로 갔는지 누구도 모른다.
“혜림 양,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 네만 여전히 강현 경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 않는가. 설마 자네는 그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말인가?”
“아뇨,저도 몰라요. 그래도 크레인 공국에 가면 뭐라도 단서가 나오지 않겠어요?”
김혜림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양
한 마디 덧붙였다.
“제가 크레인 공국으로 떠나면 드 리안 공작군에게 정보를 흘리세요. 제가 강현 씨를 찾으러 나섰다고 요.”
“흐음……. 그러니까 허위 정보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흘리란 말인가?”
“네.”
“혜림 경, 난 자네가 매우 뛰어난 기사라 평가하네. 자네가 그리 말하 는 데엔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
강현에 대한 집착 때문에 떠나려 하는 거라면 굳이 정보를 흘릴 필요 가 없다.
그녀 혼자서라도 언제든지 훌쩍 떠
나 버릴 수 있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정 보를 흘리라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 을 터.
김혜림은 천주머니 하나를 기세 좋 게 들어 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 다.
“강현 씨가 좋은 걸 남겨 줬더라고 요.”
내전이 벌어지기 전,강현이 위급 할 때 쓰라며 남겨 주고 간 천주머 니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