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디벨롭의 시신이 양옆으로 갈라지 며 무너졌다.
그의 잔해가 핏물을 타고 흐르며 바닥을 적셨다.
강현은 디벨롭의 사망이 확실해진 후에야 움직였다.
시신은 나중에 도달할 베니스 기사 단이 알아서 처리할 거다.
‘시신을 남겨 두지 않으면 협곡 끝 까지 수색하겠지. 기사단과 마주쳐 서 좋을 건 없으니 이대로 두고 가 야겠군.’
일단 디벨롭이 언급한 카니발이란 상위차원으로 가 볼 생각이다.
그곳으로 가면 내게 피의 길을 강 요한,역겨울 정도로 배배 꼬인 테 라 시스템을 만들어 낸 존재에게 다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차원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째 째한 소원이나 빌 생각은 없다.
그저 이 망할 시스템이 왜 생겼는 지,누가 무엇 때문에 우릴 이 지경 으로 만든 건지 알아내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다.
‘디벨롭을 벴으니 카니발에 있는 조직이 움직일지도 모르지. 이미 주 사위는 던져졌어. 내겐 앞으로 가는 것밖에 남아 있지 않아.’
빙백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 어간다.
손잡이를 쥔 손에 방해되는 건 모 두 베어 내겠다는 의지가 머물렀다. 강현은 이글거리는 눈빛을 띤 채로 협곡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협곡 안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때문에 몇 번이나 막다른 길에 막 혀 돌아 나와야 했다.
하나,새벽별이 반짝일 무렵까지 돌아다녀 보았지만 동굴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디벨롭이 거짓말을 했나?
아니,그건 아닐 거다.
내심 고개를 저었다.
버려진 드래곤 로드의 레어에 카니 발 입구가 있단 대목에서 노이즈가 섞이지 않았다.
만약 놈이 거짓말을 했다면 간파의 능력이 발동했을 것이다.
‘있긴 한데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면 숨겨져 있단 뜻인가.’
풀 한 포기 없는 협곡이니 수풀 사이에 감춰져 있는 건 아닐 거다. 드래곤이 드나들 만한 큰 동굴을 가리려면 환각 효과가 있는 보구나 마법진이 필요할 터.
아니면 그에 준하는 위장벽을 만들 어 두었거나.
어느 쪽이건 직접 확인하는 방법밖 에 없을 듯했다.
강현은 막다른 길을 앞에 두고 미 라이언의 소환석을 꺼내 미라이언을 소환했다.
“크르르르,
소환된 미라이언이 목울림 소리를 내며 강현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강현이 막다른 벽을 가리키고 명령 을 내렸다.
“할퀴어 봐.”
입구를 감춘 벽에 침입자 퇴치용 마법이 걸려 있을 수도 있었다.
미라이언을 통해 먼저 건드려 보는 게 안전할 터다.
강현의 명령에 따라 미라이언이 손 톱으로 벽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북북! 북북!
마치 고양이가 문 열어 달라고 애 원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돌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벽을 긁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 다.
강현은 미라이언을 불러들이고 그 위에 올라탔다.
“다른 길로 가 보자.”
“크롱.”
미라이언이 움직이면서 등허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몸이라 미끄 러운 데다 잡을 털이 없어 균형 잡 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러다가 낙마,아니 낙묘할지도. 등자가 있다면 한결 편하겠지만 소환할 때마다 착용시킬 순 없는 노릇 이다.
차라리 타는 법을 익히는 게 빠르 다.
요령을 터득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라이언의 옆구리 중앙 부분에 약 간이나마 옴폭 파인 부분이 있어서, 거기에 다리를 넣고 허벅지에 힘을 주니 안정적인 자세가 되었다.
덕분에 강현은 제 발로 될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다른 벽에 다다르게 되었다.
“아까처럼 긁어.”
강현이 등에서 내림과 동시에 미라 이언이 절벽에 다가가 힘차게 앞발 을 휘둘렀다.
한데 이번에는 미라이언의 앞발이 벽 너머로 관통해서 들어가 버렸다.
빙고다.
예상대로 환각 같은 걸로 위장벽을 만들어 놓았었군.
미라이언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는 걸로 보아 위해를 가하는 능력은 없 는 듯했다.
강현은 미라이언의 소환을 풀어 소 환석을 회수한 후 벽으로 걸어 들어 갔다.
강현의 몸이 벽에 부딪치지 않고 벽 너머로 쑤욱 들어갔다.
벽 안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 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심연에 가까운 어둠 한가운데 푸르 스름한 빛을 내뿜는 석판이 있었다.
[축제에 참가하고 싶은 자,열쇠를 석판에 꽂아 넣어라. 그리하면 경계 너머로 갈 수 있으리니.]
석판 중앙에는 팔각형 모양의 홈이 있었다.
강현은 디벨롭에게서 얻은 팔각형 수정을 꺼내 들고 생각에 잠겼다.
'열쇠를 꽂으면 저쪽으로 이동할 때도 열쇠가 따라오는 걸까? 뭐 상 관없나. 디벨롭도 카니발에 갔다와 본 듯한 느낌이었어. 분명 열쇠가 없어도 복귀할 수 있는 구조겠지. 문제는 내전인데…… 뭐 나 없이도 잘하겠지. 공작파 마나 마스터를 3 명이나 제거해 줬으니.’
지금쯤이면 제국에서 내전이 시작 되었을 거다.
그러나 강현에게 참전할 의무는 없 다.
애당초 바르가스 공왕에게 언제든 지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는 약조 를 받아 냈었다.
내전에 참여하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내전 시작 전에 공작파의 마나 마스터를 3명이나 베어 냈으니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봐도 무방했 다.
서로 섭섭한 부분을 없을 거라 생 각한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김혜림이 다.
‘참 별난 녀석이었지.’
처음에 말도 거의 없을 때도 쉴 새 없이 말을 걸어 주었던 그녀다. 그 정도로 냉대했으면 떨어져 나갈 법도 한데 묵묵히 잘도 따라왔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따라오려 했을 까.
답은 알고 있다.
여태껏 말로 하면 싸구려처럼 느껴 질까 싶어 말을 아꼈을 뿐이다.
처음에는 동경의 마음으로 쫓아오 지 않았나 싶다.
아마 베킨스 던전에서 서든 트리를 홀로 상대하는 모습을 보며 동경을 느꼈을 거다.
당시에는 그녀도 새침데기였으니 이용하니 마니 하는 말로 얼버무렸 지만,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동경의 눈빛이었다.
그 이후에 동경의 마음이 호감으로 발전…….
후우,그만두자.
반한 이유 따윌 생각하는 건 촌스 러운 짓이지.
나도 왜 그녀가 마음에 들게 되었 는지 모르겠는데 남의 호감을 분석하려 들다니.
‘뭐,웬만하면 빨리 돌아오겠지만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연락 정도는 넣어 둘까.’
아공간 주머니에서 깃펜과 잉크, 양피지를 꺼내 편지를 썼다.
내용은 할 일이 있어서 언제 돌아 올지 모르는 길을 떠나니까,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전을 잘 처리해 두 고 건강히 지내라는 식으로 단순하 고 간략하게 썼다.
아,베개에 내 옷 입혀서 안고 자 지 말라는 내용도 적어 둬야겠군.
잉크가 말랐을 즈음,강현은 양피 지를 동그랗게 말아서 미라이언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곤 지도를 꺼내서 데이낙스 남 작가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남쪽으로 가서 데이낙스 남작에게 전해. 받을 사람 이름은 적어 뒀으 니까 편지만 건네면 알아서 보내 줄 거야.”
미라이언은 고개를 가우뚱거리며 의아해했다.
“냐아?”
편지를 전달하러 간 동안 강현은 카니발로 갈 것 아닌가.
자신은 어떻게 따라가야 되냐고 묻 는 것이었다.
강현은 아주 간단하게 해답을 내놓 았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부서지면 내
손으로 돌아오잖아.”
영구 소환석의 능력으로 미라이언
의 죽음시 소환석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미라이언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끼잉
“앓는 소리 말고 출발해.”
미라이언이 떠나고 난 뒤,강현은
팔각 수정을 석판에 끼워 넣었다. 석판에서 빛이 나오면서 허공에 마 나의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마치 던전에서 층을 이동할 때 나 타나는 마나 통로와 비슷했다. 강현은 가이아 대륙을 뒤로하며 마 나 통로 안에 발을 들였다.
*
빌로스 제국의 수도,샹데르 북쪽 에 위치한 처형장.
오늘은 비공식 처형이 예정되어 있 었다.
에르델 황녀를 포함한 몇몇 집무관 및 벤젠 기사단만이 처형식에 참가 했다.
잠시 후,죄수 몇몇이 처형장으로 끌려 들어왔다.
사형집행인들이 죄수들을 한 명 한 명 기둥에 묶었다.
기둥에 묶인 자들은 바로 리바시치 를 비롯한 황궁의원들이었다.
에르델이 양피지를 펼치고 그 안의 내용을 을었다.
“전 황궁의회장 리바시치 외 6명은 황족 암살 모의 및 반역자 무리와 내통했으므로 빌로스 제국 황가의 이름하에 화형에 처한다.”
모든 건 김혜림이 이루어 낸 일이 었다.
그녀는 강현을 제거하기로 한 작자 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집요한 수사 끝에 리바시치 가 공작파와 결탁하여 에르델과 강 현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를 잡아냈 다.
에르델은 사형수로 전락한 리바시 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말해 보세요.”
리바시치는 에르델이 아닌 그 옆의 김혜림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독한 년. 기어코 날 사형대에 올리고 마는구나.”
반역죄가 확정되기 직전.
김혜림이 내통 증거를 잡았다는 걸 알아첸 리바시치가 그녀를 회유하려 고 갖은 수를 썼다.
돈,지위,명예.
자신의 뼈를 깎아서라도 모든 걸 주겠노라 했었다.
허나 그녀는 독했다.
사형대에 묶인 지금도 리바시치는 김혜림의 집요함에 치를 떨었다.
그에 반해 김혜림은 시종일관 싸늘 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녀가 사형집행인이 들고 있던 횃 불을 낚아채 기둥 밑에 쌓인 장작 앞에 다가섰다.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보군요.”
김혜림이 에르델을 보았다.
사형을 집행해도 되겠냐고 묻는 것 이었다.
굳이 김혜림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으나 횃불을 든 것에서 그녀 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에르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행을 시작하세요.”
김혜림이 아무 망설임 없이 햇불을 놓았다.
기름을 흠뻑 먹인 장작에 불이 옮 겨 붙으면서 순식간에 불기둥이 치 솟았다.
불기둥 안에서 리바시치를 비롯한 황궁의원들이 몸부림쳤다.
기름진 몸이라 그런지 불길이 더욱 몸집을 부풀리며 타올랐다.
이로써 강현을 위협하려 들던 세력 의 일각을 정리했다.
형을 집행한 후,김혜림과 함께 형 장에서 나온 에르델은 김혜림의 눈 치를 보며 말했다.
“혜림 양,얼마 전에 강현 경에 대 한 소식이 새로 들어왔어요.”
“그는 무사한가요?”
“그게 말이죠. 크레인 공국에서 강
현 경에게 입국금지령을 내렸나 봐 요. 그 직후에 강현 경이 크레인 공 국의 어떤 자작가를 쳤다고 하네 요.”
“크레인 공국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있죠?”
“강현 경을 잡기 위해 병력을 파견 한 모양이에요.”
김혜림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 다.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지나 싶더니 이내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황녀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 요?”
“혜림 양이랑 저 사이에 부탁이랄 것까지 있나요. 신경 쓰지 말고 말씀하세요.”
“크레인 공국에 서신 하나만 띄워 주세요.”
“내용은요?”
“강현 씨한테 손끝이라도 건드리면 부숴 버리겠다고요.”
그저 위협용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 다.
지금의 김혜림에겐 그만한 권한과 힘이 있었다.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의 측근이자, 브리니아 공국의 마나 마스터로 부 상한 실력자,거기에 가이아 대륙 이세계인 중 최초로 여성 마나 마스 터가 되면서 기념할 만한 상징성을 띠게 된 김혜림이었다.
에르델은 한기를 느끼며 김혜림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당장 서신을 띄우도록 하죠.”
김혜림은 고개를 짧게 끄덕이는 걸 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돈? 지위? 명예?
다 필요 없다.
강현만 있으면 된다.
어릴 적부터 집안 사정이 좋지 않 아 많은 걸 포기해야 했던 그녀다. 벽지에 곰팡이가 가득한 집에 살아 도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계신다는 이유로 납득했었다.
물에 만 밥이 한 끼의 전부였어도 어머니가 고생하시는데 불평할 순없다 여겨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손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면서도 부 모님을 위해서 힘을 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걸 발견했다.
생전 처음으로 어리광이란 걸 부려 보았으며,고됨도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항상 옅은 막이라도 두른 듯 무감 각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미 그녀에게 있어 강현은 없어선 안 될 부분이었다.
만약 그가 돌아올 수 없는,혹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아니,그런 가정은 필요 없다.
이젠 그를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의 힘이 있으니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를 지켜 낼 거다.
이 세상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 도.
*
마나 통로를 지나면서 비틀렸던 시 야가 원래대로 복구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푸른색 과 붉은색이었다.
하늘은 푸른데,땅은 핏빛처럼 빨 갛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풀 한 포 기 없는 광활한 적색 대지.
청색과 적색의 대비가 분명한 탓에 면과 면이 맞닿는 지점에 서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카니발이란 이름이 붙은 것치곤 단출하군.”
조직이 카니발 출입을 관리한다기 에 도착하자마자 검문소가 있을 줄 알았다.
단순히 하위차원의 관리 능력을 믿 기 때문에 안 지은 건 아닐 거다. 차원을 이동할 때 도착하는 장소가 무작위라거나,카니발만의 환경적인 요소 때문에 짓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카니발의 환경을 정확하게 파 악할 필요가 있다.
근처에 마을 같은 게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중 멀지 않 은 곳에 커다란 봉분이 보였다. 봉분의 숫자는 3개.
봉분마다 동그란 입구가 있었다.
그 모습에서 천공섬에서 공략했던 던전을 떠올렸다.
“저번에 봤던 SS랭크 던전이랑 비 숫한 것 같은데……
일순 봉분 입구 안쪽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린 것 같았다.
잘못 본 건가.
아니,착각이 아니다.
무언가가 나오려 하고 있다.
잠시 후,세 개의 봉분에서 몬스터 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월월! 아우울!”
“쉬에엑.”
“크르르릉!”
2개의 머리가 달린 W여 마리의 들개,뱀들을 머리카락 삼아 달고 있는 여자,미스릴로 이루어진 은빛 몸체의 놀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튀 어나왔다.
각각 SS랭크의 방 하나를 이룰 법 한 몬스터들이다.
어쩐지 던전 같더라니.
여기 던전들은 기본적으로 몬스터 들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구조인 가.
보아 하니 기동력이 뛰어난 몬스터 들이 다수 섞여 있다.
등을 보이느니 싸우는 게 낫겠군. 강현이 빙백검을 뽑으려는 찰나였 다.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거기 가만히 있으십시오! 지금 도 우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