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쏴아아!
데운 물을 붓자 엉겨 붙은 땟물과 핏자국이 씻겨 내려갔다.
배수구로 구정물이 빨려 들어갈 때 마다 묘한 쾌감이 전해졌다. 씻으니까 좀 살 것 같다.
일부러 찜찜하게 지내는 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는군.
피부에 묻은 핏자국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욕실 문 너머에서 하녀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밀어 드리고 싶습니다. 허락 해 주십시오.”
아까부터 계속 방에 남아 봉사하려
고 안달이 나 있는 하녀였다.
나중에 떠난다고 해도 따라올 기세 였다.
이 정도면 반한 정도가 아니라 집 착 수준에 가깝군.
시험 삼아 걸어 본 스킬인데 이만 한 효과를 가져올 줄이야.
어차피 일주일 뒤에는 알아서 풀릴 테니 상관없으려나.
당장은 나탈리아에게 접근할 발판 으로 하녀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역시 등을 밀어 주는 건 필요 없어.
“알아서 씻을 테니 놔둬.”
“알겠습니다,주인님.”
“주인님이란 호칭도 그만둬.”
“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자기? 여보? 당신?”
“다이트 경이면 충분해.”
“아,처음부터 너무 친근감 있는 호칭은 부담스러우신가요. 아쉽지만 그걸로 참을게요.”
장장 1시간 동안의 긴 목욕을 끝 내고 나오자 다소곳이 서 있는 하녀 가 보였다.
강현은 하녀가 준비해 놓은 평상복 으로 갈아입으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줄리아라고 합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저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말씀해 드릴게요.”
“그건 별로.”
“매정하셔라. 그런 부분도 멋지셔 요.”
냉대를 해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 냐.
콩깍지가 쓰여도 단단히 쓰였군.
아니면 원래 취향이 그쪽이던가.
강현은 줄리아의 취향 따윈 제쳐 두고 정보 수집에 나섰다.
“나탈리아란 여자에 대해 아는 대 로 말해 봐.”
“나탈리아 아가씨라면 베니스 백작 님의 외동딸이에요. 나이는 을해 서 른둘이시고,어릴 때부터 명석하셔 서 가문의 대소사에 관여하시고는 했죠.”
“내가 보기엔 베니스 백작가의 실 권을 쥐고 있던 것 같던데 말이지. 그 부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싶 군.”
“실권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 지만,베니스 백작님이 무언가 결정 하실 땐 항상 나탈리아 아가씨의 의 견을 물어요.”
이걸로 나탈리아가 베니스 백작가 를 움직이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디벨롭과 나탈리아가 손을 잡고 있 다면 디벨롭이 이곳에 숨어 있던 것 도 해명되는군.
빌로스 제국이 내전으로 몸살을 앓 을 동안,베니스 백작가를 이용해 크레인 공국에서 힘을 기를 생각인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줄리아가 은근슬쩍 옆자리에 앉았 다.
강현은 턱짓으로 귀찮음을 표명했 다.
“떨어져.”
“죄,죄송해요. 어깨 정도는 주물러 드리고 싶어서 그만……
“시키는 것 외에는 하지 마.”
줄리아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 으로 급격히 실망에 잠겼다.
“네? 그럼 귀 파주기나,무릎베개 나,밤 시중도 시키기 전까지는 하면 안 되는 건가요?”
“필요 없어.”
“아! 안달 나게 하시려는 거군요. 반드시 참아 보겠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긍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가. 무섭군. 정말 필 요할 때 이외에는 사용하지 말아야 겠어.”
“무슨 말씀이세요?”
“별거 아냐. 그것보다 디벨롭은 언 제부터 여기서 지냈지?”
“디벨롭이 누구죠?”
“최근 두 달 내에 여기 도착한 빨 간 머리 청년.”
“손님 분들을 전부 아는 건 아니라 서요. 하녀들끼리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거든요.”
하긴 눈에 보이는 하녀 숫자만 해 도 수십 명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사람까지 합하면 더욱 많을 거다.
하녀들끼리도 초면인 자가 많은데 손님까지 일일이 다 기억할 리 없 다.
하녀 신분으로 손님의 이름을 물을 순 없는 노릇이니,모른다 해도 이 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디벨롭에 관한 건 나탈리 아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베니스 백작가와 디벨롭의 관계를 가장 자세히 알고 있는 자는 나탈리 아일 테니 말이다.
강현은 일부러 곤란하다는 투로 중 얼거렸다.
“나탈리아와 대화할 방법을 찾아야 되는데 어쩐다.”
“아가씨께 할 말이 있으세요?”
“급하게 드릴 말이 있는데 나 같은 녀석과 대화를 나누려 들지 몰라서 말이야. 누군가 도와주면 좋을 텐 데.”
매혹 걸린 여자 앞에서 곤란한 척 하기란 눈 먼 물고기에게 미끼를 흔 드는 것과 같다.
아니나 다를까,줄리아가 힘차게 손을 들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나탈리아 아가 씨와 만나게 해 드리기만 하면 되죠?”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보지?”
“그게 말이죠. 나탈리아 아가씨는 밤마다 자신의 방에 미남들을 불러 서 즐기는 취미가 있으세요. 저택 내에 다이트 경이 미남이란 소문을 홀리기만 하면 바로 호출하실 걸 요?”
강현은 침대 맞은편에 있는 거울을 보곤 괜히 고개를 45도 틀어 보았 다.
“나 정도면 평균보단 조금 나은 편 이겠군.”
“무슨 말씀이세요. 다이트 경 정도 면 대륙 최고 미남 수준이죠.”
매혹 스킬의 효과 때문에 과장해서 말하는 걸 거다.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외모라고 생각된다.
솔직히 내가 외모에 신경을 덜 써 서 그렇지 원본이 나쁜 편은 아니 다.
그러고 보니 김혜림한테서 잘생겼 단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나?
그 여자도 항상 좋은 말만 해 주 는 건 아니니,생각만 하고 입 밖에 는 내지 않는 거겠지.
강현은 자신을 평균에서 평균 이상 으로 평가하고 충분히 해볼 만한 작 전이라 여겼다.
“소문을 흘리도록 해.”
*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서 나탈리아 는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그녀는 항상 침실로 돌아오면 거울 부터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뚜렷한 이목구비 에 잡티 하나 없는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며 자기만족에 빠지는 게 그 녀의 일과 중 하나였다.
나탈리아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자 신의 모습을 감상하며 나르시시즘에 잠겼다.
“내가 봐도 참 아름답단 말이지. 오늘도 연회 내내 나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 어.”
나탈리아의 뒤에서 대기하던 하녀 들이 일제히 맞장구쳤다.
“모두가 나탈리아 아가씨의 아름다 움에 반한 것 같았습니다.”
“후후후,당연히 그래야지. 어떻게 얻은 미모인데 감히 누가 반하지 않 고 배기겠어? 그러고 보니 오늘 재 밌는 소문이 들리던데 말이야.”
“네,오늘 온 테라노 자작가의 기 사가 씻겨 놓고 보니 굉장한 미남이 란 소문이 있었습니다.”
“흐응? 그 피투성이 기사가 미남 이었다 이거지? 자작가가 몰락해서 갈 곳도 없겠다 딱 좋네. 당장 내 방으로 불러들여.”
*
“다이트 경,나탈리아 아가씨께서 찾으십니다.”
참 빠르기도 해라.
소문을 홀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 써 호출인가.
적어도 사나홀은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나로서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계속 방에서 대기하느라 좀이 쑤시 던 참이었는데 잘된 일이다.
강현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찾아 온 하녀를 따라나섰다.
베니스 백작가 안은 밤중에도 불을 훤히 켜 놔서 저택 곳곳이 대낮처럼 밝았다.
허나 하녀가 그늘진 길만 골라서 이동하고 있었기에 얼굴이 밝혀질 염려는 없었다.
백작가의 영애가 밤중에 미남을 골 라서 침실에 들이는 일이다.
대놓고 당당하게 벌일 일은 아니기 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안내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강현도 딱히 얼굴 가릴 일 없이 어둠 속에 묻혀서 이동할 수 있었다.
한참을 걷자 저택 구석에 위치한 별채에 도착했다.
하녀는 별채 2층에 있는 방으로 강현을 안내하곤 문을 열어 주었다.
“들어가시지요,나탈리아 아가씨께 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방 안엔 나탈리아 혼자 침대에서 옆으로 드러누운 채 강현을 기다리 고 있었다.
색기를 드러내기 위함인지 슬릿이 들어간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자태만 보면 관능적이라고 못할 것 도 아니었으나 이미 얼마 전에 서큐 버스 무리를 상대로 똑같을 경험을 했었던 강현이다.
끌리기는커녕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솟아났다.
강현이 침대 앞으로 다가가자 문이 닫히고 나탈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와요,다이트 경. 낮에 너무
쌀쌀맞게 대한 게 마음에 걸려서 불 렸어요. 섭섭하게 느끼셨다면 미안 해요.”
강현은 나탈리아와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한데 강현을 바라보던 나탈리아가 대뜸 미간을 좁히더니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게 굉장한 미남? 평범해 빠졌잖 아.”
노이즈 한 점 섞이지 않은 깨끗한 소리가 귀를 파고든다.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눈앞 에서 강력하게 부정당하니 썩 유쾌 하진 않았다.
나탈리아는 강현의 외모를 요모조 모 살펴보다가 이내 곧 눈을 동그랗 게 떴다.
실제로 마주한 적은 없어도 몽타쥬 를 통해 강현의 얼굴을 대강 알고 있을 터다.
뒤늦게 강현의 모습을 떠올리곤 화 들짝 놀란 것이었다.
그러나 나탈리아가 강현을 알아차 렸을 땐 이미 매혹의 효과가 발동한 후였다.
나탈리아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수 줍은 듯 이불로 드러난 다리를 가렸 다.
“저기 혹시 최강현…… 경 되시나 요?”
방금 내뱉었던 불만 가득한 목소리 는 온데간데없고 콧소리 섞인 목소 리를 내는 나탈리아였다.
참 아슬아슬하게도 효과가 걸렸다.
1초만 늦었어도 나탈리아가 시선을 거두며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나마 매혹이 제때 걸려서 일이 수월하게 되었다.
강현은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몇 가지만 묻겠다. 베니스 백작은 꼭두각시고 모든 전권은 네가 쥐고 있는 거지?”
“갑자기 그런 걸 물으시면 곤란해 요. 아,내가 정말 왜 이러지? 디벨롭이 강현 경은 적이라고 했잖아.”
매혹 스킬이 걸렸다고 무조건 복종 하는 건 아닌 듯하군.
하긴 모든 사람이 반한 사람한테 다 퍼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나탈리아의 경우 조건에 따 라 전부 얘기해 줄 태세였다.
나탈리아가 몸을 배배 꼬며 중얼거 렸다.
“좀 더 가까이 오시면 말씀드릴 수 도 있는데……
이토록 상대를 다루기 쉬운 스킬이 있을까.
이성에게만 걸 수 있단 제한이 있 긴 하다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효과 가 너무 좋다.
어째서 조직이 매료 스킬을 자주 활용했었는지 알 것 같다.
나탈리아에게 다가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겉모양뿐이라도 적과 노닥거릴 생각은 없다.
강현은 나탈리아의 바람을 역으로 이용했다.
“질문에 잘 대답하면 다가오는 걸 허락해 주지.”
“정말인가요?”
“네가 얼마나 대답을 잘 하느냐에 달렸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하겠어요. 분명 아버님이 꼭두각시냐고 물으셨 죠? 네,맞아요.”
매달리는 상대를 다루는 데엔 이골
이 나 있다.
매혹에 걸린 여자를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리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 다.
강현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다가오 려는 나탈리아에게 경고성 멘트를 날렸다.
“누가 다가와도 좋다고 했지?”
“네? 원하시는 대로 대답해 드렸는 데 안 되나요?”
“분명 얼마나 대답을 잘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했었지. 멋대로 구는 게 마음에 안 드는군. 이만 돌아갈 까.”
“하,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돌아간다고 했을 텐데.”
“아는 건 전부 말씀 드릴게요. 부 디 절 혼자 두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만 봐 주도록 하지. 베니스 백작가가 어떤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말해 봐.”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씀 드리자 면……
나탈리아는 혹여나 강현에게 미움 을 살까 봐 가진 정보를 모조리 실 토했다.
원래 나탈리아에겐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수 년 전 크레인 공국 왕비 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전부터 몸이 약했던 공왕 이 세상을 뜨면서 왕비가 낳은 다섯살배기 어린아이가 왕위를 이어 받 게 되었다.
왕이 너무 어리다 보니 왕비가 대 리청정을 하게 되었고,더불어 베니 스 백작가가 득세하게 되었다.
왕궁의 모든 중역들은 베니스 백작 가의 혈통으로 채워졌으며,나탈리 아는 예전부터 계획을 세워 아비인 베니스 백작을 탐욕에 젖게 만들어 자신이 암중실세가 되었다고 한다.
디벨롭이 나타난 건 그 뒤의 일이 었다.
나탈리아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예전의 저는 굉장한 추녀였어요. 권력을 쥐면 나아질까 싶었지만 절보는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죠. 항상 모자에 두꺼운 망사를 달아서 얼굴 을 가리고 다녀야 했어요.
그러던 차에 만난 게 디벨롭이에요. 디벨롭 은 자기가 살던 원래 세계의 기술로 아름다움을 갖추게 해 주겠다고 했 었죠. 실제로 그가 데려온 사람의 기술에 보구의 힘까지 더해서 지금 의 아름다움을 가지게 되었고요.”
“아름다움을 얻게 해 준 대가로 디 벨롭에게 협조하기로 한 거였나.”
“네,그 말씀대로예요.”
암중실세가 된 것도, 디벨롭에게 협력하는 것도 전부 추녀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거다. 나탈리아는 자신의 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황홀함에 잠겼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죠. 지금의 전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미녀 가 되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이제야 알 것 같다.
낮에 투구를 벗었을 때 노려봤던 건 내 정체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자 신의 미모를 몰라봐서 그런 거였군. 나르시즘도 이 정도면 병이다. 동의를 구하는 질문에 강현이 내놓 은 대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추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