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디벨롭이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강 현에게로 다가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그가 베니스 백작과 연관이 있을 거라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아예 베니스 백작가 안에서 지내고 있을 줄이야.
차라리 지금 검을 뽑아 제압할까?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죽이기만 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이 라도 할 수 있지만 그러자고 여기까 지 온 게 아니다.
디벨롭을 궁지에 몰아 웨이브의 진 실에 대해 토해 내게 만들어야 했다.
아직은 검을 뽑을 때가 아니다.
강현은 고개를 살짝 숙여 투구 안 에 그늘을 만들었다.
동시에 강현을 안내하던 베니스 백 작의 기사들이 디벨롭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디벨롭 씨. 이전에 언급하신 최강현이 끝내 밀 입국했다고 합니다. 공국 남부의 테 라노 자작께서 놈을 잡으려다가 변 고를 당한 모양입니다.”
디벨롭은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예상대로군. 녀석이라면 밀입국 정도야 어렵지 않게 했겠지. 베니스 백작님께 바로 보고 드려라. 나도 중요한 일만 처리하고 가도록 하 지.”
“예의 그 지저감옥 건을 처리하러 가십니까?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 다.”
“신세지는 마당에 이 정도는 해야 지. 그렇게 알고 나중에 프랑이 날 찾으면 지저감옥에 갔다고 전해 주 게.”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 오.”
눈앞에 있는 자가 강현이라고는 상 상도 못하는지 그대로 지나치는 디 벨롭이었다.
디벨롭의 위치를 확인한 것만으로 도 큰 수확이다.
강현은 디벨롭이 사라진 걸 확인하 자마자 기사에게 물었다.
“방금 그분은 누구십니까?”
“자네는 알 거 없네. 그보다 아까 부터 다리를 절뚝거리던데 부상이라 도 입었나?”
“최강현 그놈과 싸울 때 부상을 입 었습니다. 참을 만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홈,이제부터 베니스 백작님을 될 테니 놈에 대해서 최대한 상세하게 보고하게. 그다음에 치료를 받도록 조치해 주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하는 와중에도 건물 곳곳을 둘러보았다.
저택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3, 4층짜리 건물이 W채 가까이 지어져 있는데다,정원에는 각종 진 귀한 동물들이 뛰놀고 있었으며,베 니스 백작을 본 따 만든 것으로 추 정되는 황금상까지 세워져 있었다. 이내 곧 도착한 저택 본채는 더더 욱 가관이었다.
외벽은 황금으로 도금을 해 놨으 며,기사와 병사들은 금박을 씌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이쯤 되면 화려하다기보단 번잡스 러을 정도다.
강현은 기사들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굵다란 기둥이 늘어선 홀을 지나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문 안에선 음악 소리와 술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을 지키던 또 다른 기사들이 용 건을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최강현이 공국에 밀입국했다더군.
벌써 지방의 자작가 하나를 몰살시 킨 듯하네. 베니스 백작님은 바쁘신 가?”
“지금 연회 중이시네. 초대 손님 이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 네.”
“그래도 최강현의 입국 사실은 최 우선으로 보고하라고 하셨잖나. 보고 를 미루면 나중에 화를 내실 걸세.”
“후우,이러면 이런다고 화내고,저 러면 저런다고 화내고.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원.”
“문제가 발생해서 경을 치는 것보 단 미리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
“뭐 틀린 말은 아니구만. 일단 여 쭤 보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게나.”
문을 지키던 기사가 안으로 들어갔 다가 수분 후에 다시 나왔다.
“들이라고 하시는군. 정확히는 나 탈리아 아가씨께서 들여보내라고 허 락해 주셨지만 말이야.”
“아가씨께서 안에 계신가? 그렇다 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 자네, 따라오게. 지금부터는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조금이라도 베니스 백작님의 기분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면 바로 목이 달아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문이 열리면서 안으로 들어가는 길 이 열렸다.
연회장 안은 그야말로 사치의 집대 성이었다.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샹들리 에마다 불이 켜져 있는 데다,테이 블마다 술을 채운 잔으로 탑을 만들 어 놨으며,연회장 안에 풀장까지 만들어 놔서 귀족들과 미녀들이 노 닐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진한 향내와 술 냄새.
그 틈을 지나 연회장 가장 안쪽의
단상으로 향했다.
단상 위에는 비대한 몸집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얼마나 비대했는지 눈꺼풀까지 살 이 쪄서 눈조차 제대로 못 뜨고,목 살이 겹치다 못해 탄력을 잃고 홀러 내리고 있다.
비대한 몸집을 앉히기 위해 특수제 작 된 듯한 의자는 3인용 크기였으 나 그마저도 작아서 삐걱거렸다. 아무리 봐도 한 나라를 좌지우지하 는 실세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돼지 한 마리가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 돼지가 바로 베니스 백작이었다.
강현과 기사들은 돼지,아니 베니 스 백작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헌데 정작 베니스 백작은 눈만 끔 뻑거리며 가만히 있고,대신 백작의 옆에 있는 아리따운 여성이 입을 열 었다.
“최강현이 밀입국했다죠? 거기 있 는 기사 분이 테라노 자작가의 기사 인가요?”
아까 입구에서 기사들이 나탈리아 아가씨란 이름을 언급했었다. 아가씨란 호칭으로 추측컨대 베니 스 백작의 딸인 듯하다.
베니스 백작은 가만히 있고 그의 딸이 대신 대답을 하고 있군.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말이지. 강현은 적당히 이름을 꾸며 내고 인사를 올렸다.
“테라노 자작가의 다이트라고 합니 다.”
“다이트 경,정말로 자작가를 습격 한 게 최강현이었나요?”
“푸른 검신을 들고 있는 자가 마나 블레이드를 사용하며 저희를 유린했 습니다. 테라노 자작님은 놈의 무위 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우시 다가 그만……
강현이 애통함을 머금으며 신들린 연기를 펼쳤다.
하나 나탈리아는 변방 귀족의 죽음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양 강현의 말을 잘랐다.
“이상하네요. 상대가 마나 마스터 인 걸 알면서도 덤볐다고 하셨나 요?”
의심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날아든 다.
강현의 밀입국보다는 변방 귀족의 기사가 혼자 살아남아 보고하러 온 것 자체를 의심했다.
당장이라도 투구를 벗길 기세다.
하나 강현은 철저하게 포커페이스 를 유지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나 탈리아를 납득시킬 말을 늘어놓았 다.
“사실은……
데이낙스 남작과 테라노 자작이 최
강현을 잡으려고 수작을 부렸고,그 과정에서 최강현에게 마나 억제제를 먹이는데까진 성공했다.
그러나 얘기지 못한 반격에 당해 전멸했다는 저간의 사정을 알렸다. 실제로 벌어진 사실에 약간의 각색 까지 더하자 누가 들어도 납득할 만 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허나 나탈리아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초리로 강현을 내려다보았다.
“사정은 알겠어요. 하지만 대책을 짜기 전에 그대의 태도부터 지적해 야겠군요.”
“태도라시면……?”
“어느 안전이라고 아직까지 투구를 쓰고 있죠? 상급자에게 보고를 할 땐 얼굴을 내비쳐야 한다는 건 신입 기사도 알고 있는 기본적인 예의일 텐데요?”
어떻게든 강현의 모습을 확인하려 는 나탈리아였다.
반면 베니스 백작은 아무래도 좋다 는 듯 하녀가 먹여 주는 음식만 덥 석덥석 먹고 있었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이쯤 되면 확신할 수 있다.
실제로 베니스 백작가를 움직이고 있는 건 베니스 백작이 아니다. 베니스 백작의 딸인 나탈리아가 움 직이고 있는 게 분명하다.
강현은 서슴없이 손으로 투구를 잡 았다.
“흉측한 몰골이라 백작님의 눈을 더럽힐 거라 여겨 벗지 않았습니다. 짧은 생각으로 불편함을 드려 죄송 합니다.”
투구를 벗자 말라붙은 피로 엉망진 창이 된 장발과 수염이 드러났다.
일전에 변장 도구를 이용하여 본래 얼굴을 감춰 두었다.
기껏해야 몽타쥬로 강현의 인상을 접한 정도로는 구별할 수 없는 수준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탈리아는 계 속 세세하게 뜯어보길 멈추지 않았 다.
설마 이만한 분장임에도 들킬 것인 가.
분명 초면일 텐데도 강현을 바라보 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는지 이내 곧 나탈리아가 눈길을 거두며 말했다.
“사정은 알겠어요. 공국 내 영지에 새로이 공문을 날리고 추적대를 파 견하도록 하죠. 그대는 부상이 심한 듯하니 저택 의료실에서 치료를 받 도록 하세요.”
“아가씨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드 립니다.”
“됐으니 이제 물러나도록 하세요.”
설마 눈앞에 있는 자가 그토록 경 계하던 강현이란 것도 모른 채 그대 로 돌려보내고 있었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작전 덕분에
강현은 당당히 베니스 백작가 안에 머무를 자격을 얻게 되었다.
*
“여기가 아픈가?”
저택 내의 의료실에서 의사가 강현 의 다리를 건드리며 한 말이었다. 강현은 적당히 아픈 척을 하며 환 자 행세를 했다.
“조금 아프군요.”
“뼈가 부러진 것 같진 않고 단순한 타박상이구만. 남부에서 여기까지 말을 타고 올 정도면 심한 부상은 아닌 듯하네.”
“그렇습니까?”
“포션까진 필요 없겠어. 일단 하루 쉬어 보고 그래도 아프면 다시 오 게.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좀 씻고 오지 그랬나.”
의사는 손가락으로 코를 막으며 손 을 휘저었다.
냄새 때문에 진료도 대충한 감이 적잖이 있었다.
여기까지 계산한 건 아니지만 덕분 에 진료에 시간을 뺏기는 일은 없었 다.
의료실에서 나오자 강현을 안내해 주던 기사들 대신 하녀 한 명이 기 다리고 있었다.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절 따라 오십시오.”
“기사들은 돌아갔나 보군.”
“예,자리를 오래 비울 순 없으시 기에 제게 안내를 맡기고 돌아가셨 습니다. 다리는 괜찮으신지요?”
“아직 조금 불편해서 그런데 부축 해 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제 어깨에 팔을 두르 십 시오.”
강현은 하녀의 부축을 받으며 숙소 로 향했다.
절뚝거리는 연기를 계속하며 걷는 가운데 머릿속으로 갖가지 계산에 들어갔다.
무기력한 모습의 베니스 백작.
백작가 내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듯한 나탈리아.
태연하게 베니스 백작가의 식객으 로 들어앉아 있는 디벨롭.
디벨롭을 몰아세울 작전을 세우기 전에 알아보아야 할 게 있다.
누가 디벨롭과 손을 잡고 있는 건 지,디벨롭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려 고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모든 핵심은 나탈리아가 쥐고 있을 듯하다.
‘이번 일에는 매혹 스킬이 적격일 것 같군.’
나탈리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 다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얻 어내는 건 물론이고,디벨롭을 몰아 세울 수 있는 작전에 이용할 수 있 을지도 모른다.
실전에 돌입하기 전에 매혹 스킬의 효과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매혹을 걸면 그저 반하는 정도로만 반하는 건지,뭐든 해 줄 기세로 홀 딱 빠지는 건지 모르겠다.
연습 삼아 한 번 써 보고 싶은데 말이지.
마침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하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자신이 머무를 방에 도착한 강현은 하녀의 어깨에 두른 팔을 풀 었다.
하녀는 할 일을 다한 양 물러나려 했다.
“쾌차하실 때까지 여기서 머무르시 면 됩니다. 찝찝하실 터이니 바로 데운 물을 올리겠습니다.”
강현은 물러나려는 하녀에게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하녀의 턱을 살짝 올렸다.
“잠깐 기다려.”
하녀는 영문을 몰라 멀뚱히 서선 눈을 깜빡였다.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강현과 하녀 의 눈이 마주쳤다.
1초,2초,3초.
순식간에 3초가 지났다.
이걸로 매혹 스킬이 걸린 거려나. 겉으로 드러나는 스킬이 아니다 보 니 긴가민가했다.
스킬의 효과는 금방 확인할 수 있 었다.
별안간 하녀가 강현의 품에 안기며 홍조를 띤 얼굴로 말했다.
“저기,혹시 개인 시종이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효과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