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하는 플레이어-124화 (124/381)

124화

빌로스 제국 상데르.

황궁 뒤편에 자리 잡은 연합기사단 훈련장에선 김혜림이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피잉!

시위를 떠난 화살이 매섭게 허공을 가르며 과녁 정중앙에 적중했다. 보통은 한 호흡에 한 발씩 쏘는 게 기본인데 김혜림의 활에는 벌써 다음 화살이 걸려 있었다.

첫 발을 시작으로 연이어 쏘아지는 화살들.

모든 화살들이 빨려 들어가듯 모조 리 과녁 정중앙에 꽂혔다.

화살통 하나가 빌 때 즈음,김혜림 이 활을 아래로 내리고 호흡을 정리 했다.

“후우.”

언제 왔는지 뒤편에서 빅터가 다가 왔다.

“혜림 양,시간 괜찮으십니까?”

김혜림은 매처럼 날카롭던 눈매를 풀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이참,또 그러신다. 직급은 빅터 경이 더 높잖아요. 전달사항이 있으 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강현이 자리를 비우면서 부단장인 빅터가 벤젠 기사단의 지휘권을 맡 고 있었다.

굳이 김혜림에게 시간 되냐고 물을

것 없이 할 말이 있으면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 다.

'혜림 양,웃고 있긴 한데 입만 웃 고 있는데요? 솔직히 단장님의 출장 이 연장된 이후부터 무서워 죽겠어 요.’

금방 복귀할 줄 알았던 강현이 크 레인 공국으로 가 버렸다. 위험하기도 위험하거니와 언제 돌 아올지조차 알 수 없다.

차라리 우울해하기라도 하면 독려 라도 해 줄 텐데 오히려 더 분발하 고 있다.

웨이브가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항 상 훈련장에 와서 활을 쏜다.

김혜림 때문에 갈아치운 과녁만 수 십 개는 되며,손가락에 끼는 골무 를 셀 수 없이 바꾸었다.

활을 쏠 때면 어찌나 집중하는지 감히 말을 붙이기가 무서울 지경이 었다.

빅터는 마른침을 삼키고 용건을 꺼 냈다.

“브리니아 공국에서 연락이 왔습니 다. 전하께서 공국에 복귀할 것 없 이 여기서 대기하라더군요. 내전을 대비해서 벌써 3천의 선발대가 출발 했고,네베르 경…… 아니 네베르 백작님이 장군으로 봉해져서 2만의 병력을 소집할 예정이랍니다.”

“잘됐네요. 내전이 벌어지면 우리

도 참가하게 되겠네요. 그것보다 내 전 중에 발생하는 웨이브는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졌나요?”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더군 요. 그냥 급한 쪽이 처리하거나 아 예 방치하는 쪽으로 갈 것 같습니 다.”

“어쩔 수 없죠. 서로 웨이브에 병 력을 투자하긴 싫을 테니까요. 그보 다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것처 럼 보이네요.”

“사실 이쪽이 본론입니다. 황궁의 회에서 우리더러 드리안 공작가에 다녀오라더군요.”

“드리안 공작가에는 왜요?”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를 겁니다.”

빅터가 황궁의회에서 내려 보낸 공 문서를 건넸다.

드리안 공작에게 내전준비를 중단 하고 즉시 황궁의 소환에 응하라는 마지막 경고를 전하란 내용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명성이 높은 기사단 이면 드리안 공작도 못 건드릴 거란 의미에서 지시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벤젠 기사단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려는 수작이 숨 어 있을 거다.

김혜림은 화살통의 화살을 뽑아 들 며 시위에 걸었다.

그녀는 과녁에 시선을 둔 채로 입 을 열었다.

“거절하세요.”

“거절하면 황궁의회에서 노발대발 할 겁니다.”

“하라죠,뭐.”

“거절한다 하더라도 적당한 핑곗거 리가 있어야 할 텐데요. 아직은 황 궁의회 직속 소속이잖습니까.”

“연합 기사단을 탈퇴하면 될 일이 에요.”

“네?”

“어차피 급한 건 황궁 쪽 아닌가 요? 하워드 경과 오브렌 경을 잃은 마당에 우리 기사단까지 적으로 돌 릴 용기는 없을 테죠. 그것보다 에 르델 황녀님께 시간되시냐고 물어봐 주세요. 드래코프 황자와 황궁의회를 정리해 버릴 작전을 짜야겠어 요.”

“그 얘긴 단장님이 복귀하신 다음 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 다만.”

“언제 돌아올 줄 알고요? 등 뒤에 적을 두고 전쟁을 벌이고 싶진 않아 요. 정리할 수 있을 때 정리해야죠. 애당초 강현 씨가 크레인 공국까지 간 건도 그 노인네들이 쓸데없는 계 책을 짰기 때문이잖아요.”

말을 마친 김혜림이 쥐고 있던 활 시위를 놓았다.

어느덧 화살에는 궁수 계열 마나 마스터의 상징인 마나 애로우가 부 여되어 있었다.

화살은 허공을 찢어발기듯 강한 파 공음을 내며 과녁에 적중했다.

과지직!

과녁이 산산 조각나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김혜림은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 를 띤 채로 입을 열었다.

“쓸어버려야 하는 사람들은 미리 쓸어버리죠.”

제국과 공국들의 웨이브를 공략해 야 하는 의무,벤젠 기사단 단독 체 제인 연합 기사단,기여도가 높은 사람에게 보상을 몰아준다는 성과주 의 규칙.

갖가지 상황들이 종합된 결과,두 달 만에 6회의 웨이브 공략이라는 비정상적인 강행군이 계속되었다. 벤젠 기사단의 인원이 6명으로 줄 어드는 피해가 있었지만,그에 반비 례하여 김혜림의 능력은 급성장했 다.

강현조차도 웨이브 공략 숫자는 4 회밖에 안 된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 나 대단한 성과인지 알 수 있었다. 그 결과,최초의 여성 이세계인 마 나 마스터가 된 김혜림이었다. 직위는 빅터가 위였지만 그건 어디 까지나 김혜림이 단장 대리 역할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 었다.

빅터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겨우겨우 입을 뗐다.

“이,일단 에르델 황녀님께 말씀드 려 보겠습니다.”

*

강현은 테라노 자작가 기사의 복장 으로 말을 타고 이동했다.

크레인 공국의 수도를 향해 달리는 동안 몇 번이나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피에 절은 복장으 로 쉴 새 없이 말을 재촉하고 있으 니 시선이 쏠릴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건 쳐다보기만 할 뿐 수상하게 여기는 눈길은 없다는 점이었다.

대부분의 반응이 ‘남쪽 지방에서 큰일이라도 생겼나 보다’ 하는 수준 에서 그쳤다.

중간 중간에 말을 쉬게 하려고 멈 출 때마다 해당 영지의 병사며,영 지민들이 고생한다며 되려 음료와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는 일이 생기기 도 했다.

그렇게 밤낮 없이 달리다 보니,본 래 일주일이 걸릴 거리를 사흘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크레인 공국의 수도 아텐.

아텐에 들어선 강현은 거리 풍경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조촐하군.”

비록 공국이라지만 한 나라의 수도 치고는 거리가 너무 더럽고 피폐했 다.

거리는 활기를 잃은 지 오래인듯 골목마다 부랑자가 넘쳐흘렀으며, 거적때기를 짊어진 여인들과 이 빠 진 사발을 들고 구걸하는 아이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죽은 생선마냥 생기 없는 눈빛을 띠고 있어,마치 공동묘지 한복판을 지나는 착각이 들 지경이 었다.

허나 도시 외곽을 지나 도시 중심 부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180도 달 라졌다.

도로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건물의 높이가 2, 3층 이상 높아졌 으며,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이 한층 더 고급스러웠다.

도시 외곽이 빈민가,도시 중심부 가 부유층이 사는 곳으로 나뉘어 있 는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암묵적으로 구획이 나뉘 어 있는 듯했다.

그를 반증하듯 번화가에 들어온 거 지 몇 명이 병사들에게 두들겨 맞으 며 쫓겨나고 있었다.

“냄새나는 것이 어딜 들어와? 썩 꺼지지 못해?”

“아이쿠! 경비병 나리,실수입니다, 실수! 한번만 봐주십시오.”

“퉤,창대만 더러워졌군.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그 더러운 낯짝을 뭉 개 버릴 테니 그리 알거라.”

병사들의 경고와 달리 거지들은 이 미 한참 두들겨 맞은 후였다.

얼굴은 부어올랐고,다리를 다쳤는 지 절뚝거리며 빈민가로 돌아가는 거지들이 었다.

번화가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즐기 듯이 지켜보고는 했다.

미쳤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 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속은 썩어 문드 러진,허영심으로 가득 찬 거리였다.

데이낙스 남작이 왜 이 나라를 바 꾸고 싶어 했는지 알겠군.

누구라도 이런 미친 나라를 긍정하

고 싶진 않겠지.

강현은 슬슬 거지에게 쏠렸던 시선 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느꼈다.

피투성이가 된 기사 복장.

주변인들의 눈길에는 이물질을 보 는 양 불쾌함이 섞여 있다.

강현은 말고삐를 내리치며 속도를 높였다.

“이랴.”

계획은 단순했다.

테라노 자작가 기사인 척하고 베니 스 백작가에 잠입한다.

거기서 강현이 크레인 공국에 침입 하여 테라노 자작가를 몰살시켰다는 보고를 올릴 예정이다.

겉모습이라면 걱정할 것 없었다.

무엇 때문에 피가 고인 갑옷과 투 구를 걸쳤겠는가.

얼굴이며 몸 곳곳에 피가 덕지덕지 눌어붙어,어딜 봐도 급박하게 달려 온 패주기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시 중심부에서 베니스 백작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크레인 공국의 왕궁에서 얼마 떨어 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저택이 세워 져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크기만 하더라도 왕 궁 못지않으며,저택에 들어가는 입 구에 해자를 파고 도개교까지 설치 해 놓았다.

본디 귀족들은 왕궁보다 돋보이는 건물을 지어선 안 된다.

한데 그러한 암묵적인 금기를 서슴 없이 어기고 있는 것만 보아도 베니 스 백작의 위세를 알 수 있었다. 베니스 백작의 저택 안으로 이어지 는 도개교 앞에는 사람들이 기다란 줄을 이루고 있었다.

강현이 다가가자 줄을 관리하던 문 지기들이 창대를 들이댔다.

“멈춰라! 어디서 온 놈이냐!”

꾀죄죄하다곤 하나 기사의 복장을 하고 있는 강현이다.

그런데 고작 문을 지키는 병사가 대뜸 놈이라 불러?

정승집 개는 양반도 문다더니 딱 그 꼴이다.

강현은 목을 가다듬으며 다급한 척

연기를 펼쳤다.

“남부 지방 테라노 자작령에서 온 기사이니라. 베니스 백작님께 시급 히 전달할 소식이 있으니 얼른 길을 터라!”

“테라노건 뭐건 그건 내 알 바 아 니고 들어가고 싶으면 절차부터 거 치셔야지.”

문지기가 길게 늘어서 있는 줄을 가리켰다.

늘어서 있는 자들의 대부분은 상인 이나 기사들이었으며,개중에는 귀 족도 더러 섞여 있었다.

다들 베니스 백작에게 굽실거리기 위해 모인 자들이었다.

문지기는 손가락으로 슬쩍 동그라

미를 만들었다.

“정 급하면 들여보내 주지. 대신 힘을 좀 써야 되는 일이라서 이게 필요하지만 말이야.”

왜 문지기들이 이리 기세등등한지 알겠다.

귀족이건,기사건 할 것 없이 들여 보내 달라고 부탁을 받아 보니 콧대 가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강현은 순순히 돈을 낼 생 각은 추호도 없었다.

“너희들과 장난칠 시간 없다. 최강 현이 공국에 나타났단 말이다. 얼른 베니스 백작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 해라!”

“최강현? 그건 또 누군데?”

세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전혀 모르는 듯했다.

매일같이 방문자들에게 돈 뜯어낼 생각만 하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 를 수밖에.

이래서야 말로 해결하는 건 무리겠 군.

차라리 두들겨 패는 편이 빠르겠 다. 무식한 개한테는 몽둥이가 약이 지.

강현이 말에서 내리고 빙백검을 검 집째로 휘둘렀다.

빠각! 빠각!

뭉툭한 검집이 두 문지기의 얼굴을 후려 됐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 문지기의

고개가 홱 돌아가며 누런 이빨이 우 수수 뿜어져 나왔다.

두 문지기가 눈이 반쯤 돌아간 채 로 몸을 가누지 못하며 해자에 빠졌 다.

풍덩!

문지기들과의 소란을 감지했는지 도개교 안쪽에 있던 기사들이 뛰쳐 나왔다.

기사들은 각자의 무기에 마나를 부 여하며 강현을 위협했다.

“네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소란 을 피우느냐!”

강현은 능청스럽게 예를 갖추며 말 했다.

“남부 지방의 테라노 자작님의 기

사입니다. 최강현이 밀입국했음을 알리려고 시급히 달려온 참입니다.”

그나마 기사들은 기본적인 정보 정 도는 갖추고 있는지 놀란 반응을 보 였다.

“최강현이 밀입국했다고? 그거 큰 일이군. 테라노 자작가의 기사라 했 나? 모습을 보아하니 상당한 전투가 있었나 본데……

“네. 놈을 잡기 위해 테라노 자작 님이 몸소 병력을 이끌고 나섰지 만…… 크흑,놈의 무자비한 검날 에……

“이런. 내 뭐라 할 말이 없군. 문 지기들의 무례는 내 나중에 따로 벌 을 내리겠네. 일단 따라오게. 베니스백작님께 안내하겠네.”

소란을 일으키면 윗선 사람들이 나 올 거란 것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기사급 정도 되면 강현의 등장이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지 알 것이기 에 거침없이 문지기들을 두드려 패 서 기사들을 끌어낸 것이었다. 강현은 기사들을 따라 걸으며 일부 러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척했다. 기사들을 따라 베니스 백작 저택 안으로 들어섰을 때.

지나가던 붉은 머리 사내가 멈춰 서며 기사들을 불러 세웠다.

“그 친구는 누구지? 모습을 보니 상당히 다친 것 같군.”

머리색이며 외모에 눈에 익다.

그렇다.

붉은 머리 사내는 바로 디벨롭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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