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설마 데이낙스 남작이 배신을 한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데이낙스 남작 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르르 몰려온 남작의 병사들이 상 황을 알렸다.
“테라노 자작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남작님을 찾고 계십니다.”
강현의 존재를 깨닫고 온 게 아니 라 데이낙스 남작을 찾아온 것이었 다.
데이낙스 남작은 저택 뒷문으로 나 온 늙은 하녀에게 강현의 안내를 맡 겼다.
“손님을 방으로 안내하고 먹을거리 와 데운 물을 드리도록 해라.”
“그리하겠습니다,남작님.”
“강현 경,옆 영지의 자작께서 방 문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말고 푹 쉬 게. 이야기는 나중에 합세.”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늙은 하녀 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 다.
저택 내부는 건물 외견만큼이나 허 름했다.
금이 가 있는 괘종시계,세월의 흔 적이 남아 있는 호리모양 화분,양 초가 꽂혀 있지 않은 촛대.
밤에는 달빛에 의지하여 걸을 수밖 에 없는 저택이었다.
강현은 늙은 하녀를 따라 걷다가 창틀에 검지를 스윽 훑었다. 손가락에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 는다.
모자람이 가득할지언정 청결함은 유지되고 있었다.
청결은 집주인의 됨됨이를 대변하 기도 했다.
강현은 데이낙스 남작의 평소 성격 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강현을 안내하던 늙은 하녀는 1층 복도 끝에 있는 방 앞에서 멈춰 섰 다.
“머무르시는 동안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바로 음식과 데운 물을 가 져다 드릴지온데 가리시는 음식은 있으신지요?”
“없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간단한 음식이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 다.”
늙은 하녀가 물러나면서 강현 홀로 방 안에 들어섰다.
방 안의 물건은 침대와 책상,잉크 가 반쯤 담긴 병과 깃펜이 전부였 다.
창문 덮개가 닫혀 있어 방 안이 너무 어두웠다.
강현은 로브를 벗고 창문 덮개를 살짝 열었다.
은은한 달빛이 들어오는 가운데 정 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정원에선 다수의 병사를 몰고 온 중년 사내와 데이낙스 남작이 대화 를 나누는 중이었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어렴풋이 대 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슬며시 창문을 열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밤이 늦었습니다,테라노 자작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시는 게 어떻 겠습니까?”
“말 돌리지 말게! 빌려간 600골드 는 언제 갚을 건가!”
“600골드라니……. 얼마 전에 영지 동쪽 땅 일부분으로 절반을 변제했 잖습니까. 300골드여야지 어째서 600골드입니까?”
“100골드밖에 안 되는 땅이었으니
100골드만큼만 차감한 걸세. 불만이 라도 있나?”
“아니…… 후우,어떻게든 돈을 마 련해 보겠습니다. 저,테라노 자작 님.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라는 걸 알지만 돈을 조금만 더…… 맥락상 데이낙스 남작이 무엇을 말 하려는지는 뻔했다.
돈을 더 빌려 달라는 말이 나오기 도 전에 테라노 자작이 주먹을 휘둘 렀다.
퍼억!
“우욱!”
테라노 자작이 휘두른 손을 툭툭 털면서 인상을 썼다.
“데이낙스. 대개 사람이라면 염치 라는 걸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 하지 않나? 있는 빚도 못 갚는 처 지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 지.”
제아무리 작위 차이가 있더라도 귀 족 간에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 다.
하나,테라노 자작의 행동은 뒷골 목 건달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지금과 같은 행동이 가능한 건 변두리의 영지이기 때문이리라. 귀족의 세계란 건 중앙정권에서 멀 어질수록 체면 차리는 사람이 적어 진다.
거기에 돈 관계까지 얽혀 있으니
더욱 거칠게 나오는 것이다.
테라노 자작은 몸을 가누는 데이낙 스 남작에게 다가서며 경고하듯 말 했다.
“사흘 주지. 사흘 안에 600골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네 영지의 물레 방아 관리권을 3년간 양도 받겠네.”
“설마 물레방아 이용료를 올려 서…… 안 됩니다. 안 그래도 흉년 이 들어 고생 중인 영지민들에게 더 한 고생을 시켜선 안 됩니다!”
“나로선 변제 받을 권리가 있지. 마음에 안 들면 사흘 뒤까지 빚을 갚으면 될 일 아닌가? 그럼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일방적으로 약속을 밀어붙인 테라 노 자작이 타고 온 마차에 도로 올 라탔다.
테라노 자작과 그의 병사들이 물러 난 후에도 한동안 저택 안에 어수선 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늙은 하녀가 음 식을 담은 쟁반을 가져왔다.
“물을 데울 때까지 시간이 걸리니 먼저 요기부터 하시지요.”
쟁반 위에는 보리빵과 콩을 갈아 끓인 스프가 전부였다.
어지간한 여관도 이보단 잘 나올 거다.
그러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데이낙 스 남작가의 형편을 고려했을 때, 이만큼 챙겨 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이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아 몇 입 베어 먹고,스푼을 몇 번 움직인 것만으 로도 그릇이 비었다.
잠시 후,늙은 하녀가 가져온 데운 물로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던전을 지나며 몸에 쌓인 먼지를 씻어 낸 뒤엔 평상복으로 갈아입었 다. 그러곤 복도로 나가 지나가던 늙은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데이낙스 남작님은 어디 계십니 까?”
“남작님이라면 2층의 서재에 계십 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위치만 알려 주십시오.”
“2층으로 을라가셔서 오른쪽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가시면 된답니 다.”
강현은 늙은 하녀가 일러 준 대로
2층 복도 오른쪽 끝방으로 가서 노 크를 했다.
똑똑.
“최강현입니다. 잠시 얘기를 나누 고 싶습니다만.”
“들어오게.”
서재 안에 들어서자 창가에 기대어 달빛에 비춰 서류를 읽고 있는 데이 낙스 남작이 보였다.
강현은 가벼운 목례로 예를 갖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데이낙스 남작이 서류를 책상 위에 을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쉬지 그랬 나.”
“테라노 자작이란 자와 나누던 얘 기를 들었습니다.”
“이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신 경 쓰지 말게나.”
“빚이 있는 것 같더군요.”
데이낙스 남작은 서재 중앙에 자리 잡은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어깨가 처지지 않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올곧은 자세를 취했다.
“오면서 말한 뇌물 수레는 무슨 수 를 써서라도 만들걸세. 자네는 염려 말고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해 주게 나.”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음? 아,이런 상황에서도 왜 공국 의 안위를 걱정하느난 말이로군. 크 레인 공국의 상황은 정상적인 상황 과는 거리가 멀다네. 해가 갈수록 줄어드는 파이를 두고 가진 자만 더 가져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지. 난 그저 지금의 상황이 해소되고 예 전과 같이 모두가 굶주리지 않는 나 라가 되길 바랄 뿐이네.”
“그렇습니까.”
“훗,변두리의 가진 것 없는 말단 귀족이 발버둥치는 게 이상해 보이 나?”
혹자는 말할 거다.
변두리의 귀족이 가지기엔 너무 허 황된 꿈이 아니냐고.
시대에 순응하며 자신의 보신이나 생각하라고.
그러나 강현의 눈앞에 있는 젊은 남작은 차분한 외견과 다르게 들끓 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강현 경,가진 것 없는 자가 나라 를 바꾸려면 무엇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목숨일세.”
“적어도 난 그런 각오로 에르델 황 녀님의 부탁을 받아들였네. 그러니 자네도 최선을 다해 주게.”
생각해 보면 강현을 검문소에서 빼 내는 것 자체가 데이낙스 남작에겐 목숨을 건 일이나 다름없었다.
스카텐드로 위장하여 통과하긴 했 다만 조만간 제국 쪽에서 스카텐드 의 사망 소식이 전달되어 올 거다. 그렇다면 강현이 스카텐드로 위장 했단 사실이 들통 날 게 뻔하다. 강현을 검문소에서 빼내 온 데이낙 스 남작은 곧장 중앙정권의 처벌을 받을 거고 말이다.
강현은 한동안 데이낙스 남작을 보 다가 차가운 투로 매몰차게 말했다.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도 알겠더군 요. 남작님깬 3, 000골드를 모을 수 있는 역량이 없습니다.”
독설에 가까운 말에 데이낙스 남작 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내가 어떻게든 모아 보겠다고 했 지 않나.”
“그 어떻게든이라는 게 문제라고 말 씀드리는 겁니다. 주변 영지를 돌아다 니면서 일일이 고개를 숙이면 3, 000 골드가 생길 거라 생각하십니까?”
“잘 듣게,최강현 경. 난 자네를 도우려고 하는 걸세. 자꾸 비협조적 으로 나오면 서로 힘드네.”
“시작조차 못할 작전에 목숨을 거 신 셈이군요. 스스로의 목숨을 너무 가벼이 여기시는 게 아닌지?”
“뭣이? 이보다 더 나은 작전이 있 다면 말해 보게.”
강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있습니다. 제가 떠올린 작전으로
가시지요.”
“내가 이 작전을 위해…… 뭐? 지 금 다른 작전이 있다고 했나?”
데이낙스 남작은 한창 오르고 있던 열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는 걸 느꼈 다.
뇌물 수레 작전을 짜는데도 한참이 걸렸거늘,입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더 좋은 작전이 떠올랐다고? 자신만만하게 작전을 부정하더니 대안이 떠올라서 그런 거였나.
데이낙스 남작은 허무함과 반가움 이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기분 속에 서 물었다.
“무슨 작전인지 말해 보게. 들어 보지.”
강현은 즉흥적으로 떠올린 작전을 을기 시작했다.
강현의 작전을 듣는 내내 데이낙스 남작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작전을 모두 들은 후.
데이낙스 남작은 침음을 홀리며 말 을 꺼냈다.
“흐음,기발하긴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군. 자칫 잘못하면 아무것도 못해 보고 목이 떨어질 수도 있네.”
“목숨을 거시려던 분께서 리스크가 무서우신 겁니까?”
“나더러 무모하다더니 자네는 더하 구만.”
“리스크 없이는 보상도 없는 법입 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데이낙스 남작 은 끝내 결정을 내렸다.
“자네의 판단을 믿겠네. 방금 작전 대로 움직이도록 하지.”
*
다음 날 아침.
테라노 자작은 고기 요리로 가득한 식탁 앞에서 식기를 집어 들었다. 본인의 영지민도 가난한 건 마찬가 지건만 테라노 자작의 식탁만은 항 상 풍성하기 그지없다.
테라노 자작은 기름진 고기를 우적 우적 씹으며 입꼬리를 늘렸다.
‘사홀 뒤에는 데이낙스 영지의 물
레방아가 손에 들어오겠군. 가격은 3배쯤 올릴까. 3년 동안 뽑을 만큼 뽑아 버려야지’크레인 공국 변두리의 남작령들은 대부분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테라노 자작은 가난한 남작이나,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준 후 이런저 런 트집을 잡아 더한 값어치의 물건 을 빼앗기로 유명했다.
기본적으로 채무 관계는 본인들끼 리 해결하는 게 당연하지만,채무관 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왕궁에 중재 요청을 할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테라노 자작처럼 터 무니없는 변제방식은 허용되지 않는 다.
헌데도 그걸 실현할 수 있음은 매 년 주변 영지에서 뽑아내는 돈의 일 부를 베니스 백작에게 바치고 있는 덕분이었다.
‘한 3년 정도만 이 짓거리를 하다 가 중앙정권의 자리를 돈으로 사야 겠군. 언제까지고 이딴 변두리 생활 을 할 순 없지. 크흐흐, 세상 참 좋 아졌어. 돈만 있으면 뭐든 되니까 말이야.’
홀로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웃고 있던 증.
문이 열리며 자작가 소속의 기사가 들어왔다.
“자작님,데이낙스 남작께서 시급 히 드릴 말씀이 있다며 찾아왔습니다. 어찌할까요?”
“데이낙스 남작이? 그 작자한테 들 을 얘기라면 돈 얘기밖에 없건만. 일단 들여보내라.”
기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데이낙스 남작이 식사방에 들어왔 다.
데이낙스 남작은 간단하게 인사를 올리며 말을 꺼냈다.
“이른 아침에 실례를 무릅쓰고 뵙 기를 청한 점. 너그러이 이해해 주 십시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왔나? 그 뻔뻔한 낯짝에서 돈을 갚는다는 이 야기가 나오길 바라지.”
“돈을 갚을 정도의 이야기라고 사
료됩니다.”
“일단 들어는 주지. 을어 보게.”
데이낙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 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빙검의 기사 최강현이 저희 저택 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