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화
검문소의 기사는 청년을 두고 데이 낙스 남작이라 했다.
크레인 공국 안쪽에서 왔으니 필시 크레인 공국 내의 귀족인 게 틀림없 다.
그러나 강현은 데이낙스 남작이란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낯선 자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하는 데 어찌 경계하지 않을까.
청년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가볍게 휘휘 저었다.
“진정하게. 최강현 경. 날세,데이 낙스 남작.”
“데이낙스 남작?”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긴 한데 명확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어디서 들었었지?
데이낙스 남작은 멋쩍게 콧잔등을 긁적이며 말했다.
“기억 못하나 보군. 무리도 아니지. 연합 기사단 창단식 때 잠깐 인사한 게 전부이니.”
연합 기사단 창단식 때 수많은 사 람들과 인사를 나눴었다.
제국 귀족들은 물론이고 크레인 공 국과 하니온 공국의 귀족들도 다수 섞여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당시 강현에게 인사를 건넸던 귀족 중 한 명인 듯했다.
데이낙스 남작은 오른손을 내밀며
다시금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만나서 반갑네 데이낙스 남작일 세. 에르델 황녀님의 연락을 받고 자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잠시간 기억을 더듬던 강현은 데이 낙스 남작가를 떠올려 냈다.
크레인 공국 변방의 작은 가문으 로,에르델과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 해 온 가문이었다.
대화 내내 노이즈는 섞이지 않았 다.
데이낙스 남작이 하는 말이 전부 진실이라는 증거였다.
강현은 형식적으로 데이낙스 남작 의 악수를 받아 주며 말했다.
“기억났습니다. 연합 기사단 창단
때 에르델 황녀님과 함께 인사를 나 눴었지요.”
“기억났다니 다행이군.”
“그나저나 에르델 황녀님께 연락을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된 일 입니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일단 장소를 옮기지. 걸으면서 말해 주겠 네.”
데이낙스 남작은 마을 안으로 강현 을 안내하며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 다.
먼저 강현이 쉬프섬에 있을 무렵, 이미 크레인 공국에선 강현의 입국 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데이낙스 남작
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에르델에게 미리 서신을 띄웠다.
에르델이 서신을 받았을 땐 벌써 강현과 헤어진 후였다.
그녀가 답장을 보내 강현이 도착하 면 협조하라고 한 것이었다.
확실히 어딜 지나고 있을지 모르는 강현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보단 이 편이 더 확실하다.
그나저나 에르델은 황궁으로 향했 고,난 바로 왔는데 서신이 먼저 도 착했나.
라벤더 상단의 전서구를 이용했나 보군.
내가 도착할 거란 걸 제3자에게 알려 준 건 너무 조심성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만일 데이낙스 남작이 다른 마음을 품었었다면,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 달았을 터다.
뭐 에르델도 바보는 아니니 확신이 있던 거겠지.
강현을 기다리고 있던 경위를 설명 한 데이낙스 남작은 앞서 걸으며 말 을 이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되네. 사실 나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도운 것이 라네.”
단지 친분만으로 강현을 돕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공국의 신하로서 공국의 왕명을 어 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줄곧 그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익이 걸려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역시 이해관계는 확실한 편이 좋 다.
맺고 끊는 게 깔끔해지니까.
강현은 데이낙스 남작과 함께 마을 로 들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입국금 지령이 떨어졌다고 하셨습니다만 사 실입니까?”
“크레인 공국 왕궁에서 직접 각 지 방영주와 검문소에 엄명을 내렸지. 신중을 기하려고 자네의 모습을 아 는 내가 직접 여기까지 와서 대기하 고 있던 걸세.”
“명분은 뭐였습니까?”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네. 무조건 잡으라는 명령만 있었지.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공국으로 넘어온 건가? 황녀님의 서신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어서 나도 어떻게 도와야 하는 건 지 감이 잘 안 잡히는군.”
에르델도 자세한 설명은 없이 무조 건 도우라고만 해 뒀나 보다.
사정을 설명하려면 조직에 대해 언 급해야 하는데 그리되면 상당한 정 보를 누설하게 되었다.
제3자에게 많은 걸 설명해 줄 필 요는 없다.
강현은 현재 목표를 단편적으로 알 려 주었다.
“제국의 반역자,디벨롭을 쫓고 있
습니다.”
“디벨롭? 처음 듣는 이름인데 그게 누군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강현이야 조직의 수장이라는 걸 알 지만,외인,그것도 타국의 사람에겐 고작 제2황자의 집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일개 집사의 이름이 외 국까지 알려져 있을 리 없다.
강현은 좀 더 심층적인 질문으로 바꾸었다.
“최근 왕궁에 방문한 자에 대한 소 문은 없습니까?”
디벨롭은 크레인 공국이 내전에 불 참하도록 손을 쓰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분명 크레인 공국 왕궁에 들렀을 거다.
그러나 데이낙스 남작은 변두리 지 역의 남작이라 그런지 왕궁 소식에 무지했다.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짐작 가 는 부분은 있네.”
“말씀하십시오.”
“지금 크레인 공국은 공왕 전하의 외척들이 권력을 쥐고 흔드는 중일 세. 이번에 강현 경의 입국을 금지 시킨 명령도 외척들의 입김이 작용 했을 걸세.”
그나마 도움이 되는 정보가 나왔 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의문이었던
게 있었다.
디벨롭은 뭘 믿고 공국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말했을까.
공국의 실세들과 연이 닿아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크레인 공국 실세의 저택 에서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 다.
강현은 그에 중점을 두고 물었다.
“외척의 중심인물은 누구입니까?”
“중심인물이라면 아무래도 현 공왕 전하의 장인어른인 베니스 백작님이 겠지. 디벨롭이란 자가 베니스 백작 가에 있을 것 같나?”
“확인차 가 볼 생각입니다.”
“일이 어렵게 되었군. 지금 크레인
공국에서 베니스 백작가의 위상은 왕궁보다도 높다네.”
“적이 확실해지니 겁이 나십니까?”
“그런 건 아니고 혹시 적을 너무 가벼이 보는 게 아닌가 싶어 한 말 일세. 으음,베니스 백작가라…… 의 심 받지 않고 잠입할 수 있도록 손 을 써 주도록 하지. 조금만 빨리 걷 도록 하세.”
고작 30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을 지나자 숲이 나왔다.
숲 입구 근처에서 대여섯 명쯤 되 는 병사들이 마차를 대령한 채 대기 하고 있었다.
모두 데이낙스 남작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강현은 마차에 탐으로서 모습을 감 춘 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남작가의 인물이 이 동하는 것으로로밖에 보이지 않으리 라.
삐걱! 삐걱!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마차 곳곳에 서 부품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마차 좌석에 깔린 시 트는 오래되어 얼룩이 져 있고,수 레바퀴와 마차칸을 연결하는 축이 헐거워졌는지 바퀴가 구를 때마다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데이낙스 남작은 멋쩍어하며 사과 의 말을 전했다.
“이거 미안하군. 가문에 이런 마차
밖에 없어서 말일세. 불편하겠지만 이해해 주게.”
“상관없습니다.”
마차가 울퉁불퉁한 숲길을 지나가 면서 소음과 진동이 더욱 심해졌다. 때문에 두 사람은 잠시간 대화를 끊은 채 조용해지길 기다려야 했다. 숲길을 빠져나와 데이낙스 영지로 이어지는 평탄한 길에 이르러서야 대화가 가능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강현이었다.
“손을 써 주신다고 했는데 구체적 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크레인 공국에서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나?”
“어딜 가든 똑같지 않습니까. 공적
을 세우거나,줄을 잘 서거나 둘 중 하나지요.”
“여기선 오로지 베니스 백작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밖에 없네. 베니스 백작가 저택 앞에는 매일같이 뇌물 을 바치려는 자가 줄을 이루고 있 지. 심지어 방문 약속을 잡는 것조 차 힘들어서 집사에게 뒷돈을 바쳐 야 하는 지경일세.”
누군가 권력을 잡으면 그 집의 애 완견까지도 콧대가 높아진다더니 딱 그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크레인 공국의 백성들은 연이은 홍 년으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니스 백작가의 창고에선 밀이 썩어 가고 있으며, 향기로운 술 냄새와 여자들의 분 냄새가 끊이 지 않는다고 한다.
데이낙스 남작은 이마에 주름을 잡 으며 자신이 생각해 낸 작전을 을었 다.
“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뇌물 수레를 만들어 보겠네. 거기에 자네 가 짐꾼으로 편승해서 베니스 백작 가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나. 거기서부턴 자네 역량에 맡기도록 하지.”
데이낙스 남작은 의심을 미연에 방 지하기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이 나라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썩었네. 방법이 있다면 제국에서 관 여해서 공왕 전하께 힘을 실어 주는 방법뿐이지. 이런 식으로 공을 세워 두면 후에 에르델 황녀님이 즉위했 을 때 힘을 써 주지 않을까 싶어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잡아 보려는 걸세.”
개인적인 이득 때문에 돕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크레인 공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변 방의 힘없는 남작.
그게 바로 데이낙스 남작의 현주소 였다.
나라에 충성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는 게 신하 된 도리일 터.
데이낙스 남작은 자신이 할 수 있 는 최선의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사정을 들은 강현은 불필요한 의심 으로 심력을 소모하는 대신 앞으로 의 일을 논했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한다고 하셨는 데 어떻게 모으실 생각이십니까?”
“주변 영지를 돌면서 빌려 봐야겠 지. 아마 3, 000골드쯤 필요할 걸세. 자금이 모일 때까지 내 저택에서 쉬 게나.”
듣자 하니 뇌물 수레를 만들 자금 조차 만들지 못할 정도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것 같았다.
3, 000골드 수준이면 평범한 남작가 에서도 쉬이 모을 수 없는 액수다. 돈이 없어 낡은 마차를 그대로 쓰 고 있는 가난한 남작가에서 어찌 3, 000골드나 되는 거액을 모으겠는 가.
다른데서 돈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다.
빚을 져 가면서까지 강현에게 협조 하고자 하는 거다.
“혹시 모르니 계속 스카텐드인 척 하겠습니다.”
“응당 그래야겠지. 입국금지령이 내려졌으니 말일세. 그 부분은 염려 하지 말고 내 집처럼 편히 쉬어 주 게나.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에르 델 황녀님께 크레인 공국의 사정이 나 잘 말씀드려 주게.”
“그러지요.”
*
마차는 한참을 달려 데이낙스 남작 가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은 외벽 보수를 하지 않아 곳 곳이 갈라져 있었고,정원사를 고용 할 여유조차 없는지 정원수가 지저 분한 모양새로 방치되어 있었다.
삐걱! 삐걱!
낡은 마차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저 택 내에 울려 퍼진다.
촛불조차 켜지 않은 저택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창문에 얼굴을 비쳤 다.
데이낙스 남작이 돌아오길 기다리 던 하녀들인 듯하다.
그마저도 대다수가 나이 든 사람이 많았다.
가난한 생활을 오래한 모양인지 낡 은 마차 소리만 듣고도 데이낙스 남 작이 돌아온 걸 알아첸 듯했다. 강현과 데이낙스 남작을 태운 마차 가 저택 뒷마당에서 멈춰 섰다.
데이낙스 남작이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나서며 말했다.
“내 저택일세. 안심하고 내리게나.”
강현이 마차 발판을 밟으며 땅에 내려섰을 때였다.
데이낙스 남작의 병사들이 뒷마당 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뿐만 아니라 저택 정원 쪽에서 다 수의 인기척이 느껴지며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저택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왔다! 썩 나오지 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