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전투가 끝나고 뒤늦게 주변의 소란 이 감지되었다.
때 아닌 양떼들의 발 구름 소리가 쉬프섬 곳곳에서 일어났고,숲 너머 멀리에서 섬주민들이 들고 있는 햇 불이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오밤중에 시체가 생긴 이유를 구구 절절 설명할 틈은 없다.
얼른 정리하고 에르델이 있는 숙소 로 가 봐야 한다.
강현은 벨런에게 새로운 회복포션 을 던져 주며 말했다.
“섬 주민 상대는 그쪽에게 맡기 지.”
벨런은 고개를 끄덕이고 회복포션 의 마개를 열었다.
벨런으로선 놀라울 따름이었다.
은퇴 전에 스카텐드와 여러 번 붙 어 봤기에 잘 알고 있다.
스카텐드가 얼마나 성가신 실력자 인지.
벨런처럼 아예 한 가지 스킬만 쓰 는 스텟 중심의 이세계인이 아닌 이 상 정말 상대하기 힘든 자였다.
그런 스카텐드를,그것도 자신과의 싸움으로 지친 상태에서 이겨 내다 니.
과연 공국 최강의 검사라더니,헛 소문이 아니었던 듯했다.
어쩌면 제국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황제의 기사와 대등할지도.
벨런이 강현의 실력을 가늠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자,강현이 말했다.
“회복포션으로 티타임을 가지는 건 처음 보는군.”
“아,미안. 금방 가도록 하지.”
벨런을 보낸 강현은 스카텐드의 시 신을 뒤적였다.
지령서 같은 게 남아 있으면 황궁 의회나 드래코프를 옭아멜 증거로 쓸 수 있을 거다.
웬만하면 생포하는 게 좋았겠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생포 따윌 노렸다면 역으로 강현이 당했을 거다.
만약 장기전이 되었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결전이었다.
스카텐드의 시신에서 건질 만한 물 건은 거의 없었다.
발견한 거라곤 아공간 주머니와
50골드가량의 어음,스카텐드의 신 분증 정도였다.
‘아공간 주머니에 중요한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역시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는 건 무리겠지.’
아공간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려 면 넣은 물건의 이미지를 연상해야 한다.
본인의 아공간 주머니가 아닌 이상 어떤 물건을 넣었는지 알 리가 없 다.
사실상 타인의 아공간 주머니는 얻
어 봤자 의미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 다.
어음은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라벤더 상단의 어음이고,신분증은 혹시 몰라 챙겨 두었다.
남은 건 바닥에 떨어진 바스타드 소드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환영검이랑 스킬 바꾸 기 전부 보구의 효과라 했었나. 아무리 뒤져 봐도 바스타드 소드 외의 보구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지. 이 검 하나에 효과가 전부 포함되 어 있는 건가.
강현은 확인차 바스타드 소드에 감 정서를 붙여 보았다.
[몽환검]
등급 : s
타입 : 검
특성 : 유령왕국에서 만들어진 검. 마나를 불어넣을 경우 유도 기능이 달린 환영검을 소환할 수 있다. 환 영검의 소환 갯수와 위력은 사용자 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소켓1 - 광대유령의 소을 : 유령 왕국을 떠돌던 광대유령의 장난기가 뭉쳐서 만들어진 마법석. 검에만 부 착이 가능하다. 소울을 장착한 검으 로 상대의 무기 및 방어구를 가격하 면 서로 스킬이 뒤죽박죽 바뀐다.
환영검과 스킬 바꾸기.
왜 효과가 두 개인가 싶었는데 소 켓에 마법석을 박은 것이었다.
하긴 활에 소켓 4개를 박은 사람 도 있는데 다른 이라고 소켓이 없겠 는가.
강현은 몽환검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숙련도가 올랐겠군.’ 이번 여행 증에 빙백검에 개방의 서를 적용했었다.
빙백검의 숙련도 시스템에 한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참에 확 인해 보면 좋을 것 같았다.
강현은 빙백검을 뽑아 감정서를 붙 여 보았다.
[빙백검]
등급 : A
타입 : 검
특징 : 검신에서 냉기를 내뿜는 검. 검신에 부여하는 마나의 양에 따라 냉기의 양을 조절 가능하다. 숙련도 : 생명체를 사살할 때마다 숙련도 1상승(2/300) 숙련도가 2로 올라가 있다.
쉬프섬까지 오면서 강현이 쓰러트 린 건 크라켄과 스카텐드였다.
크라켄이야 원래 몬스터이니 둘째 치더라도,인간인 스카텐드를 사살 했는데도 숙련도가 올랐다.
숙련도 설명에 굳이 몬스터가 아
닌,생명체라 적혀 있는 게 신경 쓰 였는데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쩌면 몬스터나 인간이 아닌 작은 벌레를 죽여도 적용되는 게 아닐까. 노가다가 필요한 시스템이라 여겼 는데,의외로 편하게 숙련도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강현이 생각에 잠겨 있던 중 품 안의 소리잔에서 에르델의 목소리가 홀러나왔다.
- 강현 경,그쪽은 어떻게 됐나요? 이쪽은 습격이 있긴 했는데 일단 무 사히 생포했어요.
역시 저쪽도 암살자가 들이닥쳤었군.
임모벨 백작이 힘깨나 쓴 모양이 다.
저쪽이 생포에 성공했으니 이걸로 황궁의회의 꼬리는 잡은 셈인가. 자세한 건 돌아가서 얘기해야겠군. 강현은 섬주민들을 안심시키고 있 는 벨런을 뒤로하며 숙소로 향했다.
*
기절했던 요단이 가까스로 눈을 뜨 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되찾자마자 얼굴 전체가 부 서질 듯 아파 왔다.
턱뼈가 부서졌다는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단은 기절하기 직전에 벌어졌던 상황을 떠을렸다.
‘그래,임모벨 백작한테 턱을 맞았 었어. 젠장,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건 당 연한 건데,완전히 허를 찔렸어. 일 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는데 이제 어 떻게 한담.’ 요단이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눈을 굴리고 있는데 방문이 열렸다. 문지방 너머에서 임모벨 백작과 에 르델이 나타났다.
임모벨 백작은 요단이 깨어난 것을 확인하곤 입을 열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꼬맹아,말
은 할 수 있겠느냐.”
탈출을 꾀하기도 전에 상대가 와 버렸으니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
이리된 이상 말을 못하는 척이라도 하며 묵비권을 행사하는 게 나았다. 요단은 턱이 안 움직이는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 ”
마나 마스터라곤 해도 아직 소년에 불과한 요단이다.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이 앓 는 소리를 내며 끙끙대는 모습은 측 은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에르델은 치맛자락을 가지런히 쓸 면서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고민에 빠진 듯 턱을 괴며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이 아이 말을 못하는 것 같은데 어쩌죠?”
“흠,글쎄다. 일단 회복포션이라도 먹여 보자꾸나.”
임모벨 백작이 회복포션을 요단의 입에 들이부었다.
보모가 젖병 물리듯 친절하게 먹이 는 게 아닌,진짜 말 그대로 들이부 어 버렸다.
끈적한 포션액이 요단의 입이며 코 로 줄줄줄 흘러 들어갔다.
턱의 부상이 치료됨과 동시에 요단 이 코로 물을 뿜어냈다.
“크응크음!”
“자,꼬맹아. 이제 말할 수 있을 테니 이번 암살을 시도하게 된 경위를 읊어 보거라.”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
코에다 포션을 들이부으면 어쩌라 는 거야!
어디 내가 대답하나 봐라.
요단은 임모벨 백작을 노려보기만 할 뿐,절대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 었다.
임모벨 백작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이를 어
쩐다.”
에르델은 턱을 괸 채로 고개를 요 리조리 흔들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왕이면 강현 경이 오기 전에 취 조를 끝내야 할 텐데요.”
“녀석이 취조하면 문제라도 생기느 냐?”
“어차피 입만 열 수 있으면 된다면 서 팔다리를 베어 버릴지도 몰라 요.”
“에이,아무리 녀석이라도 그리 심 하게 하진 않겠지.”
“할아버지가 강현 경을 잘 몰라서 그래요. 얼마 전에 황궁에서 SSS랭 크 웨이브가 생겨났던 건 아시죠?”
“물론이지. 그런 큰일도 모르겠느 냐.”
“그때,같이 공략하러 들어갔던 연 합 기사단의 기사들이 돌아와서 거 짓 보고를 했는데 아주 처참하게 당 했어요.”
“그런 일도 있었느냐?”
“공적을 독차지하려고 벤젠 기사단 에 누명을 씌우려던 자들이었죠.”
“아아,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 있 는 것 같구먼. 감옥 수레에 실려서 공국으로 이송되다가 도착도 전에 죽었다지,분명 백성들이 던진 돌팔 매질에 죽었다 했었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요단은 당 황할 수밖에 없었다.
강현을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벨런 을 이용한데다 만약을 대비해 스카 텐드까지 배치해 두었다.
그런데도 여기로 오고 있다고?
설마 스카텐드가 강현에게 당했단 말인가!
스카텐드가 강현을 처리하고 이리 로 와 주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는 데!
더불어 강현이 적에게 자비가 없다 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점점 더 눈 앞이 캄캄해졌다.
임모밸 백작과 에르델은 불쌍하다 는 눈빛으로 요단을 바라보았다.
“우리로선 입을 열게 할 방법이 없 네요. 어쩔 수 없이 그냥 강현 경에 게 맡기도록 하죠.”
“쯧쯧,일이 이렇게 되니까 오히려 불쌍하구먼. 차라리 내 손으로 끝내 주는 게 나을 뻔했어.”
“아직 젊은데 벌써……
“어쩌겠느냐. 자업자득인 셈이지.”
진심이 묻어나는 동정이었다.
대체 최강현이 얼마나 무섭길래 저 둘이 이토록 불쌍하게 쳐다보는 거 냐고.
요단은 자기 스스로 강현에 대한 공포심을 불려 나가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마,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최강현 에게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 부탁입 니다.”
에르델은 온화하게 웃으려다 말고 표정을 가다듬으며 무심한 투로 말 했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게 수상하네 요. 거짓말을 할 생각인가 보죠?”
“저,절대 아닙니다. 두 분이 말씀
하셨잖습니까. 최강현의 손에 넘기 면 제가 무사치 못할 거라고. 그러 니까 그 전에 끝내고 싶은 겁니다. 진심입니다.”
“부탁하는 태도가 썩 마음에 안 드 네요.”
“이,이 미천한 것이 사실대로 고 하고 싶으니 부디 들어 주십시오, 황녀님.”
“썩 내키진 않지만 일단 들어 보 죠. 읊어 보세요.”
실토하게 만들어야 될 쪽이 오히려 실토하게 해 달라고 부탁 받는 꼴이 되었다.
아까와 달리 에르델은 의자를 당겨 다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표정은 꼭 누구를 본 딴 듯 차갑 기 그지없었다.
임모벨 백작은 에르델이 누구를 따 라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차리며 씁 쓸하게 웃었다.
'허어,완전히 녀석에게 물들어 버 렸구먼. 에구,눈에 먼지가……
*
강현이 숙소에 돌아왔을 땐 취조가 모두 끝난 후였다.
에르델은 요단에게서 캐낸 이야기 를 강현에게 전달했다.
“역시 생각대로였어요. 황궁의회가 두 공작에게 우릴 처리해 주면 내전을 돕겠다고 제안했었다고 하네요. 이걸로 황궁의회에 반역죄를 적용할 수 있겠어요.”
이야기를 들은 강현은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 곤 다리를 꼬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임모벨 백작이 조그 맣게 중얼거렸다.
“판박이로군.”
“네? 할아버지,뭐라고 하셨어요?”
“그냥 혼잣말이니라.”
“강현 경,요단을 데리고 황궁으로 돌아가죠.”
황궁의회의 함정을 역으로 이용한 다는 계책은 성공했다.
이제 돌아가서 요단을 증인 삼아
리바시치를 비롯한 황궁의회의 늙은 능구렁이들을 정리하기만 하면 된 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강현이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오다가 수상한 무리를 한 무더기 죽였다고 했었나?”
요단이 이상하게도 과하게 강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노이즈가 섞이지 않는 걸로 보아 사실대로 고분고분 말하고 있었다. 뭔가 강현에게 지나친 공포심을 품 고 있는 것 같았다.
자리를 비운 동안 무슨 말을 했길 래 이리 겁에 질린 거지?
하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강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디벨롭이란 자가 두 공작을 찾아 온 적은 있나?”
“디벨롭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드래코프 황자의 집사.”
“누군지는 몰라도 드래코프 황자가
보낸 사람이 드리안 공작가 저택에 온 것만은 확실합니다.”
요단이 두 공작가로부터 받은 지령 과 공작가의 정황 등을 샅샅이 늘어 놓았다.
그중에는 디벨름이 제후국들을 설 득을 협상안으로 내놓았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법 고분고분 대답하는군.”
“흐윽,제대로 대답했으니까 팔다 리만은…… 감옥 수레만은…… 울먹거리며 파르르 떠는 요단이었 다.
아무래도 에르델이 잔뜩 겁을 준 것만은 확실하군.
어쨌든 요단의 증언을 토대로 한다 면 현재 디벨롭은 크레인 공국이나, 하니온 공국에 있을 거다.
드래코프가 멋대로 남아 있는 조직 의 정예들을 소모한 것도 모른 채. 이제 디벨롭에게 남은 건 없다.
그 잘난 조직망은 예전에 붕괴되었 고,간부들은 제거된 지 오래다.
사실상 조직은 공중분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디벨롭 이 어떻게 행동할까.
뻔하다.
조직의 이념을 접고 숨어 버릴 거 다. 그러곤 또 숨죽이며 기다리다가 때를 노려 다시 이빨을 드러내겠지. 그리되면 강현으로선 당초의 목적 이었던 웨이브의 진실을 알아내지 못한다.
쫓아가려면 지금 쫓아가야 한다.
크레인 공국이나 하니온 공국으로 가려면 천공섬을 지나가야 하는 걸 로 안다.
제국에서 천공섬에 갈 수 있는 구
름다리는 드리안 공작가가 독점하고 있다.
강현은 긴긴 생각을 정리하며 나지 막이 말을 꺼냈다.
“황녀님,여기서부턴 따로 행동하 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