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강현을 태운 선박은 크라켄 습격 이후,새로이 인어 용병들을 불러다 호위를 맡겼다.
바다몬스터가 몇 번 더 습격해 오 긴 했지만 크라켄만큼 위협적인 몬 스터는 없었다.
이틀이란 시간이 더 흐르고 마침내 목적지인 쉬프 섬에 다다랐다. 우여곡절을 겪은 배주인은 출발 때 보다 해쏙해진 모습으로 강현에게 찾아왔다.
“최강현 경,저희는 아마 내일까지 이 섬에 정박해 있을 겁니다. 떠나시 려면 내일 정오까지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섬에 있는 동안 묵을 곳이 필요한데 어디로 가면 됩니 까?”
“여긴 여관 같은 편의시설이 없습 니다. 묵으시려면 섬 주민의 집에 투숙해야 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섬마을 촌장에게 미리 언질을 넣어 두겠습니다. 황녀님께 불편함이 없 도록 각별히 신경 쓰라 전하겠습니 다.”
“소란을 피우러 온 것이 아니니 조 용히 전해 주십시오.”
“네,그리고…… 이왕 황녀님 얘기 가 나온 김에 하는 말입니다만,이 전에 무례했던 일은……
항해 첫날에 몇몇 승객들이 무례를
범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상인의 잘못이 아니지만 상인 소유 의 배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불똥이 될지 몰라 성심성의껏 대접하려는 것 같았다.
강현은 첫날 이후로 신경도 안 썼 던 터라 무심히 대답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저도 황녀님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이대로 보내드리기에는 제가 마음 이 편치 않아서 그럽니다. 최소한의 성의라도 받아 주십시오.”
“그럼 빈 집을 하나 알아봐 주십시 오.”
“빈 집으로 충분하시겠습니까? 아, 아닙니다. 원하시는 대로 준비해드리는 게 최선이겠지요. 금방 알아보 겠습니다.”
상인 입장에선 강현과 에르델이 뭘 하든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높으신 분들의 일이지 않 나.
어설프게 행동하느니 원하는 대로 준비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뒤이어 배에서 내린 에르델과 임모 벨 백작이 강현에게 다가왔다.
에르델은 바닷바람 때문에 펄럭거 리는 모자를 꾸욱 누르며 입을 열었 다.
“생각보다 습격이 늦네요. 여기까 지 오는 동안 습격 한 번 없었어 요.”
벨런 섭외를 권유한 건 황궁의회 다.
필시 여행 중에 의회가 습격을 가 하려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여태껏 단 한 번의 습격도 없었다.
하지만 강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두 공작파 소속의 암살자 가 오리라 여겼다.
“놈들도 아마 신중을 기하고 있을 겁니다. 여행 중에 한 번 이상은 습 격해 오겠지요.”
“만약 저희가 벨런 섭외에 성공하 면 적도 더 이상 습격은 무리예요. 놈들로서는 최대한 벨런을 섭외하기 전에 치고 싶을 테죠.”
“여태까지 습격이 없었으니,쉬프 섬에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일단 섬을 돌아보면서 최근 에 따로 섬에 들어온 자가 없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숙소는 선박 주인이 빈 집을 구해 준다 했으니 먼저 쉬고 계십시오.”
“같이 가요. 혼자 다니면 위험해 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강현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마나 마스터 다.
그중에서도 최강으로 손꼽히는 마 나 마스터가 강현이었다.
에르델은 괜한 소릴 했다 싶어 미
소로 얼버무렸다.
“그럼 호의를 받아들여서 쉬도록 하죠. 저녁때까진 돌아오세요.”
*
쉬프 섬 북쪽의 작은 선착장.
낚싯배 몇 척만이 둥둥 떠 있는 선착장에 작은 낚싯배가 도착했다. 그 낚싯배에는 구릿빛 피부가 돋보 이는 반곱슬 머리의 사내가 타고 있 었다.
사내는 물고기가 가득 담긴 그물을 어깨에 짊어지며 선착장에 올랐다. 선착장 나무다리 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우던 노인이 사내를 반겼다.
“오 벨런,자네 왔는가. 허허,그물 한번 풍만하게 출렁이는구먼.”
“하하하,물고기들이 단체로 눈이 멀었는지 잘도 덥석덥석 물더군요.”
“이번에는 제법 오래 다녀왔구만. 3일 정도 다녀왔나?”
“시간만 오래 걸렸지 그리 멀리 나 가진 않았었습니다. 상선이 온 것 같던데 언제 왔습니까?”
“오늘 아침에 왔네.”
“생선 몇 마리 들고 가서 과자로 바꿔야겠군요. 포푸가 며칠 전부터 어찌나 과자 타령을 해 대던지.”
포푸가 좋아할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벨런이었다.
흐뭇한 미소만 보면 영락없는 아빠
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낚싯대를 잡고 있던 노인은 상선 얘기에 잊고 있었다는 양 한 가지 사실을 전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까 승객들 사이에서 요상한 얘기가 떠돌더만. 배에 빙검 의 머시긴가가 타고 있었다던데 빙검이란 말에 벨런은 미소를 지우 며 정색했다.
기사직에 몸담았던 자로서 모를 리 가 없는 명칭이었다.
“빙검의 기사라 하덥니까?”
“그래그래,그거였지. 내륙에선 제 법 유명한 사람 같더만.”
빙검의 기사라면 황궁에서 연합기 사단을 이끌고 있을 터.
한데,그런 그가 연합 기사단을 내 버려 두고 이 외딴 섬까지 찾아왔다 고?
황궁에 묶인 자로서 자의로 제멋대 로 움직이지는 못할 테고,황궁의 명령을 받고 온 것인가.
황궁에서 마나 마스터를 보낼 의도 라면 뻔했다.
‘설마 포푸를 노리는 것인가……. ,
예상이 맞다면 빙검의 기사는 포푸 를 척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가능 성이 높았다.
포푸는 수년 전 드워프의 난 때 처형당한 드워프 왕족의 유일한 후손이었다.
‘황궁에서 포푸가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포푸 때문에 일선에서 은퇴했다는 건 케이델 공 작도 모르는 사실인데.’
하룻밤 만에 100명을 사살하고 드 워프의 난을 제압했다는 전설.
그 전설의 밤에 벨런은 난을 일으 킨 드워프 왕자를 생포했다.
이후,드워프 왕자와 그의 측근들 은 모두 처벌되었으나 미처 잡아들 이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난을 일으킨 드워프 왕자의 아내와 그 아들이었다.
벨런은 케이델 공작의 특명을 받고 그들을 추격했었다.
그러나 한 달이 넘도록 잡기는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이 어디론가 망명했으리 라 여겨지던 가운데,모녀가 어느 산의 계곡으로 들어갔다는 목격 정 보를 입수했다.
당시 공적에 목말라 있던 벨런은 오래된 목격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단서라도 잡기 위해 홀로 계곡에 들 어섰다.
그리고 안개와 이끼로 음습한 계곡 을 굽이굽이 들어간 결과.
계곡 가장 깊은 곳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계곡 끝 동굴 안에서 드워프 왕자 의 아내가 갓난아이를 안은 채로 죽어 있는 게 아닌가.
사망 원인은 토벌대를 피해 도망치 다가 입은 수많은 검흔 때문이었다. 베인 자리에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상처를 안고 수십 킬로미 터나 떨어진 이곳까지 도망쳐 왔던 것이었다.
아이만은 살리고 말겠다는 모성의 승리였던 걸까.
갓난아이는 약간의 탈수 증세 외에 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인간이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 랑을 목격한 순간 벨런은 오열했다.
내가……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이 고작 이딴 것이었느냐!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대신 내가 널 지키겠다.
그것이 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일 것이니.
그날 이후,벨런은 드워프 왕자의 아들을 쉬프 섬으로 숨기고 자신 역 시 기사직에서 은퇴한 뒤 이처럼 은 거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맹세 한 드워프 왕자의 아들이 바로 포푸 였다.
벨런은 선착장을 떠나 쉬프 섬 안 쪽으로 내달렸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들! 그 어린 아이에게 기어코 반역죄를 뒤집어씩 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 진정 해. 진정하라고,벨런! 내가 먼저 포푸를 데리고 섬 바깥으로 나가면 모 든 게 해결될 일이야.’
벨런은 서둘러 자신과 포푸가 살고 있는 오두막집까지 주파했다.
하지만 어딜 간 건지 포푸의 모습 은 보이지가 않았다.
어디지? 어디로 갔지? 설마 벌써 녀석들에게?
아냐,그럴 리 없어. 분명 그토록 좋아하는 나비를 쫓아다니며 놀고 있을 거야.
포푸를 찾아서 실성한 자마냥 섬 곳곳을 뛰어다녔다.
이윽고 포푸가 자주 들르는 쉬프 섬의 작은 숲에 도착한 순간,벨런 은 수풀 사이로 삐져나온 작은 핏방울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흐른 지 오래되어 말라붙은 핏방 울
아니,아닐 거야. 분명 양치기들이 장난치다가 팔이라도 긁혀 흘린 거 겠지.
벨런은 애써 부정하며 수풀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수풀 너머에는 벨런이 그토 록 부정하던 현실이 펼쳐져 있었다.
피투성이로 싸늘하게 식어 있는 포 푸의 시신을 보는 순간,벨런은 두 무릎을 꿇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저 소리 없이 어깨로만 흐느낄 뿐.
간신히 고개를 든 벨런의 눈에 반 짝이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것은....
포푸를 죽인 자가 흘린 물건이리 라.
빌로스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와 브 리니아 공국의 상징인 용이 얽힌 문 양이 새겨진 배지였다.
연합 기사단의 배지인 게 분명했 다.
벨런은 충혈된 눈으로 배지를 으스 러뜨리듯 강하게 쥐었다.
“빙검의 기사,최강현.”
*
강현은 쉬프 섬을 돌아다니며 섬 주민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했다.
최근에 섬에 상륙한 사람 중 수상 한 자는 없었는지,개중에 아직 섬 에 머무르는 자는 없는지 물었다. 허나 모두가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 었다.
하긴 암살자가 뻔히 모습을 드러내 고 다닐 리 없다.
아무래도 쉬이 알아내긴 힘들 듯했 다.
강현은 상인이 마련해 준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걸로 섬 남쪽은 다 둘러봤고 내 일은 섬 북쪽을 둘러봐야겠군. 벨런 의 집은 섬 북쪽에 있다고 했었나.’
황궁의회의 계략이라지만 임무인 이상 섭외하는 시늉 정도는 하는 게 좋았다.
적당히 권유하는 시늉만 하고 다시 암살자 수색을 재개할 것이다.
어쩌면 암살자들이 벨런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모 를 일이었다.
‘이 섬에는 매복할 장소가 많아. 에르델 황녀를 데리고 갔다간 괜한 짐만 되겠군. 벨런의 집에 방문할 때도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낫겠어.’ 상대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인원 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이상 아무 리 조심해도 모자랐다.
강현은 오늘 업무는 끝났다고 여기
고 숙소로 이어지는 언덕에 올랐다. 서쪽 수평선에 걸쳐져 있던 달이 하늘에 떠오르며 쉬프 섬을 밝혔다. 언덕을 절반쯤 올랐을 때,강현은 문득 언덕 위를 보았다.
언덕 끄트머리에 검을 찬 반곱슬 머리의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도 강현을 발견하고는 이내 입 을 열었다.
“최강현 맞나?”
달을 등지고 있어 어떤 얼굴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만은 확 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사내는 적이다.
숨길 것도 없이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적의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 었다.
이제야 나타났나…….
강현은 저 사내가 황궁의회가 보낸 자객일 것으로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쪽을 찾아다니고 있 었는데 잘됐군.”
강현의 말이 도화선에 불을 지핀 격이 되었다.
사내가 분노로 몸을 떨며 기다란 장검을 뽑아냈다.
“날 찾아다녔다고? 역시 그랬나. 포푸를 포함해서 나까지 제거하란 명을 받았던 거였어. 확인시켜 줘서 고맙군.”
뭔가 맥락이 맞지 않은 대화다.
포푸는 누구고,내가 무엇을 확인 시켜 줬단 말인가.
강현은 저 사내가 암살자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강현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살의로 가득 찬 사내가 다짜고짜 스킬을 발동했다.
“광폭화.”
짤막한 시동어와 함께 사내의 몸 주변으로 검은색을 띤 마나가 솟구 쳤다.
광폭화라는 스킬을 최근에 들은 바 있었다.
강현과 에르델이 섭외하기로 했던 마나마스터,벨런의 전용 스킬이었다.
하나,상대가 벨런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벨런이 거의 떨어지다시피 언덕을 내리 박차며 검을 내리쳤다.
후우응!
분명 광폭화 스킬을 사용하면 이성 을 잃으며 공격 스텟,마나 스렛, 회피 스텟이 5배 증가하고,실드 스 렛이 0이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벌써 스킬을 발동한 이상,대화로 풀긴 글렀다.
강현은 빙백검을 뽑아 내며 벨런의 검에 맞섰다.
푸른 비늘의 검신과 검은 마나를 두른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격돌했 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