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가 자명종을 대신해 아침을 열었다.
에르델은 베개자국이 찍힌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목이며 어깨가 뻐근하다.
어제 임모벨 백작과 강현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신경 쓰여 잠을 설 쳐 버렸다.
“두 사람 다 한 성격하는데 별일 없었으려나.”
유일한 혈육이라곤 손녀인 에르델 밖에 없는 임모벨 백작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에르델을 위해 양질 의 기사들을 양성하여 보내 줬었다.
지금은 없는 라디스트나 조르만도 임모벨 백작이 붙여 준 자들이었다. 에르델을 끔찍이 아끼는 임모벨 백 작이 위험한 작전을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에르델은 아침 식사를 위해 식사방 으로 가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으으,두통이야. 이래서 들키면 안 된다 했던건데.”
들킨 것도 자신의 실수로부터 비롯 되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에르델은 어떻게 하면 임모벨 백작 을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식사 방에 들어섰다.
산해진미를 올린 식탁 앞에는 먼저 도착한 임모벨 백작과 강현이 있었다.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도 식기 달그 락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에르델은 임모벨 백작의 눈치를 살 피며 상석의 사선 자리에 앉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넌 잘 잤느냐?”
“네,뭐 염려해 주신 덕분에.”
시종이 에르델에게 물수건과 전채 스프를 가져다주는 동안에도 임모벨 백작은 말이 없었다.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하는 게 더 무섭 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 는걸까?
따로 끙끙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임모벨 백작이 입을 연 건 메인 요리가 나올 즈음이었다.
“에르델,제국 역사상 얼마나 많은 암중세력이 있었는지 아느냐?”
뜬금없이 암중세력을 입 밖에 꺼내 다니?
하지만 마냥 뜬금없다고 치부하긴 이르다.
지금 강현과 에르델은 이세계인 조 직이란 암중세력을 상대하고 있으니 까.
강현이 임모벨 백작에게 조직에 대 해 말한 게 틀림없었다.
에르델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강현을 쳐다보았다.
‘저기요,최강현 경? 조직에 대해
말한 거예요?’
기밀사항을 유출해도 되냐고 따지 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강현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생선 요리에 나이프를 댈 뿐이었다. 임모벨 백작의 말은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암중세력이 제국을 전복 시키려 했었고 무너졌지. 너희가 말 하는 조직이라는 곳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많은 머저리들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구나.”
조직을 일개 조무래기 세력으로 치 부하여 에르델을 말리려는 것으로 보였다.
에르델은 식사를 뒷전으로 미룬 채 반론을 펼치려 했다.
“할아버지께선 그리 생각하실지 몰 라도 전……
“하지만 그 작자들이 널 노린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내가 직접 작전에 동참하마.”
“할아버지께서 동참하시는 건 말도 안 되는…… 네?”
“내가 따라가서 널 직접 호위해 주 마. 은퇴했다지만 널 지킬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단다.”
“저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확실히 임모벨 백작이 따라나서면 전력증강은 물론이고,여행길도 한 결 편해질 거다.
하지만 그토록 위험한 작전을 반대
하던 사람이 하룻밤만에 의견을 뒤 집을 수 있는 건가.
어제 술자리에서 강현이 무언가 한 게 분명하다.
에르델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태연 하게 식사 중인 강현을 보았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심지어 임모벨 백작은 강현의 손바 닥 위에 있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 는 듯했다.
정말이지 수완 하나는 알아줘야 했 다.
그리하여 쉬프 섬까지 가는 일정에 임모벨 백작이 동참하게 되었다.
*
드리안 공작가의 저택에 공작파에 속하는 귀족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황실의 소환에 응하지 않으려 는 게 뻔히 보이는 움직임이었으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두 공작파에겐 사형 아니면 내전밖 에 없다.
내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어차피 황제파도 다 알고 있는 사 실을 숨기려고 지지부진 움직일 바 엔 차라리 강하게 나가는 게 나았 다.
드리안 공작가에 모여든 귀족 증에 는 케이델 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리안 공작과 케이델 공작이 모인 와중에 황궁에서 몰래 찾아온 사람 이 있었으니…….
드리안 공작의 서재.
파이프에 불씨를 당긴 드리안 공작 이 연기를 퍼트리며 입을 열었다.
“디벨롭이라 했던가? 드래코프 황 자님이 보내서 왔나?”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디벨롭이 었다.
슈타인 백작의 일기가 공표될 때부 터 내전을 예상했던 디벨롭이다. 제국이 뒤집어지길 바라는 조직의 입장에선 이번 내전이 반가울 수밖 에 없었다.
이는 연락망이 부서진 현 상황에서 조직이 회복할 수 있는 몇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디벨롭은 자신에게 뿜어지는 담배 연기를 손짓으로 흐트러뜨리며 말했 다.
“내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드 리겠습니다.”
“하하하,희극이 따로 없군. 황족이 황족의 패배를 바란다? 삼류 음유시 인이나 지어 낼 법한 말이로군.”
드리안 공작은 반쯤 타들어 간 성 냥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디벨롭의 신발에 성냥이 떨어지며 가죽 신발의 일부가 그을렸다.
가죽 타는 냄새와 담배 연기가 뒤 섞이며 디벨롭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나 디벨롭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전이 성공한다고 칩시다. 두 공 작님 중 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겁니까?”
“그건 성공한 후에 논해도 늦지 않 을 것이네.”
“과연 그럴까요? 설사 두 분 사이 에 합의가 이루어져 한 분이 오르신 다 하더라도 대륙의 만백성들은 인 정하지 않을 겁니다. 빌로스 제국 500년 역사 동안 황가의 혈통만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 었습니다. 이제 와서 관습을 뒤집긴 어려울 테지요.”
내전에서 이긴다고 제국을 차지하 는 건 아니다.
황제는 상징적인 존재일 뿐,실제 로 제국을 굴리는 건 수많은 지방영 주들과 집무관들이다.
귀족들은 혈통을 중시하기에 황가 의 핏줄이 아니면 충성하지 않는다. 내전에서 승리하더라도 꼭두각시로 내세울 황족이 필요했다.
케이델 공작은 꿀이 담긴 사탕을 입에 넣으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드래코프라면 꼭두각시 역할로는 적격이지. 그러면 말해 보게. 내전 성공을 위해서 무엇을 도와줄 생각 인가?”
“크레인 공국,하니온 공국을 설득 해 드리겠습니다.”
제후국들은 제국 황실이 위협 받으
면 군대를 파견해야 할 의무가 있 다.
내전이 발생하면 두 공작파는 제후 국들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황실 을 점령해야만 했다.
한데 제후국들이 핑계를 대며 군대 파견을 미룬다면 그만큼 편하게 내 전을 진행할 수 있다.
드리안 공작이 재떨이에 파이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브리니아 공국은 제쳐 두는 건 가?”
“최강현이 브리니아의 기사인 걸 잊으셨습니까?”
“그 건방진 자식이 있는 이상 브리 니아를 설득하는 건 힘들다 이거군.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야. 이번 기회에 확 실히 제거해 버려야겠어.”
마치 제거할 기회라도 생긴 것처럼 말하고 있다.
디벨롭은 금시초문인 일인지라 의 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드리안 공작이 말한 ‘이번 기회’란 대체 뭐란 말인가.
그사이,드리안 공작은 연기를 길 게 내뿜으며 확답을 내놓았다.
“일단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그쪽이 하니온 공국과 크레인 공국 설득하는 동안 우린 황궁 바깥 으로 나온 최강현과 에르델을 정리 하고 있겠네. 약속은 구두협약으로 마무리해도 되겠나?”
“물론이지요. 괜히 서면을 남겨서 서로 불편한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 까요.”
“슈타인 백작의 일기 같은 물건은 없길 바라겠네.”
서로 이해가 일치했기에 잡음 없이 협약이 체결되었다.
서재에서 나온 디벨롭은 빠르게 저 택 뒷문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황궁 쪽에서 강현에게 수작질을 부 린 모양이다.
수작을 부린 건 황궁의회인가,드 래코프인가.
굳이 물이 오른 강현을 건드리지
않아도 방법이 있건만 그사이를 못 참고 수를 취했나.
강현이 움직이게 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연락망이 붕괴된 탓에 정보가 느린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샹데르에 남아 있을 김진수에게 연 락을 취하는 수밖에.
디벨롤은 희멀건 얼굴을 구기며 어 금니를 꽉 깨물었다.
“누군지 몰라도 쓸데없는 짓을 해 주었군.”
*
강현이 모는 마차가 임모벨 영지를
떠났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싣고 있는 짐 과 사람이 늘어났다는 정도일까. 출발한 지 1시간도 안 되어 마부 석 쪽 창이 열리며 불평불만이 튀어 나왔다.
“좀 더 조심해서 몰지 못하겠나? 에르델이 잠을 못 자잖나.”
강현은 무심하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했다.
“좌석 밑에 사과주가 있습니다. 마 시면 금방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음? 좌석 안에 침낭이 있군. 설마 노숙하게 되는 일이 있는 건 아니겠 지?”
“그건 제 겁니다. 의자를 분리해서
마차 안에 간이침대를 만들 수 있습 니다. 노숙해야 되면 두 분은 안에 서 주무시면 됩니다.”
“이 많은 간식거리는 뭔가?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나?”
“간식거리의 용도는 에르델 황녀님 께 물어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마차 안에 있던 에르델이 다소 부 끄러워하며 손을 들었다.
“가는 길에 입이 심심할까 봐 준비 한 거예요.”
임모벨 백작은 꼬장꼬장한 태도를 유지하며 마차 안을 휙획 둘러보았 다.
신경질적인 시어머니마냥 창문틀을 검지로 훑었다.
마차 내부 관리까지 빈틈없이 잘되 어 있어 먼지 한 톨 없었다.
한 소리 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트집 잡을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임모벨 백작은 좌석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퉁명스레 말했다.
“쳇,깐깐한 녀석이군. 언행만 보면 잡일에는 손 하나 대지 않을 것 같 은 인상인데 말이지.”
“보기에는 저래도 세세한 곳까지 잘 신경 쓰는 성격이에요.”
“왜 저 녀석 변호를 해 주고 그러 느냐?”
“할아버지가 너무 적대적인 거예 요. 정말 도와주시려고 하는 거 맞 아요?”
“당연한 걸 묻는구나. 일부러 먼 길을 동행해 주지 않느냐.”
“도와주실 거면 차분하게 계셔 주 세요. 전 좀 자야겠어요.”
어제 걱정하느라 잠을 설친 에르델 이다.
한숨 자기 위해 좌석 밑 수납장에 서 강현이 준비한 사과주를 꺼냈다. 그를 본 임모벨 백작이 바리바리 준비한 배낭 안에서 물병을 꺼내 들 었다.
물병 안에는 갈색 물과 연근 조각 몇 개가 떠다니고 있었다.
“마실 거면 이걸 마시려무나. 연근 을 달인 물이란다.”
“나중에 마실게요. 지금은 사과주
가 더 좋을 것 같아요.”
“너 왜 변비가 심하잖느냐. 연근물 이 변비에도 좋단다. 여행 중에는 참다가 병나는 경우가 많잖니. 이걸 마시면 쑥쑥……
“아악! 말 좀 가려서 해요! 강현 씨가 듣고 있잖아요!”
“난 그냥 몸에 좋으라고……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안 좋아요! 자꾸 그러시면 돌려보낼 거예요!”
“끄응.”
할아버지,할머니의 물건은 민간요 법의 집대성이라 했던가.
매우 실용적이긴 하다만 젊은이의 감성에는 안 맞는 경우가 많았다.
기어코 에르델이 발끈하면서 임모 벨 백작은 어깨를 움츠리고 말았다.
임모벨 백작은 속으로 괜히 강현을 탓했다.
‘끄응,나도 세심하게 배려해 준 건데 왜 나한테는 화를 내지? 최강 현 저 녀석이 문제군. 저 녀석을 신 경 쓰느라 이 할애비한테 무심해진 게 틀림없어.’
임모벨 백작은 에르델이 자는 내내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의 위엄(?)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약 3시간가량 달리던 마차는 정오 즈음에 멈춰 섰다.
한적한 계곡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빵과 스프로 이루어진 조촐한 식사 후
임모벨 백작이 적당한 나뭇가지를 집어 올리며 강현에게 다가섰다.
“지금은 자네가 브리니아 공국 최 고의 기사로 불린다지? 식후 운동할 겸 대련 한 판 어떤가?”
강현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제안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