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화
‘이빨 빠진 늙은이들 주제에 날 먼 저 버려? 나 엘리오스 킨 메이아 롤?’
황궁의회와 결탁하면 강현을 몰아 세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궁지에 몰린 건 메이아 자신이었다.
일기를 가져간 게 강현이라는 것까 진 알고 있었다.
하나 그 일기를 브리니아 공국으로 보냈다 들었는데,설마 아직까지 강 현이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슈타인 백작의 일기를 통해,자신 이 역모를 꾀한 무리와 결탁했다는 게 알려지면 황족이라 한들 무사할 수 없다.
최소한 유배,그것도 외딴 곳에 떨 어진 섬에 갇혀서 살아야 할 거다. 메이아로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 다.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켜야 했다.
메이아는 슈타인 백작의 일기를 물 고 늘어졌다.
“다들 너무 휘둘리는군요. 최강현 단장,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그 일 기의 출처는 어떻게 되지요?”
강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있는 그 대로 일기의 출처를 밝혔다.
“그건 메이아 황녀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당신의 침실 금고에서 나온 물건입니다.”
“그 말은 얼마 전 제1별궁에 침입 한 절도범인 걸 인정하는 건가요? 황족의 물건을 훔친 것 또한 역모죄 와 동급이란 걸 아시나 모르겠네 요.”
물귀신 작전이었다.
강현에게도 동급의 죄를 적용하여 진흙탕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속셈이 었다.
진흙탕 싸움이 되면 시간을 끌 수 있다.
현 상황만 모면하면 어떻게든 재정 비를 하여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면 된다.
그러나 틈을 줄 강현이 아니었다. 강현이 에르델을 힐끗 보았다. 사전에 대책을 얘기한 적은 없었기 에 임기응변이 필요했다.
에르델이 눈치껏 엄호에 나섰다.
“제가 수사 지시를 내렸어요. 수사 결과 허탕이었다면 문제였겠지만 명 백히 역모의 증거를 잡아냈죠. 어디 더 할 말 있으신가요?”
“에르델,기어코 날 역모죄로 몰아 넣어야 속이 풀리겠어?”
“어머,제가 몰아넣은 게 아니라 언니가 자의로 역모를 꾀한 무리와 손을 잡은 게 아니었던가요? 리바시 치 의회장,방금 언니 스스로 침실 에 역모의 증거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는데 더 이상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결국 물귀신 작전도 무위로 돌아갔 다.
안 그래도 나쁜 상황을,메이아 본 인이 더 나쁘게 만든 꼴이 되었다.
리바시치는 잡아먹을 듯 자신을 노 려보는 메이아를 보곤 식은땀을 홀 렸다.
그러나 메이아가 아무리 발버둥 쳐 도 전개된 상황이 너무 명명백백했 다.
이내 곧 리바시치의 입에서 메이아 의 처분에 대한 말이 흘러나왔다.
“슈타인 백작가 사건 재조명과 메 이아 황녀님,드리안 공작,케이델공작에 대한 처분은 황제 폐하의 결 정에 맡기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참 석을 권한 이후에 다시 기일을 잡도 록 하지요. 그동안 메이아 황녀님은 제1별궁에서 근신해 주십시오.”
메이아가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거 칠게 일어서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 렀다.
황녀로서의 품격이나,의회의 예절 은 온데간데없고 악바리만 남은 거 친 말이 쏟아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내 작 전이 좋다고 동의할 땐 언제고 상황 이 바뀌니까 날 버리겠다고? 리바 시치,네놈 따위가 감히 내게 근신 을 명해?”
“메이아 황녀님의 상태가 매우 불 안정해 보이니 얼른 제1별궁으로 모 셔다 드려라.”
“손대지 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 는 거야!”
황궁의회장은 모셔다 드리라고 하 고,메이아 황녀는 건드리지 말라고 한다.
경비병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 지 몰라 주춤거렸다.
그러던 차에 드래코프가 일어나 자 신의 호위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 다.
“경비병들에겐 부담스러운 일이니 너희가 모시도록.”
드래코프의 호위기사들이 메이아의
팔을 붙들고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우악스럽게 끌어당기는 기사들 사 이에서 메이아가 구두 굽을 바닥에 찍으며 볼씽사납게 버티려 했다.
“놔! 이거 놓으라고! 감히 어딜 만 져! 제1계승권자에게 이러고도 무사 할 줄 알아? 드래코프 이 자식! 어 디서 허튼수작이야!”
발버둥치느라 구두굽이 부러지고, 단아하게 정돈한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었으며,치맛자락은 먼지로 얼룩 졌다.
엉망진창이 된 메이아는 기어이 밖 으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메이아가 나가자마자 드래코프가 말을 이었다.
“나 엘리오스 킨 드래코프는 슈타 인 백작가 사건에 대한 조사가 미흡 했음을 인정하고 재조사에 들어가겠 네. 다음 회의 기일이 잡히면 알려 주게나.”
슈타인 백작가 사건 공판 때 드래 코프도 두 공작을 옹호했었다. 하지만 조사 미흡이라고 미리 못 박아 둠으로서 드래코프 자신만 쏙 빠져나가 버렸다.
드래코프의 뒤에는 보좌역으로 회 의에 동참한 디벨롭이 서 있었다. 드래코프의 발 빠른 대처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한바탕 파란이 일어났던 회의도 마
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리바시치는 거짓 보고를 올렸던 퀵
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의 처분을 결 정하고 얼른 회의를 끝내고자 했다.
“거짓 보고를 한 퀵실버 기사단 생 존들은 전원 기사직을 박탈하며 위 증을 한 죄목으로 향후 3년간 수감 을 명한다.”
다들 지친 나머지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의 처분은 아무래도 좋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강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는 듯 말을 꺼냈다.
“리바시치 의회장님,퀵실버 기사 단 생존들의 처분은 공국에서 하고 싶은데 그리해도 될는지요.”
“옥살이로도 충분하지 않나?”
“저들 때문에 대륙 전체의 돌팔매 를 맞을 뻔했습니다. 이젠 제국의 기사도 아닌 작자들이니 공국에서 처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 사료됩니다만.”
어찌돼도 좋을 조무래기 기사들 때 문에 강현과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 았다.
리바시치는 더 이상 두통이 심해지 는 건 사양인지라 귀찮다는 듯 기사 들의 처분을 떠넘겼다.
“이들은 이제 황궁과 아무런 관련 이 없는 자들이니까 알아서 처분하 게. 그럼 이걸로 오늘 회의를 끝내 겠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은 우두커니 서 있 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쩌억 벌린 채로 리바시치가 나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회의장 안에서 썰물 빠지듯 사람들 이 빠져나갔다.
강현은 회의장 경비병들을 불러 세 웠다.
“어이,이놈들을 묶어 둬.”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이 주저앉 듯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빌었다.
“저,저희가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제발,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메이아 황녀님의 압박 때문
이었습니다. 저희 같은 자들이 황족 앞에서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빌어도 안 되겠습니까?”
강현은 다가오던 경비병 중 한 명 이 들고 있던 밧줄을 낚아챘다. 그 러곤 기사 중 한 명의 머리를 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쾅!
숙련된 조교마냥 부드러운 움직임 이었다.
강현은 기사의 머리를 바닥에 누른 채로 밧줄을 두르며 차갑게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공국에 도착하면 그냥 풀어 주라 할 테니.”
행동과 말에서 강한 괴리감이 풍겨 나왔다.
강현은 차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퀵 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이 당할 일을 읊어 주었다.
“너희를 싣고 갈 수레로는 사방이 훤히 뚫린 감옥 수레가 좋겠지. 수 레에 왜 끌려가는지 써 붙여 놓으면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
“최강현 단장님! 그것만은 제발!”
“돌팔매는 기본이겠고, 날붙이가 날아들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살려 주십시오! 정말 진심으로 반 성하고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살려 준다 하지 않았나? 물과 음 식 없이 한 달 동안 버틸 경우지만 말이지. 인복이 있다면 누군가는 사 식을 넣어 줄지도 모르겠군. 뭐,행운을 빌지.”
말을 마친 강현이 매몰차게 뒤를 돌아보았다.
반성이란 재기의 기회가 있을 때나 쓸모가 있는 법이다.
물러날 때를 착각한 자들에게 베풀 동정 따윈 없다.
디벨롭의 움직임이나 확인해 둬야 겠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패배자들의 목 소리는 귀에 들려오지 않은 지 오래 였다.
?
황궁 바깥에 위치한 강변의 이세계
인 술집.
5층 높이에 위치하여 샹데르의 야 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조명은 은은한 촛불이 전부인지라 분위기 잡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테라스에 위치한 테이 블에 강현이 앉아 있었다.
럼을 뺀 롱 아일랜드 한 잔으로 시간을 때우던 중 적발의 사내가 찾 아와 맞은편에 앉았다.
디벨롭이었다.
디벨롭은 자연스럽게 점원에게 주 문을 했다.
“진 토닉. 더블로.”
강현은 잔을 입에 대었다가 떼며 말했다.
“답지 않게 단순한 걸 마시는군.”
“고상함을 바랄 사이는 아니지요. 남자끼리 데이트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용건부터 듣고 싶군요.”
회의가 끝난 후에 강현이 따로 디 벨롤에게 연락을 넣었다.
할 말이 있으니 지정한 장소로 나 오라 했고,디벨롭이 거기에 응함으 로써 이처럼 마주한 것이었다.
서로 대립하는 사내들끼리 분위기 나 잡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강현은 점원을 불러 빈 잔을 채우 곤 찬찬히 대화의 장을 열었다.
“잘도 메이아를 버리더군. 처음부 터 드래코프만 남겨 둘 생각이었 나?”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과가 말해 주고 있을 텐데요?”
“가라앉는 배에서 귀찮은 짐부터 버리는 건 옳은 선택이지.”
“한두 번 버텨 낸 걸로 이겼다 착 각하십니까?”
“타이타닉의 승객들은 배가 기울 때까지 가라앉는 줄 몰랐다지?”
“디카프리오가 되는 건 그쪽일 수 도 있지요.”
“웨이브의 진실에 대해 말하고 싶 은 생각이 들지 않나? 혹시 모르지. 목적을 달성한 내가 공국으로 물러 날지도.”
“일부러 후환을 남기고 철수한다? 잘도 뻔한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얕잡아 보시는 겁니까?”
“아까부터 그랬는데 알아차리는 게 느리군.”
좋게 화해하고 물러나기에는 너무 깊은 골이 패였다.
어느 한쪽이 끝장나지 않으면,끝 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디벨롭은 주문한 진 토닉이 나왔지 만 잔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저 야경을 배경 삼아 붉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마음껏 즐겨 두십시오. 조 만간 우리에게만 좋은 일을 시켜 주 었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디벨롭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패색 이 짙은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직 사용할 만한 남은 수단이 있 는 모양이다.
재가 될 때까지 싸울 거란 의사를 확인한 이상 대화의 여지는 없었다. 강현은 너저분하게 서로 노려보느 니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싸움을 기대하겠다는 따위 의 건방진 말은 지껄이지 않게 되었 군.”
처음에 디벨롭이 강현에게 접촉하 며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강현 이었다.
디벨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 다. 그저 진 토닉만 입에 붙이며 홀 짝거렸다.
강현이 그대로 술집을 떠나면서 테
라스엔 디벨롭 홀로 남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술로 달래던 차에 점원이 계산서를 가져다주었 다.
계산서에는 강현이 마신 롱 아일랜 드 두 잔이 포함되어 있었다.
디벨롤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계산서를 검지로 튕겼다.
“재수 없는 자식.”
*
빌로스 제국 북부의 드리안 공작 가 저택.
드리안 공작은 들고 있던 서신을 바닥에 팽개쳤다.
“빌어먹을 계집년이! 남의 심장을 함부로 움켜쥐더니 그것마저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이 사태를 만들 어?”
구겨진 서신이 카펫 위를 굴렀다.
방금 막 황궁으로부터 도착한 서신 이었다.
두 공작을 황궁으로 소환한다는 내 용이 담겨 있었다.
공국으로 넘어간 줄 알았던 슈타인 백작의 일기가 황궁 안에서 공표되 어 버렸다.
이걸로 두 공작은 역모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단두 대에 목을 걸칠 순 없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드리안 공작은 홧김에 숨을 씩씩 몰아쉬다가 바깥을 향해 고함을 질 렸다.
“근방의 귀족들을 전부 소집해라! 케이델 공작에게도 이리로 오라고 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