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화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은 장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큰 변화는 강현을 보는 눈빛 에 짙은 적의가 담겼다는 점이었다. 공국의 마나 마스터가 제국의 마나 마스터를 죽였다.
그것도 둘씩이나.
이는 강현 하나 처벌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벤젠 기사단 전원 처벌은 물론이 고,에르델과 공국의 안전에까지 영 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리바시치는 추궁하듯 강현에게 말 했다.
“최강현 단장,퀵실버 기사단 기사 들의 증언을 어떻게 생각하나?”
강현은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을 줄곧 보고 있었다.
그들이 끝까지 강현 쪽을 보는 일 은 없었다.
완전히 등을 돌린 셈이다.
보상은 아마 모든 공적을 네 사람 에게 몰아주는 것이겠지.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르다더니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상 황이다.
강현은 리바시치에게로 시선을 돌 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하워드 경과 오브렌 경이 먼 저 배신했다고 보고 드렸습니다.”
“고장 난 뻐꾸기시계를 상대하는 것 같군. 자네는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나?”
“방금도 말씀 드렸지만 제가 먼저 배신했다면 저들까지 처리했을 겁니 다.”
“그 부분에 관한 추가 증언을 들어 보도록 하지.”
리바시치가 단상 아래의 기사들에 게 턱짓을 했다.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을 늘어놓았다.
“벤젠 기사단만 살아남으면 의심 받을지도 모르니까 저희는 살려 준 다 했습니다. 장단만 잘 맞춰 주면 콩고물이 떨어질 거라는 말로 유혹하려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그 말을 한 자가 누구 지?”
“최강현 단장입니다.”
양옆으로 늘어서 있던 황궁의원 및 집무관들이 분개하며 강현을 매도했 다.
“얼마 전까지 용병이었던 놈이라 그런지 지켜야 할 도리조차 없나 보 구나! 리바시치 의회장! 당장 저놈 을 매달아야 합니다!”
“더 들어 볼 것도 없습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 극악무도한 놈을 포박하지 않고!”
묶어라,죽여라,극악무도한 놈이 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매도의 말이 비 수가 되어 강현을 찔렀다.
사람 하나 깔아뭉개기가 이리 쉽 다.
억지로 시궁창에 밀어 넣어 놓고 우르르 몰려들어 짓밟으면 깨끗한 사람도 더럽게 물들기 마련이다. 주사위의 눈이 1이 나와도 모두가 우기면 6이 되는 곳.
그게 바로 이곳,제국의 황궁이었 다.
강현은 옆눈으로 주변을 쓰윽 둘러 보았다.
에르델도 이런 식으로 당했겠군.
나락공주라 놀리는 것도 그만둬야 겠는걸.
리바시치는 강현이 한껏 비난 받도 록 놔두었다가 뒤늦게 팔을 저었다.
“정숙! 모두 정숙하게! 자,최강현 단장. 더 이상 할 말이라도 있나?”
강현이 턱 끝을 세우고 입을 열었 다.
“황궁의회는 퀵실버 기사단의 보고 는 인정하면서 제 보고는 무시하는 겁니까?”
“엄중한 검토 결과,퀵실버 기사단 의 보고가 더욱 신빙성이 높았네.”
“그 엄중한 검토라는 게 구체적으 로 어떤 것인지요?”
“지금 황궁의회의 결정을 의심하는 것인가?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반론 이 있다면 어디 내밀어 보게!”
메이아와 황궁의회가 손을 잡고 강 현 뭉개기에 나섰다는 건 의심할 여 지가 없다.
하지만 메이아와 황궁의회,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은 건드릴 사람을 잘못 선택했다.
내가 두드려 맞고 가만히 있을 호 인으로 보이나 보군.
강현은 내심 차갑게 웃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걸론 성이 차 지 않는다.
이리 성대하게 판을 벌여 주었으니 몇 배로 돌려줘야 예의 아니겠는가. 냉소를 머금은 강현이 아공간 주머 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황궁의회의 판단력을 의심할 수밖
에 없지요.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 까?”
모두의 눈길이 강현이 꺼내 든 수 첩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모르겠다는 표정 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수첩을 어찌 알겠 는가?
하나,중인들과 달리 얼굴이 딱딱 하게 굳어 버린 일인이 있었다.
바로 단상에 앉은 제1황녀,메이아 였다.
강현이 꺼내 든 물건은,다름 아닌 슈타인 백작의 일기였던 것이다. 물건의 정체를 모르는 리바시치는 여전히 고자세를 취하며 빈정대듯 말했다.
“그 따위 꼬질꼬질한 수첩을 꺼내 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건 슈타인 백작의 일기입니다.”
“슈타인 백작의 일기 따윌…… 뭐?”
쿠당탕!
놀란 리바시치가 벌떡 일어난 탓에 단상 위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성난 표정으로 일관하던 황궁의원 들도 하나같이 입을 쩌억 벌렸다. 실로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설마 슈타인 백작가 사건을 다시 재점화시킬 수 있는 물건이 이 시점 에 등장하다니.
아니,단지 들춰내는 뿐으로 멈추 지 않는다.
일기의 내용에 따라 무죄로 판정된 두 공작의 죄가 다시 낱낱이 드러날 것이며,두 공작에게 줄을 대거나 옹호했던 자들 역시 그 영향력으로 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즉 저 수첩 하나로 황궁의회의 존 재감 자체가 통째로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일기를 보관했던 장본인인 메이아 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리바시치 의회장! 본건과는 관계 없는 증거물이에요! 현재 안건이 마 무리된 이후에 따로 제출하라고 명 령하세요!”
강현은 단칼에 메이아의 의견을 묵 살했다.
“이 수첩은 황궁의회의 판단력을 논할 수 있는 증거물입니다. 본건과 관계가 있으니 무의미한 발언은 삼 가 주십시오.”
“무의미한 발언? 일개 기사가 감히 그따위 말을……
“리바시치 의회장님,전 당신의 요 구에 따라 반론을 하려고 하는데 자 꾸 훼방을 놓는 분이 계시는군요. 의회장은 원활한 회의진행을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 텐데요?”
리바시치는 입을 우물거렸다.
강현에겐 자신의 요구에 응할 의무 가 있었다.
무엇보다 의회장으로서 직접 강현 의 반론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그 말을 무를 수도 없 는 노릇이었다.
리바시치는 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강현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메이아 황녀님은…… 물러나십시 오.”
“리바시치 의회장!”
“그에겐 반론할 권한이 주어졌습니 다.”
“그럴 수가……
메이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이리된 이상 황녀라 해도 어 쩔 수 없었다.
자,이제 반격의 시간이다.
강현은 본격적인 반격에 들어서며 일기의 내용을 옮었다.
“일기가 공개되면 곤란한 것 같은 사람의 난입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하겠습니다. 이 일기는 슈 타인 백작의 자필로 작성됐으며 표 지 뒷면에 슈타인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내용의 대부분은 두 공작가와 역모에 대해 논한 것들입 니다.”
“슈타인 백작이 일부러 역모의 증 거를 남겼다고 말하고 싶은 겐가.”
“두 공작이 슈타인 백작을 희생양 으로 쓸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겠지 요. 여기서 묻겠습니다. 황궁의회는 두 공작이 역모를 꾀했음에도 불구하고,두 공작에게 무죄 판결을 내 렸습니다. 황궁의회가 잘못 판단을 한 걸까요? 아니면 황궁의회도 역모 를 꾀한 무리와 내통하고 있는 걸까 요?”
한순간에 역모죄로 몰릴 위기에 놓 인 황궁의원들이었다.
일렬로 늘어서 있던 황궁의원들이 펄펄 뛰며 역정을 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게! 어디서 감히 누굴 역적으로 모는 겐가!”
“당장 취소하게! 그러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걸세!”
강현은 노발대발하는 황궁의원들을 상대로 주눅 한 점 들지 않고 태연 하게 말을 꺼냈다.
“여러분은 역모를 꾀한 적이 없다 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당연한 것을!”
“그럼 두 공작에게 무죄 판결을 내 린 건 순전히 여러분의 오판이었던 거군요.”
“그,그렇게 되는 건……
오판임을 인정하면 강현은 자유로 워지는 한편 두 공작이 위태로워진 다.
반면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역 모가담을 인정하는 꼴이다.
황궁의원들은 완전히 놀아나고 있 음을 깨달았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우리가 멍청하다는 걸 우리 입으로 말하라고?’
‘하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역모죄 르...’
누구 하나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얼 굴이 붉게 물들지 않는 자가 없었 다.
그런 한편 별다른 수가 없었으
q??????.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는 어쩔 수가 없었다.
황궁의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말 했다.
“크옥,우리들의 오판일세.”
강현은 원하는 대답을 듣곤 리바시 치 쪽을 바라보았다.
“황궁의회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
는 게 증명되었군요.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이 옳다고 여긴 판 단에도 문제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 니다만,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덧 리바시치의 표정은 한껏 구 겨져 있었다.
자신이 황궁의회장이 된 이후 수 년간,이토록 황궁의회가 바보 취급 당한 적이 있던가.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다.
분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 다.
강현은 말이 없는 리바시치를 향해 느긋한 모습으로 답을 요구했다.
“판단이 느린 건 이해해 드리겠습 니다. 천천히 생각하시고 대답하시지요.”
“최강현 단장,신나서 날뛰는 건 좋지만 선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 지 않나?”
“매달아라,묶어라,죽여야 한다, 용병 출신이라 법도가 없다. 이 말 들은 선을 지킨 말인가 보군요. 황 궁의회의 흐릿한 판단력 때문에 목 이 날아갈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친 절한 기사단장처럼 굴라고 하시는 건 어폐가 있다 생각되지 않으십니 까?”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니 나중에 따로 사과하겠네.”
“공식선상의 잘못은 공식적으로 사 과하셔야지요. 소리친 사람들을 가려내어 자필로 사과문을 쓰고 성문 앞에 대자보를 붙이십시오.”
황궁의회의 치부를 스스로 온 세상 에 알리라고?
가능할 리가 없다.
리바시치는 말을 할수록 불리해져
만 가는 걸 느꼈다.
피해를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의
피해로 끝내야만 했다.
“크옥,비난했던 자들이 이 자리에
서 사과하는 걸로 마무리해 주게 나.”
강현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더니 턱 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의회장께서 그리 간절하게 부탁하 신다면 이 자리에서 사과 받는 걸로 참아드리 겠습니 다.”
황궁의원들은 어처구니가 없어 리 바시치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리바시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마무리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일개 기사를 향해 하나둘 허리를 숙이는 황궁의원들.
황궁의원들을 일일이 내려다보고 있는 일개 기사.
참으로 진풍경이었다.
여태껏 황궁 안에서 이토록 겁 없 이 구는 자가 과연 있었던가.
강현은 역전된 상황 속에서 무덤덤 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성의가 느껴지지 않지만 이걸로 넘어가드리지요.”
자신을 시궁창에 빠트려 밟아 둥개 려던 작자들이다.
갚아 줄 땐 뭉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잘근잘근 밟아 줘야 하지 않겠 나.
이제 남은 건 퀵실버 기사단 생존 자들뿐이다.
그들의 눈빛에 후회가 알알이 물들 어 있었다.
후회한들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 다.
강현은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을 매몰차게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리바시치 의회장님, 현재 황궁의 회의 판단은 믿을 수 없으니 타 기 관에서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의 증언을 검토했으면 합니다. 황궁의 회가 검토했다던 증거들을 볼 수 있 을까요?”
애당초 하루만에 검토가 이루어졌 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있을 리 없는 검토 과정이 갑자기 생겨날 리가 없다.
강현 역시 그걸 알면서 일부러 증 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황궁의회를 더더욱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황궁의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 다.
시간을 끌어서 없는 증거라도 만들 어 내거나,모든 걸 메이아 탓으로 돌리거나.
리바시치는 고민 끝에 후자를 택했 다.
“모든 건 메이아 황녀님의 강력한 주장에서 비롯되었네.”
황궁의회가 먼저 메이아를 버렸다.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배신으로 흥하려던 자 배신으로 망 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던가. 메이아는 부들부들 떨며 손톱이 파 고들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