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화
각종 암중모략이 이어지는 황궁과 달리,벤젠 기사단 숙소는 축 늘어 져 있었다.
이렇게 늘어진 데에는 육체적으로 피곤한 것도 있지만,정신적인 피로 도 한몫했다.
숙소 옥상에선 빅터와 웨인포드, 루크,음디티가 모여 곰방대에 담뱃 가루를 쑤셔 넣고 있었다.
“휴우,이번에도 어찌어찌 살아남 았군.”
“몸이 노곤노곤해지는구만. 이런 날에 차게 식힌 맥주 한 잔 먹고 자면 죽여줄 텐데 말이지.”
“사방이 적인데 방심할 틈이 어디 있겠어. 지금이 중요한 때니까 긴장 풀지 말자고.”
딱히 강현이 술과 애인,오락을 금 지시킨 건 아니다.
하려면 할 수는 있으나 기사들 스 스로 방심할 수 있는 부분을 차단하 고 있었다.
작은 실수로 피해를 입는 게 자신 만이면 모를까,기사단 전체에 누를 끼칠 수도 있으니 주의해서 나쁠 건 없었다.
웨인포드는 담배 연기 첫 모금을 아스라이 퍼트리며 말했다.
“근데 단장님은 뭘로 스트레스를 푸실까? 우리 중에서 가장 많이 스트레스가 쌓였을 것 같은데.”
“심심하면 책을 보시는 것 같더라 고. 아니면 혜림 양이랑 차를 마시 거나.”
“담백하구만. 분명 원래 세계에서 범생이였을 거야.”
“웨인포드,넌 도박 중독자라 했었 지?”
“도박 중독자가 아니라 짤짤이라고 불러. 그걸로 돈 벌면서 지냈다고.”
“그게 그거지.”
“그리 따지면 펀드 매니저는 주식 중독자라 불려야지.”
“펀드가 무슨 주식만으로 수익을 내냐?”
“도박도 뭐 한 가지만으로 수익을
내는 줄 아나 보네. 그날그날 종목 을 정해서 투자하는 건 마찬가지 야.”
잡담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기사들 은 시시콜콜한 주제로 분쟁을 벌였 다.
그러나 봉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인 만큼 언제나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상관 뒷담화였다.
“근데 언제까지 혜림 양을 가만히 둘 거래? 나 같으면 그냥 확 승부 보고 치웠겠다.”
“또 시작됐구만. 벤젠 기사단 명물 대화 주제. 이제 그 이야기 지겹지 도 않아?”
“군대 이야기,연애 이야기,왕년
이야기는 단물을 충전해서라도 다시 씹으라는 말이 있잖냐.”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 라 단장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건 아니지. 본인이라면 이렇게 말했을걸. 내가 어디 가서 죽을 사 람으로 보이나?”
“킥킥킥,본인이랑 똑같네,똑같 아.”
“진짜 똑같네. 웨인포드한테 이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다른 것도 따 라해 봐.”
좋은 반응이 나오자 웨인포드가 흥 에 취해서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강 현을 흉내 냈다.
“머리가 나쁘군. 다들 그 정도 계 산은 할 수 있지 않나? 난 똑똑해 서 이미 다 알고 있지.”
아까보다 더 강현에 가깝게 흉내를 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적절한 애드리브까지 가미 했으니 모두가 배꼽을 부여잡을 거 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빅터,루크,음 디티에게서 반응이 없었다.
세 사람은 담뱃재가 흘러 바지를 더럽히는 것도 모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불어 세 사람의 표정은 웨인포드 의 등 뒤에 꽂힌 상태였다.
웨인포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설마 하는 생각으로 뒤를 돌 아보았다.
그 순간,그의 얼굴에도 담뱃재처 럼 잿빛이 어렸다.
아니나 다를까,둥 뒤편에 강현이 서 있었다.
“뜨헉! 다,단장님 오셨습니까?”
담배를 피우지 않는 강현이 옥상으 로 올라올 줄이야.
강현은 옥상 문턱 너머에 서서 건 물 안쪽을 향해 턱짓을 했다.
“에르델 황녀님께서 술을 보내 주 셨으니 내려와.”
SSS랭크 웨이브를 공략하느라 수 고했으니 오늘 저녁 정도는 즐겨도 된다는 뜻이었다.
할 말을 전한 강현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성대모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 던 강현의 발소리마저 이내 잦아들 었다.
웨인포드가 곰방대를 떨어뜨리며 빅터에게 매달렸다.
“빅터,단장님께 장난이었다고 해 줘.”
“뭐 괜찮지 않을까?”
“정말?”
“기껏해야 몇날 며칠 동안 단장님 과 일대일로 대련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겠어?”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기야? 너 희들이 시켰잖아!”
“빅터,얼른 떨어져! 저 녀석 단장 의 저주에 걸렸어! 같이 있다간 단 장과의 대련에 휘말릴지도 몰라!”
“아차,큰일 날 뻔했네. 땡큐,루 크.”
장난스럽게 멀어지는 동료들을 보 며 웨인포드가 절규했다.
“야이,나쁜 놈들아!”
*
숙소에 딸린 식당에 음식과 술이 뷔페식으로 준비되었다.
강현은 푸른 채소 샐러드와 꿀을 첨가한 소 간 요리를 접시에 담아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서 김혜림이 음식을 수북하 게 쌓은 접시를 내려놓으며 강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김혜림의 접시 위에는 온통 고기와 튀김 종류뿐이었다.
한눈에도 진득하게 쌓인 콜레스테 롤 접시 같았다.
오늘 저녁에 벨트라도 풀 생각인 가.
강현은 김혜림의 접시를 보곤 핀잔 을 주었다.
“내일은 26인치 바지를 입을 예정 인가 보군.”
“하루만에 2인치나 늘진 않거든 요? 소고기랑 닭고기는 단백질이 많 아서 괜찮아요.”
“거기 있는 새우튀김은 해산물이라 괜찮다고 말하려나.”
김혜림은 고기 밑에 숨겨 둔 새우 튀김을 냉큼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 었다.
“우물우물,새우튀김은 담은 적 없 는데요?”
“입 밖으로 삐져나온 새우꼬리나 넣고 말하시지.”
“그나저나 웨이브 공략 이후에 더 바빠질 거라 안 했어요? 우리끼리 파티 같은 걸 해도 되나 몰라.”
사방에 적뿐인 곳이다.
가뜩이나 SSS랭크 웨이브 공략 여 파로 시끄러운 가운데 이렇게 술을 마셔도 될지 의문이었다.
이는 비단 김혜림만의 생각이 아니 었다.
기사들도 술에는 손도 안 대고 음 식만 먹고 있었다.
강현은 테이블 위에 준비된 와인병 을 들어 잔을 채웠다.
강현이 술을 입에 대는 걸 처음 본 기사들은 진기명기라도 목격한 양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잔을 비운 강현이 와인 잔향을 풍 기며 말했다.
“에르델 황녀님이 아주 좋은 술을 보내 주셨군. 남는 술은 제2별궁으로 보낼 건데,조직 놈들에게 최고 급 술을 선물해 주고 싶은 자는 없 겠지?”
상관인 강현이 몸소 잔을 비우면서 기사들의 심리적 고리가 풀렸다. 기사들은 이제야 마셔도 되는구나 싶어 잔을 들었다.
“놈들에게 줄 알코올은 한 방울도 없습니다. 전부 비워 버리지요.”
“다들 건배!”
“건배!”
잔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 리면서 본격적으로 벤젠 기사단만의 휴식 시간이 시작되었다.
김혜림은 와인잔 대신 맥주잔을 손 에 쥐며 맥주를 가득 따랐다.
그녀가 맥주를 한껏 마시고 입가에 거품을 묻힌 채로 말했다.
“무슨 꿍꿍이예요?”
두 번째 잔부턴 맥주를 마시던 강 현이 능청을 부렸다.
“글쎄.”
“에르델 황녀님이 포상으로 보낸 게 아니잖아요. 강현 씨가 에르델 황녀님께 술을 보내 달라고 요청한 거 들었어요. 오늘 술자리엔 무슨 의도가 담겨 있는 거예요?”
“여러 가지가 있지.”
“역시나.”
“하지만 주목적은 재충전이야.”
“재충전?”
“우린 금욕 수행이나 하자고 여기
에 온 게 아니야. 기계가 아닌 이상 정신적인 피로를 고려해야 하지.”
“그럼 진짜 마음껏 마셔도 되죠?”
“그러라고 했지 않나?”
강현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벨트
를 푸는 김혜림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26인치 바지를 새 로 주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다들 너무 오랜만에 술을 마신 탓 인지 생각보다 빨리 취했다.
술판을 벌인지 2시간도 안 되어 전원 고주망태가 되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미룬다고? 에라이,죽게 놔둘까 보냐!”
“옳소 옳소! 혜림 양 말 잘하신 다!”
“SSS랭크 웨이브 전리품을 모두 가져갔으니 우리에게도 보너스를 줘 라! 나 김혜림은 지목의 설원에서 했던 행위의 재현을 요구한다!”
“정당한 요구입니다! 들어주지 않 으면 사람도 아니지!”
10분 전부터였나.
취한 김혜림이 강현에게 주정을 부 리더니,기사들 모두 김혜림에게 동 조하기 시작했다.
재충전하라고 기껏 자리를 만들어 놨는데 되려 강현이 위험(?)한 상황 에 처했다.
강현은 남아 있는 술이 맥주 반 통밖에 없는 걸 보곤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대답은 마지막 맥주를 모두 비운 후에 하도록 하지.”
“잔 비운 후에 말 바꾸기 없습니 다!”
“남자라면 제대로 대답하십시오!”
모두의 잔에 맥주가 가득 채워졌 다.
“모두 한번에 비우도록.”
강현이 먼저 잔에 입을 대고 빠르 게 비워 나갔다. 이어서 기사들도 차례대로 잔을 비웠다.
마지막 잔이 깔끔하게 비워지며 테 이블 곳곳에서 잔 내려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탁!
더불어 완전히 취해 버린 기사들이
하나둘 그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그나마 김혜림만이 마지막까지 테 이블에 이마를 문대며 안간힘을 썼 다.
“우움,내 보너스……
풀썩.
강현은 취한 기색 한 점 없는 가 지런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언제쯤 알아차릴지 궁금하군.”
보너스는 이미 지급했다.
나중에야 알아차릴 것이다.
그들이 마신 와인이 실드 스텟을
을려 주는 영약으로 만든 술이란 것 으
*
이튿날 아침, 강현은 잘 다려진 제 복을 입고 숙소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선 일찍 잠에서 깬 벤젠 기 사단 기사 몇몇이 퀭한 모습으로 앉 아 있었다.
기사들은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젯 밤 기억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인사 를 올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단장님.”
“황궁의회에 다녀오지. 정오까진 컨디션을 회복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어제 일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아,아닙니다! 무척 즐거운 뒷풀 이였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럼 다녀오지.”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강현의 모습 에 기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까워라. 조금만 더 버렸다면 좋 았을 텐데.
강현이 나간 직후,김혜림이 입에 고무줄을 문 채로 로비에 나타났다. 김혜림은 고무줄로 머리를 한데 묶 으며 물었다.
“강현 씨는 벌써 나가셨어요?”
“방금 나가셨습니다.”
“우리에게 명령은 없었나요?”
“정오까지 컨디션을 회복시켜 두랍 니다.”
“그럼 식사나 하죠. 어제 하도 떠 들면서 마셨더니 다행히 숙취는 없 네요.”
“혜림 양. 어제 보너스는 받아 내 실 겁니까?”
“네? 어제 제가 뭔가 했었나요? 중간부터 기억이 없어서요.”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떠들고,두 배는 더 마신다 싶더니 필름이 끊겼 나 보다.
벤젠 기사단은 김혜림과 자신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
황궁의 대회의장.
강현은 황궁의원과 집무관,황족들 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고를 시작했 다.
SSS랭크 웨이브 안의 공략 방식이 어땠는지,대강 어떤 식으로 진행되 었는지 말해 주었다.
황궁의원들의 표정을 보니 웨이브 공략 방식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얼른 하워드와 오브렌이 죽은 경위 나 듣고 싶을 테지.
어설픈 거짓말은 트집거리를 만들 어 줄 뿐이다.
사실을 적당히 포장해서 말하는 게 낫다.
“마지막 구간에 이르렸을 땐 이미 두 단장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 니다. 결국 오브렌 경과 하워드 경 은 이성을 잃고 아군에게 무기를 들 이밀었기에 부득이하게 두 사람을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강현이 그렇게 보고를 마쳤을 때였 다.
점잖게 앉아 있던 리바시치가 슬슬 시동을 걸 듯 말을 꺼냈다.
“최종적으로 벤젠 기사단이 웨이브 를 공략했으니 그 공적을 높이 사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일세. 한데 말일 세,그 과정에 부정이 있었다면 얘 기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누구의 부정을 말씀하시는지요?”
“자네가 두 단장을 배신했을 가능 성을 말하는 걸세.”
“방금 드린 보고를 제대로 듣긴 하 셨습니까?”
“크흠,물론 전부 다 들었네. 하지 만 공략이 확정된 가운데 공적을 독 차지하기 위해 하워드 경과 오브렌 경을 베었을 가능성 또한 있지 않겠 는가? 그리고 그 가설이 사실일 경 우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거라 생 각하지 않나?”
리바시치는 이미 강현의 증언을 전 체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이는 이미 강현의 증언 따위는 상 관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 자리가 SSS웨이브
공략을 보고하는 게 아닌,강현의 의혹을 캐묻기 위해 열린 것임을 암 시했다.
“퀵실버 기사단 소속 기사 4명이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배신했다면 그들까지 베있겠지요.”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해서 퀵실버 기사단의 생존자들이 할 말이 있다 더군.”
리바시치가 대회의장 옆문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옆문을 통해서 퀵실버 기사 단 기사단의 생존자들이 줄지어 들 어왔다.
마치 사전에 각본이 짜여 있던 것 처럼 물 흐르듯 진행되는 전개였다.
이미 어제 하루 동안 손을 써 두 었군.
강현은 차가운 눈으로 퀵실버 기사 단 생존자들과 눈을 마주쳤다. 치사하고 더러운 황궁 생활에 지쳤 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나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은 강현의 눈길을 외면하며 단상 앞에 섰다.
리바시치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 다.
“그대들에게 묻겠네. 정말로 하워 드 경과 오브렌 경이 먼저 배신했는 가?”
퀵실버 기사단 생존자들은 뻔뻔하 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대답을 내놓았다.
“최강현 단장과 벤젠 기사단이 먼 저 배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