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화
가슴을 관통한 검이 쉐인의 내부를 잘근잘근 비집고 뽑혀 나왔다.
검이 뽑힌 자리를 중심으로 피가 튀더니 쉐인의 몸뚱이가 앞으로 기 울었다.
쉐인이 죽으면서 그가 조종하던 시 체들 또한 힘을 잃고 쓰러졌다.
최진철은 피가 뚝뚝 홀러내리는 검 을,시체가 된 쉐인의 옷자락에 쏙 쓱 닦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배신에 배신이 점철된 현장 속에서 디벨롭이 가늘게 눈을 여몄다.
최측근이라 여겼던 쉐인이 배신을
한 마당이다.
최진철이 쉐인을 베었다고 한들 액 면 그대로 우군이라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디벨롭은 쉐인을 상대하기 위해 끌 어 올렸던 마나를 그대로 유지하며 말했다.
“무엇을 위해 메이아에게 가담했다 가 다시 배신한 것이냐?”
“마치 제가 박쥐라도 되는 양 말씀 하시는군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나?”
“설명할 기회 정도는 주셔야지요. 뭐 차례대로 설명하자면 반년 전에 쉐인이 제게 제안을 해 왔습니다. 조직을 배신하고 메이아 황녀에게 붙지 않겠냐더군요. 일단 손을 잡은 척하고 한동안 그의 작전을 도왔지 요. 그리고 작전을 무산시키기 위해 서 기회를 엿보았고 지금에 이른 것 입니다.”
“처음부터 메이아 황녀의 비장의 수단을 파훼하기 위해 손잡은 척했 다?”
“그렇습니다.”
“이중첩자 노릇을 할 거라면 왜 내 게 보고하지 않았지? 첩자 노릇을 하다가 유리한 쪽에 붙으려던 의도 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보고했다면 제 공로를 인정해 주 셨을까요?”
최진철이 쉐인의 배신을 사전에 알
렸다 해도 디벨롭은 이중첩자로 활 동하라 명했을 거다.
미리 보고했든지,그러지 않았든지 최진철이 쉐인을 찌르는 건 달라지 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공적의 배분이 달라진다. 독단으로 이중첩자 활동을 하면 모 든 공로가 최진철에게 있지만,디벨 롤에게 보고한 후 그의 명령으로 활 동하면 최진철에게 돌아오는 공로가 적어진다.
같은 개고생이면 공로가 높을 쪽을 택하지 않겠는가.
디벨롭은 다소 의심을 누그러뜨렸 다.
“욕망에 충실한 대답이군.”
“어설픈 변명보다 훨씬 낫지요.”
“일단은 믿어 주지. 하지만 보고를 누락한 건 나중에 따로 처벌을 내리 겠다.”
“외람되오나 제가 왜 공로에 급급 해했는지 그 이유도 들어 주시지 않 겠습니까?”
“지부장에서 간부로 승격하기 위해 서가 아닌가?”
디벨롭의 말에 최진철은 잠시 말을 끌었다.
그 정적에 디벨롭이 의아해할 찰 나,최진철이 본론을 내뱉었다.
“경계 너머에 있는 조직으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디벨롭이 붉은 눈동자로 최진철을 차분히 훑다가 입을 열었다.
“그쪽 조직의 일원이 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춰야 하지.”
“레벨을 올리기 위해 엘프의 숲에 서 던전과 웨이브를 한없이 돌다 왔 습니다. 현재 레벨 100을 넘긴 상태 입니다.”
“레벨 100을 넘겼다면 인간계에서 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텐데? 허튼 생각으로 가는 거라면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군.”
“결정적인 배신을 막아 낸 공로를 그냥 저버리진 않으실 거라 믿습니 다.”
“지금 네놈 입에서 믿음을 들먹이
다니. 어울리지도 않는군.”
“대답부터 들려 주십시오.”
“그리도 원한다면 보내 주지. 경계 너머에 다녀온 자로서 한 가지만 충 고? 하마. 그곳에 가면 그곳의 질서를 따르는 게 좋을 거야. 괜한 짓은 화 를 부르니까.”
산봉우리의 찬바람이 디벨롭이 걸 친 로브 소매를 두드렸다.
일순 로브 소매가 펄럭이면서 썩어 문드러진 팔뚝의 일부가 드러났다. 하나,최진철은 그를 보고도 무표 정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
SSS랭크 웨이브를 공략한 벤젠 기 사단은 제국 수도 상데르로 복귀했 다.
웨이브 공략 소식을 전해 들은 상 데르 주민들이 거리로 우르르 몰려 나왔다.
모두가 집 앞 화단의 꽃잎을 뜯어, 길을 향해 뿌리며 황궁으로 이어지 는 길을 꽃길로 만들었다.
“연합 기사단이 SSS랭크 웨이브 공략을 마치고 복귀했답니다!”
“어라? 근데 숫자가 상당히 줄지 않았나? 오브렌 경과 하워드 경은 어디 있지? 설마……
“어쩔 수 없있겠지. 무려 SSS랭크 웨이브였으니. 그보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세. 덕분에 상데 르가 소멸당하는 일은 피했지 않 나.”
“맞는 말일세.”
“연합 기사단 만세! 벤젠 기사단 만세!”
벤젠 기사단과 퀵실버 기사단 기사 일동은 열렬한 환호 속에서 황궁에 들어섰다.
황궁에선 피난 갔던 귀족과 황족들 이 뒤늦게 돌아와 벤젠 기사단을 맞 이했다.
황궁의회장인 리바시치가 황궁을 대표하여 강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 했다.
“수고했네,최강현 단장. 처음 맞는
SSS랭크 웨이브였을 텐데 아주 잘 해 줬네.”
“보고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쉬는 게 좋겠 지. 그런데 오브렌 경과 하워드 경 이 안 보이는데 두 사람은 어디 있 나?”
“두 사람은 공략 중에 사망했습니 다.”
리바시치를 비롯한 황궁의회 및 메 이아와 드래코프의 안색이 굳었다. 황제파에 속하는 두 마나 마스터가 동시에 사망하다니....
이는 슈타인 백작가 사건에 준하는 대형 사고가 터진 셈이었다.
게다가 정작 마음에 안 들던 강현
은 멀쩡히 돌아왔다.
속마음을 억지로 숨기려 해도 표정 을 통해 언많은 기분이 새어 나왔 다.
리바시치는 미소도 찡그림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것 참 유감이로군. 자세한 이야 기는 내일 하세. 들어가서 쉬게나.”
“그럼 내일 황궁회의 때 뵙겠습니 다.”
SSS랭크 웨이브는 공략되었고 샹 데르는 무사하다.
하지만 각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다.
벤젠 기사단이 물러나자마자 황궁 의회와 메이아,드래코프,에르델은 뒷일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 작했다.
*
제1별궁으로 돌아온 메이아는 손톱 을 까득까득 깨물었다.
공들여 다듬었던 손톱 끝이 거칠게 갈라지며 그녀의 분노를 대변했다. 죽었어야 할 강현이 살아서 돌아왔 고,측근이었던 오브렌이 죽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자. 중요한 건 디벨톱을 치러 간 쉐인 이다.
확인한 결과 디벨롭은 멀쩡하게 황 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쉐인의 실패를 증명했다.
“그리 호언장담을 하더니 결국 실 패를 해? 분명 내가 시킨 일인 걸 알아차렸을 거야. 흐윽,쉐인 그 망 할 것이 실패만 안 했어도!”
메이아는 신경질을 내며 화장대 위 의 촛대를 화장 거울로 집어 던졌 다.
째재쟁!
놋쇠로 만든 촛대가 거울에 부딪치 며 거미줄 모양으로 금이 일어났다. 복도에서 대기하던 하녀가 놀라서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님,무슨 일 있으……
“신경 끄고 꺼져! 함부로 방에 들 어오지 말란 말이야!”
“네,네! 죄, 죄송합니다!”
윽박을 지르며 하녀를 쫓아낸 메이 아는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말아 쥐 었다.
앞으로가 큰일이다.
디벨롭은 적극적으로 드래코프를 부추겨 자신을 둥개려 할 거다.
에르델은 예전부터 반목해 왔으니 두말할 것도 없다.
오브렌과 쉐인을 모두 잃음으로서 왕위계승권자 중 메이아의 세력이 가장 아래로 떨어졌다.
세력이 약화될 대로 약화된 지금, 드래코프와 에르델을 모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메이아는 어떻게든 둘 중 하나는
쳐 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개중 공략할 빈틈이 보이는 건 바로 에르델이었다.
이번 SSS랭크 웨이브 때 하워드와 오브렌이 죽은 걸 꼬투리 잡으면 벤 젠 기사단을 처벌할 수 있다.
벤젠 기사단만 무너뜨려 에르델을 배제할 수만 있다면 메이아에게도 기회는 있다.
메이아는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 며 복도로 나갔다. 그러곤 잔뜩 얼 어붙은 하녀에게 날 선 목소리로 명 령을 내렸다.
“본궁의 의원장 집무실으로 가야 하니 옷을 준비해 둬.”
*
막 드래코프와 디벨롭이 복귀한 제 2별궁 안.
드래코프는 짜증도 신경질도 내지 않고 평온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 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홍차 맛이 부드럽 다.
그러나 찻잔 안의 수면은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드래코프가 고요 를 깨고 입을 열었다.
“전성기는 시간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끝난다지. 최강현이란 인물이 자네를 빛바래게 하는군.”
디벨롭은 식은 찻잔을 치우며 고개 를 끄덕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요. 제가 그를 너무 얕잡아 봤습니다.”
“그건 자네가 쓸모없어졌다는 걸 인정하는 말이겠지?”
“절 버리시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착각이길 바랍니다.”
“연합 기사단 따위의 헛짓거리만 하지 않았다면 최강현이 올 일도 없 었고,하워드를 잃을 일도 없있겠지. 여전히 변명거리가 남았나?”
“황자님께서 메이아 황녀님보다 유 일하게 나은 점이 뭐라고 생각하십 니까?”
디벨롭의 말에,드래코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냐?”
“유일하게 남은 마나 마스터를 버 릴지 말지는 알아서 판단하시란 뜻 입니다.”
디벨롭이 손수레에 찻잔을 놓으며 빈손에 붉은 마나를 뽑아냈다.
붉은 마나가 디벨롭의 손을 감싸며 갈퀴를 형성했다.
눈앞에 마나 클로가 드리워지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디벨롭의 행동엔 반쯤 협박이 담겨 있었다.
집사 노릇을 하고 있지만 어디까지 나 비즈니스 관계임을 명확히 해 두 기 위한 무력시위였다.
드래코프는 하워드를 잃음으로써 오히려 디벨롭을 붙잡아 둬야 하는 처지에 놓였음을 자각했다.
방금의 표정이 무색하게,드래코프 의 입에서 졸렬하기 짝이 없는 헛기 침이 새어 나왔다.
“흠흠,일단 내일 어떻게 행동할지 생각해 두는 게 급선무겠군.”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최강현이 성가신 존재인 것만은 여전해. 차라리 이리된 거 연합 기 사단을 해체하고 그를 공국에 돌려 보내는 게 낫지 않나?”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돌려보내면 제국은 평생 그에게 영웅 대우를 해 줘야 합니다. 황자님께서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어질 텐데 그걸 받아들 이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아니 될 일이지. 하지만 방 법이 없지 않나?”
“티타임 전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메이아 황녀님이 리바 시치에게 찾아갔다더군요.”
“누님이 의회장에게? 대체 왜? 뭘 꾸미고 있는 거지.”
디벨롭은 메이아의 행동을 이미 짐 작하고 있었기에 가벼운 미소를 지 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 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내일은 황궁의회가 알아서 최강현 을 제압하려 들 겁니다. 마음 편히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시지요.
?
SSS랭크 웨이브 공략의 여운 때문 에 황궁 안팎으로 소란이 가시질 않 았다.
공략 중에 죽은 기사들의 순직 예 우 준비와 연합 기사단의 존속 여 부,제국 안팎으로 미칠 영향 등. 귀족부터 집무관,궁녀들까지 분주 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4명의 인물이 리바시치의 집무실로 호출을 받았 다.
4명의 인물은 다름 아닌,SSS웨이 브에서 생존한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이었다.
네 기사들이 집무실 안에 들어서 자,리바시치 외에도 메이아가 있는 게 보였다.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은 인사부터 올렸다.
“퀵실버 기사단 기사 일동,호출을 받고 왔습니다.”
리바시치는 응접용 테이블의 상석 을 메이아에게 양보하며 자신은 측 면 의자에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게.”
“저…… 무슨 일로 부르신 건지 여 줘도 되겠습니까?”
“다른 게 아니라 이번 공략 과정이 궁금해서 말일세. 아무리 생각해도 퀵실버 기사단과 크로스 기사단이 벤젠 기사단보다 못하다곤 생각하지 않네. 그런데도 벤젠 기사단만 온전 히 살아 돌아왔다는 건 필시 공략 도중에 사고를 빙자한 무언가가 있 다고 여겨지는데 말이지.”
기사들도 황궁 눈칫밥을 하루 이틀 먹은 게 아니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리바시치가 무 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 었다.
즉 벤젠 기사단이 퀵실버 기사단과 크로스 기사단의 뒤를 찌르지 않았 냐고 묻는 것이었다.
기사들은 제적 처분을 각오하고 있 기에 있는 그대로 말했다.
“벤젠 기사단은 오로지 공략에만 집중했습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은 탓에, 리바시치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크훔,최강현이 그리 말하라고 강 요하던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것이 냐 하면……
그 때,가만히 있던 메이아가 기사 들의 말을 자르며 명령조로 말했다.
“네 명 모두 내일 황궁회의에서 벤 젠 기사단이 비인도적인 방법을 사 용했다고 증언하세요.”
“거짓 보고를 하란 말씀이십니까?”
“고민할 필요가 있나요? 단 몇 마
디면 영웅이 될 수 있을 텐데요. 어 쩌면 황궁으로 들어오는 영약의 일 부가 당신들에게 주어질지도 모르겠 군요. 그렇다면 여러분 중 누군가는 10대 마나 마스터의 빈자리를 채우 게 될지도 모르겠고요.”
“그건……
벤젠 기사단의 증언과 퀵실버 기사 단의 증언.
서로 상반된 증언이 나오면 황궁의 회가 검토하여 어느 쪽 증언을 채택 할지 결정한다.
메이아가 리바시치를 섭외한 이상 어느 쪽 증언이 채택될지는 이미 정 해진 바나 마찬가지였다.
영웅 대접이냐,제적 처분이냐.
이익과 양심이 엇갈린 제안 속에서 메이아가 한 마디 덧붙였다.
“당장 퀵실버 기사단이 해체되면 전원 제1별궁 호위기사로 편입시켜 주겠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다 들 잘 알 거라 생각해요.”
앵두빛 입술을 핥으며 고혹적인 분 위기를 자아내는 메이아였다.
그에 따라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