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화
퀵실버 기사단과 크로스 기사단은 비웃음 담긴 미소를,벤젠 기사단은 탄식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혜림을 기둥에 묶어라.”
이는 곧 그녀를 버린다는 말과도 같았다.
강현이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낼 줄 알았다.
방법이 없다면 다른 기사단 기사들 을 베어서라도 김혜림을 지키지 않 을까 싶었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혜림이
지 않은가.
명령이 떨어진 지 오래건만 벤젠 기사단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단장님,꼭 그래야만 하겠습니 까?”
퀵실버 기사단과 크로스 기사단의 기사들이 벤젠 기사단을 한껏 다그 쳤다.
“얼른 명령대로 시행하지 못할까! 너희만 아무도 희생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희생할 땐 나 몰라라 하더 니 막상 자기 일이 되니 거부하는 겐가!”
우리가 희생했으니 너희도 희생하 라는 보상심리가 한껏 기승을 부렸 다.
벤젠 기사단원들은 엉거주춤한 몸 짓으로 김혜림에게 다가갔다.
“혜림 양,미안합니다.”
김혜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여전히 표정 변화 한 점 없었다.
무덤덤한 표정 뒤에서 읍참마속의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여전히 딱딱 하게 효율만 따지고 있을지. 김혜림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그녀의 기분과 무관하게,퀵실버 기사단과 크로스 기사단은 여전히 그녀의 죽음을 외쳐 댔다.
“매달지 않고 뭐 하나! 명령을 어
길 셈인가!”
“매달아라! 언제까지 시간을 끌 셈 이냐!”
결국 벤젠 기사단 기사들의 손에 의해 김혜림이 기둥에 매달렸다. 이로써 기둥에 설원의 저주에 걸린 3명이 모두 매달리게 되었다.
일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면서 지 목의 설원 전체에 강한 햇살이 내리 쬐었다.
설원의 눈이 녹아내리며 푸른 잔디 밭이 드러났고,눈으로 뒤덮여 있던 몬스터 소환진이 겉으로 드러났다. 소환진은 햇살을 쬐더니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12시 방향에 문이
생겨나면서 다음 구간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김혜림에게 걸려 있던 설원 의 저주가 냉룡의 저주로 바뀌면서 그녀의 몸이 발끝부터 얼어붙기 시 작했다.
김혜림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작은 신음을 홀렸다.
“으으 ”
그리고 김혜림이 끝내 기절해 버리 리고 마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기절함과 동시에 강현이 움 직였다.
강현이 어느새 손에 쥔 빙백검으로 기둥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서격!
뒤이어 그녀를 묶고 있던 밧줄까지 잘라 내자,김혜림의 몸이 기둥 아 래로 흘러내렸다.
강현은 쓰러지는 김혜림의 몸을 받 아 내며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 다.
곧 아공간 주머니에서 탁구공 크기 의 영약이 딸려 나왔다.
저주 해제 효과를 지닌 S급 영약, 해머쉬름의 경단이었다.
강현은 해머쉬룸의 경단을 입에 넣 고 씹어 잘게 으쨌다.
와드득!
주변 사람들은 강현이 뭔가 하려는 걸 깨닫곤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강현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당황케 하고도 남았다. 경단을 으깨던 강현이 돌연 김혜림 에게 입을 맞추는 게 아닌가.
강현은 녹아내린 해머쉬룸의 경단 을 김혜림에게 먹였다.
해머쉬룸의 경단이 효과를 발휘하 며 냉롱의 저주를 해제했다.
김혜림의 허리까지 잠식했던 얼음 이 사르르 녹아내렸고,창백해져 가 던 안색이 혈기를 되찾아 갔다. 강현은 기절한 김혜림을 땅바닥에 사뿐히 뉘여 놓고 몸을 돌렸다.
공간 내의 모두가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는 가운데 강현이 나직 이 말했다.
“녀석에겐 비밀로 하도록.”
벤젠 기사단원들은 자꾸만 벌어지 는 입을 억지로 닫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역시 강현은 강현이다.
확실하게 김혜림을 살릴 방법을 찾 아내지 않았는가.
안도감과 함께 흐뭇함이 밀려들어 왔다.
빅터는 멋쩍게 콧잔등을 문지르며 말했다.
“해주 영약이 있었으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삼키게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 으니까.”
“하하,역시 단장님은 혜림 양
으.. ≫
■로 ?
“재주 좋은 궁수를 잃어서 좋을 건 없지. 그뿐이야.”
“뭐 그런 걸로 해 두죠.”
강현은 아까부터 입을 쩌억 벌린 채로 서 있는 퀵실버 기사단과 크로 스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휴식을 취하고 다음 구간으로 가 는 게 좋겠군.”
두 기사단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지목의 설원 구간 클리어 후.
세 기사단은 취침을 겸한 휴식 시 간을 가졌다.
SSS랭크는 48시간이란 제한시간이 있었는데,이제 6시간이 지난 참이 니 시간은 넉넉한 편이었다.
보초를 세우고 불을 피워 고단함을 달래고 있던 때.
지목의 설원 곳곳을 수색하던 보초 들이 돌아와선 새로이 발견한 사실 을 알렸다.
“설원 7시 방향 끝에 탈출구가 있 었습니다. 근데 1명이 희생해야 4명 이 나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하워드는 신발 앞코로 물기 젖은 잔디를 걷어차며 신경질을 냈다.
“SSS랭크는 개뿔! 온통 사람 엿 먹 이는 구조뿐이군.”
“저…… 통상적인 웨이브라면 세
번째 구간까지 있지 않습니까?”
“당연한 걸 지껄이는구나. 피곤해 서 기억력까지 가물가물해진 것이더 냐.”
“아니,그런 게 아니라 SSS랭크니 까 네 번째,다섯 번째까지 이어지 진 않을지 걱정돼서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탈출이라도 하자 고?”
“이제 와서 탈출을 논할 생각은 없 습니다. 다만 난이도를 감안하면 벤 젠 기사단과 대립하면서 공략을 하 는 건 무리가 아닐지.”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것이다.”
“벤젠 기사단의 능력을 인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네놈들은 자존심도 없느냐.”
쇳소리를 내며 분노를 드러내는 하 워드였다.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은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웨이브에 입장 전,드래코프 가 직접 찾아와 벤젠 기사단을 제거 하라는 명령을 내렸었다.
벤젠 기사단의 존재를 말살하는 건 곧 에르델 황녀의 숨통을 끊는 일이 고,드래코프가 황제 즉위에 한 발 더 다가가는 계단이 되었다.
그리고 드래코프가 즉위하면 퀵실 버 기사단은 단연 황궁 최고 기사단 으로 승격하게 된다.
앞으로의 출세를 생각한다면 끝까
지 벤젠 기사단을 물고 늘어져야 한 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어떠한가.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사단은 피해자가 속출하는데,벤젠 기사단 은 여태껏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 었다.
강현이 어떻게든 단원들을 살리면 서,실리란 실리는 모두 취하고 있 었다.
이는 단순히 무력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숫자가 2배인 만큼 단순 무력은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 사단 쪽이 더욱 강력했다.
그럼 이 차이점은 대체 어디서 나
는 걸까?
마음가짐의 차이일까? 아니면 발상 의 차이?
시간이 흐를수록 두 기사단의 기사 들은 벤젠 기사단을 부러워하기 시 작했다.
*
번갈아 가며 수면을 취한지도 어느 덧 6시간째.
강현은 잠에서 깨어나 벤젠 기사단 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표정이 밝은 것이 제대로 휴 식을 취한 모양이었다.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비단
휴식 때문만이 아닐 거다.
이런 활력이 생겨난 데에는 김혜림 을 살린 게 유효했다.
강현이 약간의 희생⑵을 한 덕분 에 벤젠 기사단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 사단 내에서 여태까지와는 다른 공 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다른 기사단의 기사들도 슬슬 마음 이 바뀌고 있을 거다.
'여기서 적은 몬스터가 아니야. 인 간이지. 저들도 슬슬 깨닫기 시작했 군/ SS랭크가 얼마나 공략법을 잘 파 악하느냐에 달려 있다면,SSS랭크는 얼마나 사람을 잘 다루느냐에 공략 성패가 달려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지목의 설원 에 들어선 이후였다.
다른 기사단의 변화는 앞으로 크게 작용할 것이다.
어느새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김혜 림이 흐느적거리며 강현 옆에 앉았 다.
그녀의 얼굴에는 특유의 헤실거리 는 웃음기가 맺혀 있었다.
“헤헤,해주 영약이 있다면 있다고 말씀해 주시지.”
“빅터 녀석. 입이 가볍군.”
“해주 영약으로 살려 냈다는 것까 지만 들었는데요? 어떻게 먹였는지는 못 들었어요.”
표정으로 보건데 어떻게 먹였는지 까지 다 들은 것 같았다.
일부러 능청을 부리며 능글능글하 게 굴고 있었다.
또 까불고 있군.
“식사나 해 둬. 다음 구간으로 넘 어가야 하니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시선을 거두는 강현의 뒷모습에 김 혜림이 급히 물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저주에 걸 렸어도 같은 방법으로 구하셨을 거 예요?”
강현은 검지를 튕겨 김혜림의 이마 를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글쎄.
*
6시간의 휴식을 마친 세 기사단은 다음 구간으로 넘어갔다.
12시 방향의 문으로 빨려 들어가 듯 이동한 결과,넓은 숲과 조우했 다.
숲의 나무는 하나같이 10미터 이 상의 거목이었으며,잎사귀가 어찌 나 무성하게 자라 있는지 숲 안에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숲 너머에는 산 하나가 우뚝 솟아 있었는데,산 위에는 황금색 비늘을 지닌 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세 기사단은 숲 입구에 세워져 있 는 표지판부터 확인했다.
[광롱의 숲(SSS랭크)]
-봉인된 광룡(보스 몬스터)은 총 3 시간 동안 1시간 간격으로 3회의 포효를 한다.
-광룡의 포효에 노출된 자는 즉사 한다.
-숲 곳곳에 숨겨진 ‘운디네의 눈 물’을 먹으면 광롱의 포효 공격에 면역이 된다.
-운디네의 눈물은 총 30개가 존재 한다.
-총 3회의 포효 공격이 끝나면 광 룡의 봉인이 풀리며 광룡을 사냥할 수 있게 된다. 봉인이 풀린 광롱을 사냥하면 클리어.
[강제 클리어 조건 : 산 정상에 올 라가 광룡에게 사람 20명을 먹이면 광롱의 숲 구간이 강제로 클리어된 다.]
즉사 조건이 존재하고,그를 피하 려면 적은 수량의 공략 도구를 선점 해야 하는 방식이었다.
숲에 존재하는 운디네의 눈물은 고 작 30개.
광룡의 포효는 3회차까지 예정되어 있으니,최대 10명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
현재 살아남은 자는 23명이니까 최소 13명은 죽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마저도 운디네의 눈물이 적절하 게 분배되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 이다.
상황에 따라 포효 1회차,2회차 때 전부 소모하고 3회차 때 전멸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공략 문구를 읽은 세 기사단은 행 동방침에 대해 논했다.
먼저 하워드가 툴툴거리듯 말을 내 뱉었다.
“최대 10명밖에 못 살겠군. 게다가 강제 클리어엔 20명? 쳇,그냥 죽으 라고 짜 놓은 판이구만.”
오브렌도 공략 방법이 영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운디네의 눈물을 모두 모아 놓고 누구에게 몰아줄지 결정하는 게 낫지 않겠나? 광룡의 크기로 짐 작컨대 결코 사냥하기 쉽지 않을 걸 세.”
직접적으로 말하지만 않았을 뿐 강 한 순서대로 뽑겠다고 선언한 바나 다름없었다.
바꿔 말하면 강현,오브렌,하워드 세 마나 마스터는 기본적으로 뽑힌 셈이고,기사들 중에선 7명만 살아 남을 수 있다.
보조나 정보 수집이 특기인 자들에 겐 불공평한 방식이었다.
특히 퀵실버 기사단의 경우,하워 드가 주포이며 나머지는 그를 보조 하는 성향이 강했다.
강한 순서대로 뽑는다면 퀵실버 기 사단의 대부분이 희생될 것이다.
하워드로선 오브렌의 의견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난 자율 배분 방식이 낫다고 생각 하네. 본인이 찾은 운디네의 눈물은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는 걸로 하 지.”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나? 자 칫 잘못하면 3회차까지 가기도 전에 전멸당할 수도 있네.”
“다들 공략을 염두에 두고 행동할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겠지. 애당초 운디네의 눈물을 모은다 해도 숨겨 놓고 못 발견했다고 거짓말하면 어 떻게 할 건가?”
숲은 넓고 서로를 일일이 감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미 지목의 설원 구간에서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은 소용없다는 게 입 증되 었다.
차라리 각자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게 훨씬 공평했다.
그 부분은 강현도 동의했다.
“어설프게 잔머리 굴릴 필요 없어 서 좋군.”
“후우,자네들 뜻이 그렇다면야 각 자 알아서 살아남도록 하세.”
오브렌까지 동의하면서 방침이 정
해졌다.
세 명의 단장은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른 기사단과 멀어진 것을 확인한 하워드는 살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 다.
“최강현,네놈이 의기양양하게 구 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 구간에서 아주 묻어 버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