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화
저주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에 섞 인 노이즈.
이는 곧 김혜림이 저주 받은 자라 는 것을 의미했다.
강현은 아까 전투 중에 보았던 김 혜림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쏜 다 싶더니 저주 때문이었군.’
난전 중에 동료를 피해 화살을 쏜 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림은 한 치 의 오차도 없이 몬스터를 족족 쓰러 뜨렸다.
좋게 해석하면 실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다소 불편하게 해석하면 저 주에 걸렸으니 난전 중에도 화살을 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오브렌이 김혜림을 의심한 것이고 말이다.
김혜림은 지저분하게 말을 늘어놓 기보단 강경하게 대처했다.
“묶고 싶으면 묶으세요.”
“본인이 저주 받은 자라고 인정하
는 걸로 들리는군.”
“그거야 묶어 보면 알겠죠.”
“큭,어린 계집이 맹랑하게 구는구
나.”
묶으라고 해서 마음껏 묶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한 번이라도 잘못 묶으면 공략자 전원이 죽는다.
99퍼센트 의심이 가더라도 1퍼센 트의 확신이 없으면 묶을 수 없다. 저주 받은 자를 확실하게 가려 낼 방법이 필요했다.
여전히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 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브렌이 묘 책을 내놓았다.
“이런 식으로 의심만 하다간 끝이 없겠군. 차라리 이렇게 하지. 몬스터 가 소환되면 두 기사단만 싸우고 한 기사단은 쉬도록 하세. 1시간 동안 사냥을 하지 않으면 해당 기사단에 저주 받은 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 할 수 있겠지.”
1시간 간격으로 한 기사단씩 번갈 아 쉬면서 저주 받은 자를 솎아 내 자는 말이었다.
저주 받은 자는 몬스터 사냥을 못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사망할 거다. 이렇게 세 차례만 로테이션을 돌리 면 저주 받은 자를 모두 찾아낼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간편한 방법이었다.
오브렌은 기사들을 둘러보며 말했 다.
“지금 내놓은 작전에 반대하는 사 람 있나?”
있을 리가 없다.
여기서 반대하면 스스로 저주 받았
다고 인정하는 바나 마찬가지다. 결국 오브렌의 의견을 시행하기로 했다.
이제 누가 먼저 쉬느냐를 정해야 한다.
강현은 오브렌과 하워드가 순서를 언급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마지막에 쉬도록 하지.”
지목의 설원 특성상 늦게 싸울수록 고레벨 몬스터와 싸워야 한다.
먼저 싸우고 나중에 쉬는 게 편하 다.
오브렌과 하워드는 강현이 편한 방 법을 택한 거라고 여겼다.
“대놓고 편한 쪽을 고르는군. 자존 심이란 게 있기나 한 건지 원.”
“뭐라 하면 또 징징거릴 테니 놔두 세. 우리 퀵실버가 먼저 쉴 테니 자 네가 두 번째에 쉬게나.”
사실은 김혜림을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마지막 순번을 택한 거였다.
그를 모르는 오브렌과 하워드는 비 아냥거리며 저희들 좋을 대로 해석 했다.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12시 방향 을 지켜보던 몇몇 기사가 큰 목소리 로 외쳤다.
“몬스터가 다시 소환되기 시작했습 니다!”
“퀵실버 기사단은 휴식,나머지 두 기사단은 전투에 나서도록!”
“다들 오브렌 단장님의 명령대로 움직여라!”
이번에는 평균 레벨 30-32 수준의 몬스터가 40마리 정도 나왔다. 퀵실버 기사단은 기둥 쪽으로 물러 나 휴식을 취했고,벤젠 기사단과 크로스 기사단은 사냥에 나섰다.
기껏해야 30? 32레벨의 몬스터들이 다.
기사단 하나가 빠져도 사냥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30? 32레벨의 몬스터 40마리를 사 냥하자,곧바로 32? 34레벨 몬스터 40마리가 소환되었다.
아까와 같이 사냥,소환,사냥,소 환의 패턴이 50분간 반복되던 중.
기둥 옆에서 휴식 중이던 퀵실버 기사단 내에서 갑자기 돌발행동을 하는 자가 나왔다.
“으아아아!”
퀵실버 기사단 소속의 기사 한 명 이 돌연 무기를 뽑아 들며 발광했 다.
허우적거리며 전장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묻어 나왔다. 다른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이 발광 하는 기사를 억눌렀다.
“델프,갑자기 왜 이러…… 설마 네가?”
“놔! 이거 놓으라고! 10마리를 잡 지 않으면 죽어 버린다고!”
“하워드 단장님,델프가 저주에 걸
린 것 같습니다.”
저주에 걸린 걸 감추기 위해 50분 동안 참은 델프다.
허나 참는다고 죽는다는 사실이 바 뀌는 건 아니었다.
10분 뒤에 죽는다는 공포심이 델 프를 미치게 만들었다.
델프는 비밀이고 뭐고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내가 왜 죽어야 해! 이러려고 기 사가 된 게 아니야! 이러려고 기사 가 된 게 아니라고!”
퀵실버 기사단 기사들이 할 수 있 는 건 델프를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 었다.
그렇게 10분 뒤.
델프가 꺽꺽거리며 숨넘어가는 소 리를 뱉었다.
“크헉! 끄어어헉!”
델프가 발작하듯이 가슴을 들썩이 다가 결국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더불어 10회차로 소환된 몬스터 무리가 전멸하면서 휴식 시간이 찾 아왔다.
1시간 동안 사냥을 한 벤젠 기사 단과 크로스 기사단이 기둥 근처로 돌아왔다.
기둥 근처에선 침울한 분위기가 한 창이 었다.
누구도 델프를 탓하지 않았다.
델프 역시 그저 살아남고자 했던 한 명의 인간이었기에.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이 저주에 걸 렸더라도 냉정하게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을 품을 뿐이었다.
숙연함이 흐르는 가운데 델프의 시 신이 기둥에 매달렸다.
저주에 걸린 자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는지 실감되는 광경이었 다.
이어지는 휴식 시간.
빅터가 조용히 강현에게 다가와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님,아무래도 혜림 양이 저주 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더군.”
“후우,살릴 방법이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어.”
지금껏 관찰해 본 결과 SSS랭크 웨이브에선 함정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강제 클리어 시스템이 모든 함정의 가능성을 지우고 있다.
SSS랭크 웨이브의 콘셉트는 오로 지 한 가지다.
적은 희생과 많은 희생 중에 하나 를 골라라.
오로지 그뿐이었다.
혹시나 강현이라면 다른 방법을 찾 아내지 않았을까 싶어 말을 걸었던 빅터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재 삼 확인받았을 뿐이었다.
빅터는 답답한 나머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혜림 양은……
“우리 손으로 직접 매달게 되겠 지.”
“단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단장님에게 있어서 혜림 양은 특별 한 사람이잖습니까.”
“빅 터.”
“네,말씀하십시오.”
“우리가 지금 우선시해야 할 게 뭐 지?”
“공략입니다.”
“잘 알고 있군.”
강현은 그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
은 채 빅터를 스쳐 지나갔다.
빅터의 시야에 강현의 뒷모습과 앉
아 있는 김혜림이 한 폭으로 담겼 다.
말을 차갑게 해도 속으로는 김혜림 을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계속 방법을 찾고 있는 거겠지.
빅터는 어떻게든 강현이 방법을 찾 아낼 거라 기대하고 코로 긴 숨을 내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번째 휴식 시 간이 끝나면서 11회차 소환이 시작 되었다.
먼저 몬스터가 소환된 걸 발견한 기사가 하워드를 향해 소리쳤다.
“하워드 단장님! 몬스터 소환이 시
작됐습니다! 소환된 몬스터는 가고 일을 비롯한 레벨 40대 초반의 몬 스터들입니다!”
“이번엔 크로스 기사단이 쉬고 퀵 실버 기사단과 벤젠 기사단이 나선 다! 빨리빨리 움직여!”
어느덧 소환되는 몬스터의 레벨이 40? 42 수준에 이르렸다.
아직까진 쉽게 사냥할 수 있는 수 준인지라 진형을 짤 것도 없었다. 기사들은 서로 방해하지 않는 선에 서 사냥을 해 나갔다.
벤젠 기사단은 무리 없이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퀵실버 기사단 측에 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o 유,”
“덴트너가 팔을 당했어! 누가 지원 해 줘!”
“젠장,방심했어. 고작 가고일 따위 한테 당할 줄은……
기둥 높이 달려 있는 델프의 시신 이 지속적으로 퀵실버 기사단의 집 중력을 흐트러뜨렸다.
델프를 죽인 건 설원의 저주다. 알고는 있는데도 껍껍함을 떨칠 수 가 없다.
아까 동료들에게 눌린 채로 버등거 리던 델프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시야에 남아 반응속도가 느려졌다. 퀵실버 기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하 며 가까스로 버렸다.
어떻게든 사망자만은 내지 않으면
서 싸우던 차에 또다시 기등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크로스 기사단에 섞여 있 던 저주 받은 자가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크아악!”
“누,누가 좀 말려!”
“닥쳐! 내가 희생해야 될 이유가 없다고! 차라리 너희들이 죽어! 죽 어!”
크로스 기사단에 섞여 있던 저주 받은 자가 동료 기사들을 베고 있었 다.
이대로 희생양이 될 바엔 차라리 다른 사람 10명을 죽여 강제 클리 어를 하려는 것이었다.
벌써 기습을 통해 2명의 동료를 죽인 후였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크로스 기사 단원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저주 받은 자의 이성은 날아간 지 오래였고,동료를 향해 서슴없이 검 을 휘둘렀다.
보다 못한 오브렌이 기사들을 밀치 며 저주 받은 자를 향해 달려갔다.
“비켜라! 내가 직접 제압하겠다!”
“으아아아! 단장이고 뭐고 뒈져 버 려!”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검을 향해 오 브렌의 건틀릿이 날아들었다.
마나가 덧씌워진 건틀릿이 저주 받 은 기사의 검과 부딪쳤다.
카강!
건틀릿에 맺힌 마나가, 검에 맺힌 마나 오오라를 뭉개며 검신을 부러 뜨렸다.
반 토막난 검신 윗부분이 허공으로 날아오름과 동시에 마나 건틀릿이 기사의 가슴을 강타했다.
뿌드득!
갈비뼈 부서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번졌다.
가격당한 기사가 뒤로 크게 튕겨 나가며 실 끊어진 인형마냥 힘없이 눈 바닥을 굴렀다.
몇 바퀴나 바닥을 구른 후에 드러 난 기사의 가슴팍에는 깊은 건틀릿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숨 또한 끊어져 있었다.
전투 중에 크로스 기사단의 내분을 목격한 빅터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혜림 양도 저리되는 건 아닐까?’
이는 비단 빅터만의 생각이 아니었 다.
벤젠 기사단원들 모두가 같은 생각 을 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김혜림은 사냥에 열중하 고 있었지만,언제 이성을 잃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극단적인 방 법을 취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저주 받은 자는 2명이 발각되었고, 2명 모두 죽었다.
더하여 방금 발각된 자가 크로스
기사단 기사 2명을 죽인 마당이다. 현재 지목의 설원에 존재하는 시체 는 4구.
앞으로 6명만 더 죽으면 강제 클 리어 조건이 달성되었다.
바로 옆에선 퀵실버 기사단 기사 몇몇이 부상을 입은 상태고 말이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 던 놈들이다.
김혜림을 희생할 바엔 차라리 저들 을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내로남불이라 비아냥거려도 좋다.
자꾸만 극단적인 생각이 벤젠 기사 단원들의 머릿속을 잠식해 나갔다. 그 공격적인 눈빛을 느꼈음인지, 퀵실버 기사단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이! 벤젠 기사단 놈들! 아까부 터 왜 자꾸 눈에 힘주고 쳐다보는 것이냐!”
“뒤통수를 칠 생각이로군. 더러운 시정잡배 자식들.”
때마침 몬스터 소환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 된 참이었다.
한데도 양측 기사단은 무기를 거두 지 않고 서로를 견제하기 바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생사람 잡는군. 지금 일부러 도발하는 건 가?”
“들키니까 쫄리나 보지? 마지막 저 주 받은 자는 그쪽에 있는 거잖아. 이제 와서 발렘할 생각 마라.”
일촉즉발의 상황.
당장이라도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 두를 기세였다.
거기에 하워드까지 가세했다.
하워드가 강현을 향해 활을 겨누며 말했다.
“최강현 단장,잘 생각하고 대답하 게. 우리 뒤통수를 치려고 한 게 맞 나?”
모두의 이목에 강현에게로 쏠렸다.
강현의 대답 여부에 따라 일반 클 리어가 될지,강제 클리어가 될지 결정된다.
강현은 빙백검을 늘어뜨리며 김혜 림을 보았다.
강현과 시선을 마주친 김혜림이 눈
을 깊게 감았다.
오로지 강현의 판단에 맡기겠노라 고 결심한 것이다.
그녀를 죽일 것인가,살릴 것인가. 강현은 손가락을 들어 넌지시 김혜 림을 가리켰다.
곧이어 강현의 입에서 차갑기 짝이 없는 한 마디가 홀러나왔다.
“김혜림을 기둥에 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