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화
오로지 운에 의해 뽑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이처럼 애매한 상황에 희생자를 선 별할 만한 수단이라고는 제비뽑기가 유일했다.
걸린 자는 오직 자신의 불운만을 탓하며 열쇠 구멍에 머리를 넣는다. 어차피 나만 아니면 된다.
모두가 그런 생각으로 제비뽑기에 동의했다.
오브렌은 다른 두 단장인 강현과 하워드에게 다시금 동의 여부를 물 었다.
“두 사람 다 동의하나?”
“지원자가 없는 이상 그 수밖에 없 겠군.”
“동의하지.”
“나중에 가서 자기네 기사를 희생 할 순 없다고 하면 안 되네.”
제비뽑기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동 전을 이용했다.
동전에 각자의 이름을 쓰고 보자기 에 넣어 뽑힌 사람이 희생한다는 방 식으로 진행됐다.
강현,오브렌,하워드는 제외되었 다.
단독으로 바실리스크를 제거할 수 있는 마나 마스터를 희생양으로 쓸 수는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기사들도 모두 이견이 없었다.
하워드는 동전에 이름을 적고 있는 퀵실버 기사단원들에게 다가가 몰래 말을 전달했다.
“동전에 표시를 해 둬.”
겉으론 공정성을 기하여 운에 맡긴 다 했지만 속으론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퀵실버 기사단원들은 고개를 끄덕 이며 동전 양쪽 면에 작은 흠집을 내 두었다.
육안으로는 거의 구분이 불가능했 지만,손끝으로 집중해서 만지면 느 껴질 정도의 흠집이었다.
하워드는 오브렌에게도 같은 말을
전해 두었다.
두 기사단이 작당하여 벤젠 기사단 원들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다. 이윽고 동전에 이름 쓰는 게 끝나 고 모두가 보자기에 동전을 넣었다. 오브렌은 27개의 동전이 담긴 보 자기를 흔들며 손을 넣으려 했다.
“준비가 끝났으니 뽑도록 하지.”
오브렌이 보자기에 손을 넣으며 강 현을 힐끔 보았다.
혹시 수상한 낌새를 느끼진 않았을 까?
하지만 강현은 보자기 입구만 지그 시 바라보고 있었다.
수작을 부려 놨다고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브렌은 동전을 휘적거리다가 흠 집이 없는 동전을 찾아내고 그를 뽑 아 들었다.
흠집이 없는 동전은 무조건 벤젠 기사단원의 동전이다.
적혀 있는 이름이 벤젠 기사단 중 누구일지가 중요했다.
한데 동전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오브렌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동전 에 적힌 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제,제이미 케인.”
케인이라면 크로스 기사단에 속한 기사였다.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사단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예정대로라면 벤젠 기사단원이 걸 려야 되는 거 아니었던가.
설마 오브렌이 실수했나?
하나 오브렌의 표정으로 보건대, 본인도 흠집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뽑은 눈치였다.
모두가 멍하니 있는데 강현의 무뚝 뚝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규칙은 규칙.
동전의 결과를 뒤집을 순 없다.
오브렌은 동전을 쥔 채로 주먹을 과악 말아 쥐며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규칙대로…… 행하도록.”
케인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케인
을 붙잡았다.
본인이 걸리리라곤 생각지도 않았 던 케인은 이제야 현실을 자각하곤 발버둥쳤다.
“아,안 돼! 이,이 따위로 죽으려 고 기사가 된 게 아냐! 살려 주십시 오,단장님! 살려 주십시오!”
케인을 억누르던 크로스 기사단은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오 브렌이 직접 케인을 뽑고 말았지 않 은가.
이제 와서 말을 뒤집으면 모든 게 엉망이 되기에 억지로라도 시행해야 만 했다.
케인은 울분을 토해 내며 억지로 열쇠 구멍 앞까지 끌려갔다.
케인은 열쇠 구멍에 머리를 넣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목을 흔들며 발악했다.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 줘!”
결국 케인의 머리가 열쇠 구멍 안 으로 들어갔다.
사람 머리가 들어온 걸 감지한 열 쇠 구멍 안의 단두대가 뚝 떨어져 내렸다.
철겅!
스격!
열쇠 구멍 안에서 피가 튀더니 잘 린 머리가 구멍 안의 공간에 떨어졌 다.
더불어 목이 사라진 케인의 몸뚱이 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제 손으로 동료를 희생시킨 크로스 기사단원들은 집껍한 감각에 휩싸였 다.
그러나 껍껍해할 틈 같은 건 없었 다.
1명을 희생하면서 무작위로 1명이 새장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단번에 세 마나 마스터 중 한 명 이 나가면 좋으련만.
기다리고 있던 차에 퀵실버 기사단 원 중 한 명의 몸 주변에 하얀빛이 둘러졌다.
하얀빛에 감싸인 기사의 몸이 이내 새장 바깥으로 이동했다.
기사는 자신이 선정되었음을 깨닫 곤 얼굴을 구겼다.
“왜 하필 내가……
새장 안에 있던 동료들이 바깥으로 나간 기사에게 다급히 외쳤다.
“이봐! 12시 방향을 봐! 12시 방향 을 보라고!”
“무기를 뽑아! 바실리스크가 온 다!”
새장 바깥의 기사가 외침을 듣곤 12시 방향을 보았다.
12시 방향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끄는 소리 가 들려왔다.
스스스슥!
절로 소름이 돋는 오싹한 소리에 기
사가 검을 뽑고 응전 태세를 취했다. 놈이 전설에도 자주 회자되는 최강 의 몬스터라 할지라도 마냥 무적인 건 아니다.
어쩌면 싸워서 이길 수도 있었다. 적어도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바실 리스크의 위용은 그의 전의를 지워 버리고도 남았다.
“이,이게…… 바실리스크……
천년거암을 가져다 붙인 듯 묵직해 보이는 회색 비늘,끝이 보이지 않 는 기다랗고도 굵직한 몸통,목도리 도마뱀의 목덜미를 연상케 하는 목 주변의 두터운 피막.
무엇보다 하찮은 것을 보듯 번들거 리는 노란 눈이,감당 못할 공포심 을 자아냈다.
기사는 시작도 전에 궁지에 몰린 양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부하의 잔뜩 기죽은 모습을 목격한 하워드가 쇠창살에 바짝 붙으며 외 쳤다.
“실더! 최대한 버텨! 다음 사람을 내보낼 때까지 버티기라도 하라고!”
실더는 버티기 작전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문헌에 따르자면 바실리스크의 이 마에 달린 마안을 보면 몸이 돌로 변한다 했다.
눈을 감으면 돌로 변하지 않겠지
만,그럴 경우 바로 바실리스크가 입을 벌려 삼켜 버린다.
마안을 보지 않으면서 육탄 공격까 지 피하려면 바실리스크의 측면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실더는 최대한 바실리스크의 정면 에 서지 않기 위해 측면으로 뛰었 다.
“으아아아!”
그러나 바실리스크는 그를 비웃기 라도 하듯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곤 목을 스르륵 움직여선 실더의 진로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죽을힘을 다해 달리던 실더는 별안 간 바실리스크의 머리와 마주하고 말았다.
급히 진로를 꺾어 보았으나,그곳 에는 이미 바실리스크의 꼬리가 기 다리고 있었다.
놈은 흉악하게도 실더를 꼬리 쪽으 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미 실더의 머리로는 바실리스크 의 꼬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실더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외마디 를 흘리는 것밖에 없었다.
“아!”
쿠응!
꼬리가 실더를 깔아뭉개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다.
육중한 꼬리에 짓뭉개진 실더가 어 찌 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 었다.
새장 안에 남은 기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공략 중에 동료의 죽음은 늘 있는 일이며 감당해야 할 고난이 었다.
하워드는 분위기 환기를 위해 보자 기를 집어 들었다.
“이미 죽어 버린 자를 되새겨 봤자 의미 없어. 살아남은 자들이라도 어 떻게든 공략을 해야 하지 않겠나. 다음 순서를 뽑도록 하지.”
첫 번째 뽑기 때는 오브렌이 실수 를 한 모양이지만 자신은 같은 실수 를 범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홈집이 없는 동전이 벤젠 기사단의 동전이다.
하워드는 신속하면서도 섬세한 손 놀림으로 흠집이 없는 동전을 찾아 다녔다.
한편 하워드를 지켜보는 벤젠 기사 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언뜻 보기엔 누구 동전이 나을지 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벤젠 기사단원들은 자신들이 아닌, 다른 기사단원들의 이름이 나올 것 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사단이 동전에 수작을 부려 놓았다는 사실 은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서 강현은 사전에 지시를 내려 두었다.
“동전에 다른 기사단원들의 이름을 적어 둬라.”
동전은 순서상 오브렌,하워드,강 현 순서대로 뽑기로 되어 있었다.
오브렌과 하워드는 무조건 벤젠 기 사단의 동전만 뽑으려 들 터.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들의 동전에 상대방의 이름을 적어 버리면 된다. 보자기 안엔 벤젠 기사단을 제외 한,다른 두 기사단의 이름이 적힌 동전들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 지만 들킬 염려는 없었다.
어차피 놈들은 벤젠 기사단의 동전 만 뽑을 테니까.
오브렌과 하워드가 수작을 부리는 이상,같은 이름의 동전이 2번 튀어 나올 일은 절대 없다.
이윽고 하워드가 동전 하나를 집어 냈다.
‘이건 흠집이 없군. 확실해.’
이번에야말로 벤젠 기사단원을 뽑 을 거라 확신한 하워드가 기세 좋게 동전을 꺼냈다.
그러나 동전에 적힌 이름을 본 순 간 그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타,타케다 사토시.”
이번에도 크로스 기사단에 있는 기 사 중 한 명이었다.
오브렌이 놀란 얼굴로 하워드를 보 았다.
하워드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이었다.
이쯤 되면 강현이 수작을 부렸음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그렇다고 보자기를 풀고 확 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자기를 푸는 순간 먼저 사기를 쳤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오브렌과 하워드는 울며 겨자 먹기 로 또 한 명의 기사를 희생할 수밖 에 없었다.
지명된 타케다 사토시란 일본계 이 세계인이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다. 또 한 명의 희생양을 섭취한 새장 이 무작위로 탈출 대상을 선정했다. 이번에 선정된 자는 벤젠 기사단 소속의 루크였다.
루크의 몸이 빛 무리에 휩싸이면서 새장 바깥으로 이동했다.
바실리스크는 새로운 사냥감을 기 다리기라도 한 양 대뜸 마안을 펼쳤 다.
“쉐에엑.”
바실리스크의 이마에 감추어져 있 던 눈꺼풀이 벌어지며 보랏빛의 마 안이 드러났다.
마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 석화에 걸리기에 루크는 바로 등을 돌려 뒤 를 보았다.
새장 안의 사람들도 마안을 피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전히 마안의 효과가 발휘
되는 가운데였다.
쿠응!
갑자기 커다란 굉음이 터졌다. 바실리스크가 마안을 발동하며 꼬 리를 내리친 것이었다.
잠시 후,마안이 내뿜던 보랏빛 불 빛이 사라지면서 모두가 눈을 떴다. 과연 루크는 살아남았을까?
다행이 루크에겐 별탈이 없었다.
블링크란 이동 스킬을 지닌 만큼, 마안이 발동되자마자 등을 돌리곤 블링크를 펼쳐 몸을 보전한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었 다.
바실리스크의 꼬리가 바닥을 때림 과 동시에 지반이 흔들리면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루크는 놈의 꼬리 옆에 쓰 러져 있었다.
위기감을 의식한 벤젠 기사단원들 이 다급하게 외쳤다.
“루크! 놈의 대가리가 가고 있어! 다시 블링크를 써!”
루크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지,바 실리스크가 입을 쩌억 벌리곤 쇄도 하고 있었다.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사단은 이 상황을 내심 만족스럽게 지켜보 았다.
어찌 됐건 드디어 벤젠 기사단 놈 들도 피해를 입게 됐지 않은가. 우리도 피해를 입었으니 너희도 피해를 입어야 해.
벤젠 기사단의 피해로 보상심리를 얻으려는 심보였다.
허나 두 기사단의 기대는 이루어지 지 않았다.
벤젠 기사단엔 마나 없이 이동스킬 을 쓸 수 있는 자가 있었다.
강현이 군단의 서 효과를 이용하여 루크의 앞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새장 안팎에서 놀란 목소리 가 터져 나왔다.
“최강현! 어떻게 바깥으로!”
“단장님!”
강현은 두 다리로 자세를 단단히 다지며 빙백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 다.
물러나. 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