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화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책장을 젖히고 몇 초 내에 암호를 풀었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다이얼 을 잘못 돌려서 울리는 걸까?
어쨌건 경고 마법진이 발동된 이상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하기 힘들어졌 다.
벌써 복도 저 멀리에서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다! 생포를 최우선,불가피 할시 사살해라!”
“메이아 황녀님의 침실에서 경고 마법진이 울리는 것 같습니다!”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달려오는 경비병들의 발소리가 마 치 우마의 발굽 소리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빅터가 다급하게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안타깝지만 여기 서 물러나야 합니다.”
빅터가 도망을 위해 급히 창문을 열었다.
하나 그와는 달리 김혜림은 금고가 박혀 있는 벽 주변을 손으로 쓸어내 렸다. 그러곤 아공간 반지에서 크로 우 보우를 꺼냈다.
“빅터 경은 책장을 밀어서 문을 막 아 주세요.”
“그래 봤자 얼마 못 버팁니다!”
“하라면 빨리 해요!”
“아,네!”
빅터는 속는 셈치고 책장을 밀어 문을 막았다.
그사이 김혜림은 애시드 에로우를 소환했다.
애시드 에로우를 겨냥한 곳은 다름 아닌 금고의 주변 벽이었다.
파악!
애시드 에로우가 틀어박히며 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치이익!
*
삐의! 삐의!
보구 수집방에서 보구를 고르던 강
현과 에르델,메이아도 커다란 경보 음을 들을 수 있었다.
메이아는 이 경보음이 자신의 침실 에서 나는 것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강현,에르델과 함께 침실에서 나 오자마자 발생한 상황이다.
메이아는 강현과 에르델을 의심했 다.
“감히 날 속여?”
강현으로서도 침실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야말로 숨겨진 계략이 고스란히 노출된 바나 다름없었다.
그런대도 강현은 능청스럽게 말했 다.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지금 농담 따먹기나 하는 걸 로 보여? 뭘 노리고 이따위 짓을 한 거지?”
“일단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 까? 무슨 상황인지는 알고 의심을 받았으면 합니다.”
“뭐 이런 뻔뻔한……
하나,길게 따져 물을 시간이 없었 다. 강현과 실랑이를 벌이는 이 시 간조차 아까웠다.
메이아는 서둘러 침실로 향했다.
그를 따라 강현과 에르델도 상황을 파악하러 가는 시늉을 보였다.
급히 침실로 돌아가던 중에 에르델 이 속삭였다.
“혜림 양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 은데 괜찮을까요?”
“최악의 경우 김혜림과 빅터를 버 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부분까지 염두에 두십시오.”
최악이란 다름 아닌 김혜림과 빅터 가 붙잡혔을 경우였다.
두 사람이 잡히면 벤젠 기사단은 물론이고 에르델까지 한꺼번에 무너 져 버리고 만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김혜림과 빅터 를 좀도둑으로 만들어서라도 꼬리를 잘라 낼 각오가 필요했다.
에르델은 강현의 생각이 매정하다 여겼다.
“그건 너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김혜림도,빅터도 제 한 몸 건사할 능력은 되는 자들이다.
일기를 얻어 내지 못하더라도 잡히 지는 않을 거다.
이윽고 강현과 에르델은 메이아의 침실에 다다랐다.
침실 앞은 부서진 문이며 몰려든 경비병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메이아가 팔을 크게 휘저으며 언성 을 높였다.
“김진수!”
메이아의 집사인 한국계 이세계인 김진수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황녀님,침실에 침입자가 발생했 습니다.”
“그딴 건 나도 알고 있어! 그것보 다 침입자는? 금고는? 얼른 말해!”
“그게……
김진수가 경비병들에게 물러나란 손짓을 했다.
병사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메이아 가 들어서도록 길을 터 주었다. 메이아는 신경질적인 발걸음으로 침실 안에 들어갔다.
침실 안은 무언가 녹은 악취로 가 득했고,문을 뚫는 과정에서 책장이 박살난 탓에 온갖 파편으로 너저분 했다.
하나,침실의 상태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금고의 상태였다.
그러나 금고가 박혀 있던 벽을 목 격한 순간,메이아는 황당함에 말문 이 막히고 말았다.
“하,참나…… 뭐 이런……
벽 주변이 녹아내려 큰 구멍이 뚫
려 있었고,그 안에 박혀 있어야 할 금고는 온데간데없었다.
금고 주변의 벽을 녹이고 금고를 통째로 홈쳐 가 버린 것이다.
메이아는 사나운 눈매로 강현과 에 르델을 노려보았다.
“이딴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 각해?”
강현의 반응은 여전했다.
“심하군요. 설마 황녀님의 침실에 서 도둑질을 하는 미친 자가 있을 줄이야.”
“최강현 단장!”
“범인은 아직 황궁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궁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수색부터 해야 하지 않겠 습니까?”
“끝까지 발렘할 생각이라 이거지?”
“저희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 니죠. 하지만 의심 받는 입장에선 썩 유쾌하진 않군요.”
“크옥.”
메이아로선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강현과 에르델이 꾸민 일이 분명하 다.
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증거가 없 었다.
모든 처벌에는 물증이 필요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강현과 에르델이 범인임을 증명하려면 당장 침입자를 잡아내거나,벤젠 기사단이 가져간 걸로 추정되는 금고를 찾아내야 한 다.
당장 강현과 실랑이를 벌여 봤자 메이아만 속이 뒤집어질 뿐이었다. 메이아는 손톱이 손에 파고들 정도 로 강하게 주먹을 쥐며 김진수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황궁 내에 수색협조 공문 돌려.”
“네!”
강현은 더 이상 제1별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에 가벼운 목례를 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유감입니 다. 돌아가서 벤젠 기사단도 수색에 투입하겠습니다.”
“둘 다…… 가만두지 않겠어.”
“이상한 일이군요. 에르델 황녀님 이 두 공작을 기소할 때 적극적으로 물증 중심의 의견을 펼쳤던 분이 아 니십니까? 지금 심증만으로 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건……
“염려 마십시오. 황궁 내의 엘리트 들이 범인을 잡을 테니까요. 너무 스트레스 받으시면 애지중지하는 피부가 망가질 겁니다.”
“……즉!”
화를 내야 할 쪽은 메이아인데 어 느새부턴가 강현이 몰아붙이는 형국 이었다.
중간부터 들으면 메이아가 괜한 사 람 의심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강현은 분에 찬 메이아를 뒤로하며 에르델과 함께 제1별궁에서 벗어났 다.
에르델의 거처인 제3별궁으로 향하 던 중,에르델이 후련한 투로 말했 다.
“마지막에 아주 긁을 대로 긁던 대 요.”
“의심 받아 기분 나쁘다는 걸 어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정말 대단해요. 금고를 풀 지 못하니까 아예 금고째로 운반한 거네요. 벽에서 금고를 빼낸 것까진 그렇다 쳐도 상당한 무게였을 텐데 어떻게 옮겼을까요?”
“에르델 황녀님.”
“네?”
“본인이 혜림이에게 어떤 물건을 줬는지 잊으셨습니까?”
“아!”
김혜림은 아공간 반지를 가지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반지를 건넨 것은 바로 에르델 공주 본인이었다.
김혜림은 벽에서 분리한 금고를 아공
간 반지에 담아 운반한 게 분명했다. 에르델은 이제야 납득이 가는 듯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혜림 양은 그 짧은 순간에 잘도 생각해 냈네요.”
“그조차 생각 못했다면 그건 그것 대로 문제지요.”
“사람이 그리 칭찬이 박해서야. 아 까 저한테 두 사람을 버린다고 말한 것도 본심은 아니었겠네요. 강현 씨 라면 어느 정도 예상했을 테니.”
“진심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워낙에 표정 변화가 없으니 진심이 었는지,아닌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에르델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제1별궁에서 발생한 사건은 황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황궁 안에 남아 있던 기사와 병사 는 물론이고,퇴근했던 자들까지 모 두 복귀시켜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범인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정작 금고를 빼내 간 김혜림은 아 공간 반지를 다른 곳에 숨겨 놓고 같이 수색에 나섰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에 긴급 황궁의회에 소집되긴 했다만,메이아는 대대적 인 수색 요청을 신청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색 요청을 하면 황궁 내의 모든 건물을 샅샅이 뒤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금고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밝혀야만 한다.
금고 안에 슈타인 백작의 일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않 은가.
결국 메이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금고 수색을 중지해야만 했다.
?
강현은 만전을 기하기 위해 수색이 끝난 후에도 금고를 열지 않았다.
사홀 뒤,슬슬 제1별궁 소동이 가
라앉을 즈음에야 김혜림을 따로 불 러다 말을 꺼냈다.
“이제 금고를 열어 봐도 되겠군.”
김혜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 반지를 아래로 향하게 하곤 손가락 을 대었다.
그녀가 눈을 감고 꺼낼 물건의 이 미지를 머릿속에 그리자,반지에서 빛이 일어나면서 무거운 금고가 튀 어나왔다.
투응!
금고가 바닥을 찧으면서 카펫의 일 부가 찢겨져 나갔지만 그건 아무래 도 좋았다.
김혜림은 손바닥으로 미스릴 금고 의 윗부분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금고를 풀 수 없으면 통째로 가져 오자 싶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머리 를 써야죠. 안 그래요?”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격이 군.”
“쥐라도 잡은 게 어디에요. 자,얼 른 열어 보죠.”
김혜림이 금고에서 떨어졌다. 강현은 빙백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부여하여 미스릴 금고의 문에 가져 다 댔다. 그러곤 톱질을 하듯 슬근 슬근 문을 잘라 냈다.
마침내 미스릴 금고 문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금고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달랑,일기 한 권뿐이었다. 애당초 필요한 건 일기뿐이었으니 원하는 건 얻은 셈이었다.
강현은 일기를 꺼내 내용을 확인했 다.
“슈타인 백작의 일기가 맞군.”
“이걸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
겠네요.”
“드리안 공작파에 정보를 흘려 둬. 내가 슈타인 백작의 일기를 얻었고, 공국으로 전달하려 한다고. 그리고 이것도 드리안 공작파가 손에 넣을 수 있게 손을 써 둬.”
강현이 조직 연락책들이 쓰는 용 문양 도장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정작 일기는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해충을 해충으로 제압한다.
이로써 작전을 위한 포석을 전부 깔아 두었다.
이제 남은 건 드리안 공작이 강현 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는 것뿐.
그는 강현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 이다.
이 일기는 곧 그의 목숨줄이나 다 름없으니 말이다.
*
제국 북쪽에 위치한 드리안 공작가 저택.
드리안 공작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쨍그랑!
“지금 뭐라고 했느냐!”
강현의 움직임을 전담하여 마킹하 고 있는 겔로그가 고개를 숙이며 재 차 보고를 올렸다.
“메이아 황녀가 일기를 잃어버렸다 고 합니다. 증거가 없어 범인을 색 출하지는 못했지만 아무래도 최강현 의 손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 망할 계집년이 기어이 문제를 일으켰군. 최강현이 가져갔다는 것 은 확실하느냐?”
“벤젠 기사단의 숙소에 잠입시킨 시종의 보고에 의하면 일기를 공국 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공국으로? 에르델 황녀 본인이 직 접 사용하지 않고?”
“벤젠 기사단은 공국의 기사단이잖 습니까. 공국에서 직접 우리 약점을 쥐고 흔들 작정인가 봅니다.”
미치고 팔짝 될 노릇이었다.
타인에게 약점이 잡혔다는 것만으 로도 불쾌한데,그 약점이란 게 이 쪽저쪽으로 휘둘리고 있다니.
하지만 아직 일기가 공국의 손에 넘어갔다고 단정 짓긴 이르다. 공국으로 운반하는 틈을 노려 어떻 게든 탈취해야만 한다.
“운반 책임자는 누구더냐?”
“그와 관련된 시종의 보고가 있었 습니다. 아무래도 공국은 제국 내에 수많은 연락책을 포진시켜 둔 모양 입니다. 운 좋게도 연락책들이 사용 하는 도장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 다.”
겔로그는 입수한 도장을 드리안 공 작에게 전달했다.
“이걸로 뭘 어쩌자는 것이냐?”
“C급 보구 중에 똑같은 물건을 감 지할 수 있는 다운타운의 수정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로 공국의 연락책 들을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겔로그의 의견을 명안이라 여긴 드 리안 공작은 찡그린 표정을 풀고 음 흉하게 웃었다.
“크크크,그래,그런 좋은 수단이 있었군. 즉시 케이델 공작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라. 두 공작파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 일기를 되찾는 거 다.”
“찾는 김에 연락책을 모두 쓸어버 리겠습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남김없이 족치도록.”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