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화
벤젠 기사단은 물론이고,다른 연 합기사단 소속인 크로스 기사단과 퀵실버 기사단도 웨이브 공략에 성 공했다.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는 연합 기사단이다.
첫 임무를 성공리에 마치면서 본격 적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세 기사단의 웨이브 공략 성공 소 식은 황궁에도 알려졌다.
제2별궁에선 제2황자 드래코프가 부채를 쥐락펴락하며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향나무 재질의 백단 부채의 이음매
가 신경질적으로 맞물리는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벤젠 기사단이 샬로만 영지의 웨 이브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들어왔 네. 놈들의 명성을 추켜세운 다음 추락시킨다는 작전은 오히려 놈들의 명성을 더욱 높여 준 셈이 되고 말 았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디 벨롤?”
질문을 빙자한 추궁이었다.
에르델은 아직까지 왕위계승권자로 서 존재감을 유지했다.
그것은 온전히 벤젠 기사단의 존재 감 덕분이다.
그 벤젠 기사단을 떨쳐 낼 회심의 함정이라 여겼는데,그러긴커녕 적의 사기만 올려 주는 꼴이 되고 말 았다.
파르륵파르륵!
드래코프는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입은 무엇을 위해 달려 있지? 어 서 대답을 하게,디벨롭 드래코프는 성질이 조급했다.
그래서 이처럼 일이 틀어지면 조금 도 기다리지 못하고 뒤틀린 마음을 서슴없이 내비쳤다.
빌로스 제국의 제2황자 신분이면 어지간한 건 모두 이룰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바라 왔던 모든 것도 돈 과 권력을 통해 이뤄 왔다.
그러나 제2황자 신분으로도 확신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황제의 자리 였다.
그런 드래코프이니만큼 제1황녀와 제3황녀가 형제자매로 보이지 않았 다.
그에겐 친혈육들이 황위를 가로막 은 빌어먹을 계집들로만 보였다. 고로 이번 일을 통해 벤젠 기사단 은 추락,에르델은 나락공주 확정이 되었어야만 했다.
한데 보란 듯이 실패하고 말았다.
드래코프가 바득바득 이를 갈아붙 였다.
그 맞은편에서 디벨롭은 우아한 몸 짓으로 핫케이크 위에 버터와 꿀을 올렸다.
“식사를 거르면 좋지 않습니다. 드 시지요.”
“디벨롭. 아직 질문에 대답하지 않 았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연합 기 사단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연합 기 사단 설립을 건의한 드래코프 님의 명성도 덩달아 올라갑니다. 작전의 성패,그 어느 쪽이라 할지라도 이 득이었지요. 대답은 되었습니까?”
드래코프는 세 갈래로 갈라져 있던 미간을 풀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디벨롭의 말대로 였다.
이번 작전이 실패했다고 딱히 손해 본 건 없지 않은가.
이득이면 이득이지,손해란 전혀 없었다.
하나,그렇다고 히스테리를 부린 것을 사과할 드래코프가 아니었다. 그가 말머리를 돌렸다.
“흠홈,뭐 이번 일은 그렇다 치고 다음 작전은 어쩔 텐가? 다시 좌표 조작 작전을 쓸 생각인 건 아니겠 지?”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지요. 성급히 움직이는 건 좋지 않습니다. 저희의 수를 보았으니,이제 저쪽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봐야지 않겠습니 까.”
“어찌 됐든 내게 실망을 주지 말 게.”
“유념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접시에 담긴 핫케이크가 동이 났다.
디벨롭은 빈 접시를 치우면서도 여 전히 봉사심이 또렷한 집사의 모습 을 지켜 나갔다.
황족이란 명함만 빼면 무뢰한에 가 까운 게 드래코프란 작자다.
디벨롤도 야심가인 이상 드래코프 따위에게 욕먹는 게 그리 달갑지만 은 않았다.
그래도 지금은 참아 둘 가치가 있 다.
머저리가 황제가 되면 그만큼 다루 기 쉬울 테니까.
그저 비위를 맞추는 것만으로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면 머저리 상 대쯤이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언제까지고 허세나 부리라고 해라.
허를 주고 실을 취하는 거라면 겉 으로 보이는 체면 따윈 아무래도 좋 다.
그보다 디밸롭은 이번 작전이 실패 한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벤젠 기사단의 실패를 확신했는데 보란 듯이 성공해 버렸다.
그 불가능한 공략을 성공으로 이끈 자가 강현일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 다.
‘웨이브 공략 능력 하나만큼은 독 보적이라 이건가.’
을롬보르 시에서 단신으로 SS랭크
던전을 제압했던 자다.
심지어 그때는 드높은 명성도 없던 루키에 불과한 때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와서는 SS랭크 웨이브도 우스울 터.
그런 강현을 고작 시간제한만으로 제압하려한 게 잘못된 판단이랄 수 있었다.
디벨롤은 강현을 제압하려면 좀 더 공을 들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경계 너머에 있는 자들에게 웨이 브 봉인석을 보내라고 해야겠군.’
*
5일간의 시간을 거쳐 벤젠 기사단
은 황궁에 도착했다.
강현은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에르 델을 찾아갔고,에르델은 강현을 반 갑게 맞이했다.
“소식 들었어요. 웨이브에서 먼 곳 으로 떨어졌었다면서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당연한 일입니다.”
“하여간 사람이 걱정했는데 꼭 그 리 반응해야겠어요?”
“그것보다 복귀 중에 희소식을 접 했습니다.”
“그것보다라니…… 에휴,일단 그 희소식이라는 것부터 들어 보죠.”
강현은 조직 연락책이 공통적으로 도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대해 덧붙였 다.
강현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후, 에르델도 빅터나 김혜림과 마찬가지 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대로 일이 진행될까요?”
“일단 작전을 시작하려면 메이아 황녀가 잡고 있는 드리안 공작의 약 점을 알아내야 합니다.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그거라면 대강이나마 알아낸 게 있어요. 아무래도 슈타인 백작이 죽 기 전에 작성한 일기가 있는 것 같 아요.”
“확실합니까?”
“슈타인 백작가 사건 이전에 두 공 작파의 지시를 받은 내용이 담겨 있 는 걸로 추정돼요. 만약 제가 일기 를 손에 넣었다면 두 공작파에게 질 일도 없있겠죠.”
일전 공국에서 제국으로 국경을 넘 던 당시,드리안 공작이 강현과 거 래를 트기 위해 찾아왔었다.
당시 그는 제1황녀에게 약점을 잡 혔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그 약점이라는 게 아마도 이 일기 를 들어 말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일기의 존재여부 또한 확 실할 터.
그러지 않고서야 두 공작파가 제1 황녀 메이아에게 쩔쩔멜 리 없다.
두 공작파로 하여금 조직의 연락망 을 붕괴시키게 하려면 그들을 움직 이게 할 만한 미끼가 필요하다.
에르델이 말한 ‘일기’가 충분히 그 미끼 역할을 해 줄 수 있으리라.
“그 일기부터 손에 넣도록 하지요. 제1황녀가 따로 이용하는 금고라도 있습니까?”
“언니는 아끼는 물건일수록 가까이 두는 성격이에요. 금고가 있다 하더 라도 언니가 머무르는 제1별궁 안에 있겠죠.”
“그걸 빼내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군 요.”
“아마 힘들 거예요. 황궁 안의 모 든 건물은 정문으로만 출입하게 되어 있어요. 건물마다 마법진이 설치 되어 있어서 잠입은 불가능해요.”
황궁 안의 보안체계라면 강현도 익 히 들어 알고 있었다.
건물 주변으로 결계가 펼쳐져 있어 정문 외의 곳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만약 창문 등을 통하거나,개구멍 을 내서 잠입한다면 바로 결계가 반 응하여 알람이 울렸다.
다만 충전식 결계인지라 매일매일 황궁마법사들이 마나를 불어넣는 걸 로 알고 있었다.
만약 단 몇 분만이라도 충전을 늦 출 수 있다면 그 틈을 노려 잠입할 수 있으리라.
어차피 나올 때는 마법진이 반응하
지 않으므로 잠입만 가능하다면 얼 마든지 일기를 찾아볼 수 있었다. 강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금방 방법 을 떠올려 냈다.
“이번에 저쪽에서 좌표로 장난질한 걸 역으로 이용하겠습니다. 마법사 들이 결계 재충전에 다소 소홀해지 게 만들도록 하죠.”
“알겠어요. 강현 경이 작전을 시행 한다고 하면 이쪽도 전력으로 지원 할게요. 달리 필요한 건 없나요?”
“없습니다.”
대화를 마친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 나며 대회의장으로 가려 했다. 웨이브의 공략 완료를 황궁의회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문밖을 나서던 찰나,불현 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필요한 게 있었습니 다. S급 활 보구 하나만 수배해 주 십 시오.”
벤젠 기사단에서 활을 쓰는 자는 한 명뿐이다.
누구를 위한 부탁인지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르델은 강현의 부탁을 듣곤 화사 하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혜림 양을 아 끼시네요.”
강현으로선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대충 손을 휘저으며 몸을 돌렸다.
?
강현은 에르델과의 만남을 마치고 대회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속상부인 황궁의회에 웨 이브 공략 보고를 올렸다.
그 과정 중 텔레포트의 장애로 웨 이브의 공략이 지난했음을 분명히 명시했다.
“원래 도착해야 할 장소가 아닌, 이틀거리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 습니다. 이건 명백한 대마법진 관리 마법사들의 과실입니다.”
좌표 조작질은 황궁의회가 직접 명 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사들을 처벌하면 황궁의회에까 지 그 여파가 미칠 터.
그런 만큼 강현이 한두 마디 한다 고 징계를 내릴 리 없었다.
예상대로 황궁의원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제국 전역의 지형지물이 늘 같은 모습,같은 자리에 있다 생각하나? 좌표에는 항상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네.”
“오차라기에는 너무 먼 곳에 떨어 졌습니다.”
“마치 마법사들이 일부러 잘못했다 는 것처럼 들리는군. 무례한 언동은 삼가게. 여긴 공국이 아니라 제국일 세.”
황궁의원 하나가 강현을 몰아세우 자 나머지 의원들이 일제히 입을 모 아 마법사들을 두둔했다.
“마법사들도 사람인데 그 멀리 있 는 곳을 딱딱 짚어서 보낼 수만은 없지.”
“약간의 장애는 기사단의 임기응변 으로 처리해야 되는 거 아닌가? 무 엇 때문에 최고 중의 최고들만 모아 서 연합 기사단을 창설했다 생각하 나?”
황궁의원들이 고압적인 눈빛으로 강현을 내려다보았다.
어디 할 말 있으면 더 해 보라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나 강현은 억울해하지도,동요하
지도 않았다.
어차피 마법사들에게 징계나 내리 라고 꺼낸 말이 아니다.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저 역시 마법사들의 징계를 바라 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점은 분명하지요. 하니,의회가 주도하여 텔레포트 좌표들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좌표 재점검? 제국 전역의 좌표를 재점검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한 줄 아나? 황궁 안에 있는 모든 마법사를 동원해도 두 달 은 족히 걸리네! 이 사람이 지금 말 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먼.”
“주요 도시들만이라도 재점검을 해
야지요. 만약 또다시 마법사들이 실 수를 하고,그것 때문에 공략에 실 패하면 그건 누구 잘못입니까?”
“방금 말하지 않았나? 설사 트러블 이 일어나도 대응할 수 있는 자들이 라 생각하여 자네들을 섭외한 걸 세.”
“그렇다면 트러블이 최대한 적게 일어나도록 조치를 요구하는 것도 기사들의 몫이겠지요. 이는 정당한 요청이 아닙니까?”
방금 황궁의원들은 트러블을 포함 한 모든 책임이 기사들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그렇다면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도 록 건의하는 건 지극히 정당한 요구랄 수 있었다.
황궁의원들은 저희들끼리 낮은 목 소리로 의견을 나누었다.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그냥 묵살 해 버리죠.”
“그런데 딱히 누굴 처벌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건의 자체는 정당하잖 소. 드래코프 황자님이 말씀하시길 좌표 조작질을 또 써먹진 않을 거라 하오. 그렇다면 요구에 응해 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소?”
“좌표를 재점검한다 해서 저쪽이 이득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 이죠. 아무래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내민 건의인 것 같습니다.”
강현이 보통 인물이 아닌 건 황궁
의회도 잘 아는 부분이다.
얼핏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건의지만 강현이라면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 황궁의회가 정당한 건의까지 거절하면 그를 빌미로 또 다른 계책 을 꾸미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결국 황궁의회는 강현의 건의를 받 아들이기로 했다.
“좌표 재점검 건의는 받아들이도록 하지. 주요도시를 기점으로 보름 동 안 텔레포트 좌표 재점검을 실시하 겠네. 황궁 안의 마법사들은 최소한 의 인원만 남고 현지에 파견하겠네. 이제 만족하나?”
이것으로 강현에게 빌미를 내줄 일
은 없을 거다.
황궁의원들은 강현의 계략을 사전 에 차단했다고 여기며 코웃음을 쳤 다.
정작 강현 본인은 황궁의원들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지만 말이다.
*
강현의 건의가 받아들여지면서 황 궁마도부에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효용성도 무의미한 대마 법진을 관리하느라 인력이 분산된 마당이다.
그 와중에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
는 좌표 재점검 명령까지 떨어졌다. 제국 주요도시의 좌표를 직접 측정 하기 위해 대다수의 인력이 출장을 나가야만 했다.
인원이 줄어든 만큼 남은 황궁마법 사들의 업무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 다.
“출장 나간 사람들 연구물 관리 제 대로 하란 말이야! 다음 달에 마탑 학회에서 발표할 것들이라고!”
“의료부에서 마나 약초 가공한 거 달라는데 아직 안 끝났습니까?”
“손은 모자라지 업무는 많지. 어떤 놈들이 벤젠 기사단을 잘못 보낸 거 야? 그거 때문에 되도 않은 좌표 재점검이나 하게 되고…… 아,정말 미치겠구만.”
“마도부장님! 30분 후에 황궁 결계 마법진 충전해야 합니다! 업무표에 아무도 적혀 있지 않던데 누구 담당 입니까?”
“그런 건 나중에 해도 상관없잖아! 지금 전원 의료부에서 부탁한 마나 약초 가공부터 해! 응급환자라도 생 기면 가장 곤란한 건 우리랑 의료부 야!”
업무가 워낙 바빠지다 보니 중요도 가 낮은 업무는 자연스레 미뤄졌다. 황궁 안에 경비병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굳이 결계 마법이 아니더라 도 경계 및 보안이 제국 최상급인 곳이다.
고작해야 1,2시간뿐인데 설마 그 사이에 침입자가 생길라고.
하지만 바로 그 틈을 기다리던 자 들이 있었다.
황궁마도부의 상황을 지켜보던 빅 터가 얼른 제3별궁으로 복귀하여 강 현에게 보고를 올렸다.
“마법사들이 결계 재충전을 미뤘습 니다. 잠입하려면 지금 해야 합니 다.”
강현은 제1별궁 잠입을 앞두고 에 르델,김혜림,빅터에게 각자의 역할 을 상기시켰다.
“나와 에르델 황녀님은 제1황녀 메 이아의 시선을 끌고,김혜림과 빅터는 일기를 찾아낸다. 각자 맡은 역 할을 확실하게 수행하도록.”
김혜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모를 라쥬를 사용했다. 녹색빛이 김혜림 과 빅터 두 사람을 감싸면서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사람을 먼저 보낸 강현은 에르 델을 에스코트했다.
“저 둘이 일기를 찾을 때까지 제1 황녀를 붙잡아 둬야 합니다.”
“미리 말씀드릴게요. 메이아 언니 는 남자 다루는데 도사예요. 추파를 던질 수도 있으니까 잘 받아 넘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