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화
본래 화살의 이상적인 궤도는 흐트 러지지 않는 포물선을 그리는 것이 라 한다.
그리 보았을 때 포물선을 그리지 않고 맞춰야 하는 공중의 물체는 고 난이도의 기술을 요구했다.
혹자의 화살 솜씨를 논할 때 날아 다니는 까마귀나 기러기를 맞췄다는 걸 예시로 삼지 않던가.
그만큼 공중에 있는 물체를 화살로 맞춘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혜림을 비롯한 3조의 기사들이 화살 등을 쏘았지만 4발 중 고작 1 발만이 녹성에 다다랐다.
치이익!
적중과 동시에 녹성의 표면이 녹아 내렸다.
적중한 게 김혜림의 애시드 에로우 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김혜림은 강현이 만들어 둔 얼음발 판 위를 징검다리 넘듯 뛰어다니며 외쳤다.
“강현 씨! 다른 건 됐으니까 계속 발판을 만들어 주세요!”
수면이 가라앉기 전에 남은 별들을 격추하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김혜림의 활은 150미터 사거리에 서 9할의 적중률을 보였다.
한데 지금은 수위의 높이를 더한다 해도 별과 떨어진 거리가 180미터에 이르렸다.
수위가 계속 줄어들 것과 화살이 빗맞을 걸 감안해서라도 서둘러 별 들을 공략해야 했다.
강현은 연속해서 얼음 발판을 만들 어 냈다.
순식간에 수면 위로 수십 개의 발 판이 떠다녔다.
한데,어느 순간부터 얼음 발판 위 를 넘나들던 김혜림의 모습이 갑자 기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걸 눈치 챔 3조의 기사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혜림 양이 보이지 않아. 설마 당 한 건 아니겠지?”
“누구 혜림 양 본 사람 없어?”
“제길, 우리 중에 그나마 적중률이 높은 사람은 혜림 양밖에 없는데.”
사정거리에 있어서도,위력에 있어 서도 3조의 기사들이 가진 보우건보 다 김혜림의 크로우 보우가 훨씬 강 력 했다.
게다가 무려 벤젠 기사단의 홍일점 이자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그녀 아 니던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사들이 걱정할 정도로 어 수룩한 여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김혜림은 녹성 바로 아래의 얼음 발판에 다다라 있었다.
은신 스킬 카모플라쥬를 적절히 사 용하여 이동한 것이었다.
김혜림은 녹성을 겨냥한 즉시 애시 드 에로우를 쏘았다.
바로 아래까지 접근하여 거리를 좁 힌 만큼 화살은 두말할 것도 없이 녹성의 정중앙에 적중했다.
치이익!
강현이 얼음 발판을 만들수록 그녀 의 움직임은 자유로워졌고,화살의 연사도 수월해졌다.
그리고 이윽고 녹성의 몸체에서 핵 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김혜림은 녹성의 몸체 사이로 드러 난 핵을 향해 가차 없이 일반 화살 들을 연사했다.
피이엉!
그녀 나름대로 마나소모량을 조절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하나,일반 화살이라곤 해도 타이 탄의 파편으로 만든 화살촉이다.
데미지는 충분했다.
녹성의 핵에 화살들이 박히면서 녹 성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나머지 2개의 별인 적성과 황성도 다를 것 없었다.
모든 별이 떨어지면서 2페이즈가 마무리되었다.
*
물이 모조리 빠져나가자 벤젠 기사 단원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한곳 에 모였다.
“기력…… 포션 남은 거 있나?”
“여기 있어. 아,혹시 지금 몇 시 간 남았는지 확인 가능해?”
“1시간밖에 안 남았어.”
“결국 쉴 시간은 생기지 않는구 만.”
제아무리 기력 포션을 먹어도 없는 힘이 생겨나는 건 아니다.
내일 모레 힘을 빌려 온다는 기력 포션이라지만 비유에 불과하며 실제 론 피로감을 둔하게 할 뿐이었다. 모두가 둔해진 감각 속에서 짜내듯 이 힘을 내고 있었다.
2페이즈를 마친 지금,공간 6시 방 향에는 문이 생겨나 있다.
로비에서 충분히 쉬다가 다시 입장
할 수 있도록 페이즈 간간이 문이 생겨나도록 설계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벤젠 기사단에게 남은 시간 은 고작 1시간.
피로 때문에 손끝이 저려도.
눈이 충혈 되고 눈꺼풀에서 허물이 일어나도.
목 뒤에서 뻐근함이 올라와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억지로 라도 보구를 쥐었다.
벤젠 기사단 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붕대를 꺼내 무기 쥔 손을 칭칭 동여 감았다.
피로로 인해 무기를 놓쳐 죽는 것 만큼 꼴사나운 게 없었다.
공략을 마칠 때까진 무기를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배어 나왔다. 이윽고 6시 방향에 생겨났던 문이 사라지며 3페이즈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바뀐 건 표지판의 안내 문구였다.
원래 달의 방 공략 문구가 적혀 있던 표지판의 글자가 바뀌며 3페이 즈 공략법이 나타났다.
[하늘의 주인은 공격무효화 능력을 띠고 있다. 하늘의 주인이 가진 공 격무효화 능력을 해제하려면 태양, 달,별을 격추해야 한다. 태양,달, 별을 없애는 순서는 스스로 알아내 라. 순서대로 없애지 못할 경우 하 늘의 징벌이 발동한다.]
또 태양,달,별을 공략하라고?
벤젠 기사단 누구할 것 없이 손가 락으로 눈두덩 사이를 주물렀다. 피곤해서 자신들이 문구를 잘못 읽 었나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다시 읽 어도 문구는 그대로였다.
겨우 추스른 전의가 다시 꺼지는 듯했다.
“단장님,또 태양,달,별을 없애야 되는 겁니까?”
“그런듯하군.”
“게다가 이번에는 보스 몬스터까지 상대해야 되겠지요?”
“그렇겠지.”
“좀생이처럼 순서도 안 가르쳐 준 다는데요?”
“그렇다는군.”
“하아……
기사들의 한숨에서 깊은 짜증이 묻 어 나왔다.
이걸로 태양,달,별만 3번째 상대 하고 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공략 순서조차 알 수 없으니 어떤 몬스터부터 사냥해 야 할지 모른다.
대충 찍어서 맞추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세 부류의 몬스터를 공략하는 순서 에는 6가지 경우의 수가 있었다.
6분의 1의 확률로 찍어 맞추며 공
략하란 거다.
1이 나오지 않으면 죽는다고 작정 하고 주사위를 던지는 거나 마찬가 지였다.
어느새 4개의 별,회전태양,문 슬 라임이 되살아났다.
뿐만 아니라 공간 12시 방향에 새 의 머리를 가진 거인 석상도 덩달아 나타났다.
“끼요오!”
거인 석상은 신장만 하더라도 장장
10미터에 달했다.
게다가 들고 있는 무기 역시 10미 터에 달하는 장창이었다.
말이 장창이지 높이나 굵기가 여느 대신전의 기둥을 뽑아서 끝에 창날을 단 듯한 모습이었다.
저것에 찔린다면 꿰이는 정도가 아 니라 몸뚱이가 아예 분쇄되어 버리 리라.
벤젠 기사단원들은 억지로 무기를 들어 세웠다.
“도망가기에도 늦었어. 어떻게든 죽기 살기로 싸워 볼 수밖에.”
“단장님! 어느 몬스터부터 칠까요?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모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치고 는 힘 빠진 표정이었다.
한 번 빠져나간 전의를 다잡는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모두가 절망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강현이 갑자기 한 가지 의문 을 드러냈다.
“이상하군. 달의 방 표지판만 공략 문구가 바뀌었어.”
3개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었다지 만,각 방에 있었던 공략 표지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3페이즈에 들어서면서 문구가 바뀐 건 달의 방에 꽂혀 있던 표지판뿐이 다.
태양의 방과 별의 방에 꽂혀 있던 공략 표지판은 문구가 그대로였다.
왜 달의 방에 꽂혀 있던 표지판만 3페이즈 문구로 바뀌었을까?
단순히 3페이즈 공략 문구를 알려
주려는 것이라면 따로 표지판이 생 겨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래서야 마치 달의 방 공략 문구 를 숨기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강현은 불현듯 스쳐 가는 생각에 음디티를 불렀다.
“음디티,달의 방 공략 문구는 뭐 였지?”
“달의 방 공략 문구는 1페이즈 때 에 말씀드린 것처럼……
“적혀 있던 그대로 말해.”
3조 조장인 음디티가 맨들맨들한 민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었 다.
“……달을 없애려면 태양의 조각이 필요하다.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차오를 때마다 공간에 물이 차오른다. 마나를 사용하면 모든 걸 무시하는 전격을 뿜어낸다…… 였을 겁니다.”
“모든 걸 무시하는? 그 문구였던 건 확실하나?”
“확실할 겁니다. 그래서 실드 무시 전격이라 말씀드린 거고요.”
“모든 걸 무시한다는 건 공격무효 화 능력도 무시한다는 말이 되겠 군.”
강현의 말을 들은 기사들이 3초 간 침묵에 잠겼다.
3초 뒤, 기사들은 뒤늦게 말뜻을 알아듣곤 탄성을 내질렀다.
“아!”
“과연!”
모든 걸 무시하는 전격이라 하면 기사들 입장에선 실드부터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말장난에 불과했다.
모든 걸 무시한다는 건 공격무효화 능력도 무시할 수 있다는 뜻 아닌 가.
일부러 마나를 사용하여 문 슬라임 으로 하여금 능력 무시 전격을 내뿜 게 한다.
그리고 그 전격으로 다른 몬스터를 처리한다.
이게 3페이즈의 진짜 공략법이랄 수 있었다.
강현은 3번째로 재등장한 문 슬라
임을 바라보며 대놓고 마나 블레어 드를 만들어 냈다.
“백문이 불여일견. 실제로 해 보면 알겠지.”
강현이 마나 블레이드를 문 슬라임 에게 휘둘렀다.
그러자 마나 반응을 감지한 문 슬 라임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이내 크게 튀어 오르며 전격을 발산했다. 파지직!
문 슬라임의 전후좌우로 전격이 쁨 어져 나갔다.
강현은 전격을 피해 몸을 숙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격의 범위 안에는 하늘의 주인과 회전태양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의 주인과 회전태양에겐 공격 무효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격이 파고들었다.
다만 전격은 하늘로는 뻗진 않았기 에 4개의 별까지는 닿지 않았다. 아마 2페이즈에서 이 방법을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전후좌우로만 전 격이 뻗어나가도록 설계한 것이리 라.
어차피 중요한 건 하늘의 주인이 데미지를 입었냐는 점이다.
하늘의 주인은 전격에 적중되자마 자 미미하게 떨며 경직되었다. 더불 어 석상의 표면에 짙은 그을림 자국 이 남았다.
그를 본 기사들이 주먹을 불끈 쥐
었다.
“좋아! 효과가 있어!”
“다들 남은 마나를 다 쥐어짜 내자 고. 저 빌어먹을 몬스터들 낯짝 보 는 것도 질렸어.”
강현이 공략 방법을 찾아냄으로서 꺼져 가던 전의가 되살아났다.
기사들은 무기에 마나 오오라를 부 여하며 서둘러 문 슬라임의 마나 반 응을 이끌어 냈다.
공간 안에 물이 차오르면 전격에 자신들도 피해를 입었다.
그러니 놈이 보름달의 형태를 갖추 기 전에 공략을 마쳐야 했다.
문 슬라임이 전격을 내뿜을수록 하 늘의 주인이 받는 데미지가 누적되었다.
이윽고 하늘의 주인에게 일정량 이 상의 데미지가 들어가면서 석상 몸 둥이에 기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쩌적!
웨이브 보석 앞에서 진을 치고 있 던 살로만 남작은 초조하기 그지없 었다.
남은 공략 시간은 이제 고작 10분.
한데 벤젠 기사단은 아직도 나올 기미가 안 보인다.
역시 소문이 자자한 엘리트 기사단 이라 해도 6시간 만에 SS랭크 웨이 브 공략은 무리인가.
살로만 남작의 측근들이 피신을 권 했다.
“남작님,지금이라도 어서 피신하 셔야 합니다. 이제 불과 1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기다리겠노 라. 최강현 단장이 반드시 공략하겠 다고 했지 않느냐.”
“잘못한 건 그들입니다! 본래 시간 에 맞춰서 왔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잘잘못 따윈 아무래도 좋다. 지금 중요한 건 과수원이 소멸하느냐 마 느냐이니. 난 마지막까지 기다리겠 다 했으니 피신하려면 너희들끼리 피신하거라.”
본래 샬로만 영지는 가난한 땅이었 다.
개간하기에는 너무 척박하며 산사 태가 잦아 해마다 많은 사상자가 발 생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며 영 지민이 하나둘 떠나갈 때 즈음 부임 한 게 현재의 샬로만 남작이었다.
영지에 물이 통하도록 수로를 다시 파내고,주변 영주들에게 사정사정 하여 비옥한 흙을 날라다 옮겼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게 영지 동쪽의 과수원이며 이제는 포도주 익는 냄 새가 그윽한 땅이 되었다.
만약 드넓은 과수원이 소멸되면 샬 로만 영지는 더 이상 소생이 불가능한 땅이 될 거다.
살로만 남작은 고작 10분이라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기다리고 자 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영지와 함께 명을 마치고자 했다.
W분,9분,8분...
시간은 홀러 어느덧 1분도 채 남 겨 두지 않은 때.
초 단위로 떨어진 시간을 두고 샬 로만 남작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결국 실패했는가.”
탄식 섞인 목소리가 허무하게 흘러 나왔다.
그러나 살로만 남작은 감긴 눈 너 머에 빛이 아른거리는 걸 느꼈다.
눈을 뜨니 웨이브 보석에 출구가 생기며 쏟아져 나오는 빛이 보였다. 그 빛을 등지고 강현을 필두로 한 벤젠 기사단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 냈다.
동시에 웨이브 보석이 꼭대기부터 서서히 소멸되기 시작했다.
강현은 소멸되어 가는 웨이브 보석 을 뒤로하며 입을 열었다.
“두꺼운 커튼이 달린 방 8개만 준 비해 주십시오.”
“두꺼운 커튼 말인가?”
강현은 푸르기 짝이 없는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잠꼬대로 별을 공격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