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화
드리안 공작이 직접 국경까지 와선 강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리안 공작의 본래 활동구역은 제 국 북쪽이다.
제국의 공작쯤 되면 황제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밀리지 않는 권력자다. 왕위계승권자들은 물론이고 3공국 의 공왕들에게도 전혀 꿀리지 않는 다고 보면 되었다.
그런 자가 제국 남동쪽까지 먼 길 을 직접 찾아왔다는 건 그만한 이유 가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강현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벤젠 기사단 일정에 드리안 공작 님과의 회담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만?”
강현과 한 번 마주쳤던 적이 있는 겔로그이기에 예상했다는 둣 대응했 다.
“여전히 뻣뻣하군. 대화를 나누어 서 나쁠 건 없을 거다. 정확하게 말 하면 대화라기보단 거래에 가깝겠 군.”
“거래할 재료는?”
“최진철에 대한 정보.”
“그 건은 이미 끝낸 지 오래야.”
“역시 모르고 있었군. 슈타인 백작 가 사건 때 최진철이 죽었다고 생각 하나?”
마치 최진철이 아직 살아 있는 것 처럼 말하는 겔로그였다.
그의 말에 노이즈가 섞이지 않은 걸로 보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분명 최진철은 강현이 직접 베어 냈었다.
목이 떨어지는 것까지 확인했는데 살아 있다고? 스킬이나 보구를 이용 해서 자신의 눈을 현혹시켰던 건가. 강현은 김혜림에게 벤젠 기사단을 맡기곤 홀로 이동하고자 했다.
“김혜림,단원들 데리고 시내에서 대기해.”
김혜림도 최진철의 이름을 들었기 에 다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현 을 보았다.
“갔다 오게요? 이젠……
강현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 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야. 정보가 필요하니까 다녀오는 거지.”
이제 와서 다시 복수심을 불사를 생각은 없었다.
복수에 연연할 단계는 지난 지 오 래다.
용병 시절과는 노는 물이 달라졌 다.
최진철이 적인 건 여전하지만 구태 여 그에게 목을 매일 정도는 아니었 다.
더 이상 약자를 쫓아다니는 건 시 간낭비에 불과했다.
굳이 복수를 한다면 이젠 최진철 쪽에서 해야 될 터다.
적으로서 덤비러 와 준다면 그때 가서 다시 베어도 될 일이다.
‘그것보다 이 빌어먹을 테라 시스 템의 정체가 더 신경 쓰인단 말이 지. 내가 무엇을 위해 소환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시스템에 의한 싸움을 해야 하는 건지 알아야겠어.’
이 모든 일의 발단은 테라 시스템 이었다.
테라 시스템의 근원에 다다르려면 웨이브의 진실에 대해 알아 둘 필요 가 있다.
지금 강현의 신경은 오로지 조직을 부수고 웨이브의 진실에 대해 알아내는 것에 쏠려 있었다.
김혜림은 강현이 예전만큼 복수심 에 잠겨 있진 않은 걸 보고 다행이 라 여겼다.
“필요에 의해서라. 강현 씨답네요. 다녀오세요.”
벤젠 기사단에 대기 명령을 내린 강현은 겔로그와 함께 드리안 공작 에게로 향했다.
*
빌링턴 외곽에 위치한 고급 주점.
시끌벅적하고 버터맥주와 기름진 감자튀김 냄새가 가득한 일반 주점 과 달리 정갈한 느낌이 돋보이는 주점이었다.
내부 인테리어는 룸이 나뉜 형태 로,개별실을 나누어 밀담이 오가기 에는 이만한 장소가 따로 없었다. 겔로그를 따라 개별실 중에서도 특 실로 들어가니 중년 사내 한 명과 주점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중년 사내 쪽이 드리안 공작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는 갈색 머 리,살집이 퉁퉁하게 오른 몸집과 사마귀가 붙어 있는 코,무거운 오 만함이 늘어진 입꼬리까지.
첫인상은 먹이를 잔뜩 삼켜 비대해 진 구렁이 같았다.
강현은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
했다.
그러자 드리안 공작이 다소 불쾌하 다는 듯 말했다.
“용병 출신이라 그런지 예법에 익 숙하지 않은 것 같군.”
강현은 여전히 문 너머에 선 채 보기 좋게 응수했다.
“드리안 공작가에선 초대 손님을 깔보는 게 관습인가 봅니다.”
불쑥 찾아와서 초대해 놓고 앉으라 는 말도 없이 비꼬는 말부터 하는 양을 두고 한 말이었다.
드리안 공작은 손을 들어 맞은편 자리에 앉으란 제스처를 취했다.
굳이 앉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에서 드리안 공작의 뒤틀린 심사가 엿보였다.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가기 전부터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강현이 맞은편에 앉자 드리안 공작 이 여인들에게 눈치를 주었다.
“술잔을 채우거라.”
“네,어르신.”
여인들이 술 주전자를 기울이려고 할 때.
강현이 손을 내밀어 거부했다.
“거래를 하러 왔지,술잔을 나누고 자 온 게 아닙니다.”
“나와 술잔을 나누기 위해 수백, 수천 골드를 바치는 자들이 있다는 건 아나?”
“어렵게 번 돈을 시궁창에 들이붓
는 자들이군요.”
드리안 공작이 대놓고 불쾌해했다.
“자네가 모시는 바르가스 공왕 전 하도 내겐 시궁창 쥐라고 하진 못한 다네.”
“그럼 오늘 그리 말할 수 있는 자 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군요. 첫 경험 축배는 혼자 드시지요.”
“듣던 것보다 훨씬 건방지군. 난 제국의 공작일세.”
“전 최강현입니다.”
드리안 공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 더니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곤 빈 술잔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 다.
과장창!
술잔이 부서지면서 그 파편이 상 위에 있는 값비싼 음식들에 알알이 뒤섞였다.
“말을 골라서 하는 게 좋을 걸세.”
드리안 공작의 분노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나,강현은 태연하게 검 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거래. 할 겁니까,말 겁니까?”
드리안 공작은 강현을 노려보았다. 보통 이쯤 화를 내면 상대는 크게 주눅 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이 눈앞의 새파 란 젊은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 다.
심지어 더 이상 본론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바로 일어날 낌새였다.
최진철에 대한 정보를 미끼로 삼으 면 저쪽에서 먼저 안절부절못할 줄 알았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드리안 공작은 불쾌함이 담긴 어투 로 주점 여자들을 물렸다.
“시중은 됐으니 물러들 가라.”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쩔 쩔매던 여자들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겔로그도 밖으로 물러나면서 방 안 에는 강현과 드리안 공작 둘만이 남 았다.
드리안 공작은 겨우 홍분을 가라앉 히고 본론을 꺼냈다.
“최진철은 살아 있네.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겠지?”
“살아 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그가 슈타인 백작가에서 도미닉이
란 이름을 사용했다지? 도미닉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와 마주쳤던 자 가 이쪽에 꽤 있다네. 한 달 전,나 의 기사들이 파견을 나갔다가 그를 목격했지. 포획엔 실패했지만 재미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네.”
“재미있는 사실?”
“그걸 알려 주면 거래하는 의미가 없지.”
“정보를 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할 생각이십니까?”
“공왕 전하와 접촉할 수 있게 다리 를 놓아 주게.”
드리안 공작이 서슴없이 말했다.
바르가스와 접촉하여 무언가 일을 꾸밀 생각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을 꾸밀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
역모.
아직 드리안 공작은 저 스스로 혁 명이란 이름을 붙인 헛짓거리를 포 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드리안 공작이 아직도 헛꿈을 꾸고 있는 건 상관없다만,한 가지 이해 가 안 가는 부분이 있었다.
“굳이 저를 통해 접촉해야 할 이유 라도 있으십니까?”
“공국의 지인들이 모두 얼마 전의 일 때문에 일선에서 물러났지. 자네 가 벌인 조피스 건 말일세.”
원래는 공국 왕궁의회를 통해 바르 가스와 접촉하려던 드리안 공작이었 다.
헌데 갑자기 조피스 사건이 터지면 서 의원 대다수가 물갈이되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로를 변경 해야 됐던 거다.
그리고 기왕 선로를 변경하는 바 에,최근에 가장 바르가스의 신임을 얻게 된 강현에게 접촉한 것이었다. 강현은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곤 협상 자세를 취했다.
“공작님은 제1황녀와 손을 잡은 걸 로 압니다만.”
“정확히는 약점을 잡힌 거지. 미쳤 다고 그 작자들을 아군으로 삼겠나.
그러니 자네는 최진철의 정보를,나 는 공왕 전하와의 접촉을 교환하자 는 거지. 충분히 등가교환이라 생각 하는데?”
“거래라 하셨으니 이쪽도 다른 재 료를 내놓도록 하지요.”
“다른 재료?”
강현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예전 몽발리에서 겔로그가 강현에 게 내밀었던 쪽지였다.
쪽지의 본문은 3년만 드리안 공작 밑에서 일하면 귀족 작위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와서 예전의 스카우트 제안이 적힌 쪽지를 꺼내 든 강현이었다.
강현은 부서진 술잔 파편 위로 쪽 지를 흔들며 말했다.
“이걸 기억하시는지요?”
“예전에 보냈던 섭외 제안 쪽지로 군. 그게 뭐가 어쨌단 건가?”
“공작님의 휘하에 있는 마나 마스 터들이 이 쪽지를 보면 어떨까요? 아마 상당히 불쾌해할 테지요. 다들 한 자존심 하는 자들일 텐데,일개 용병보다 못한 대우를 받을 뻔했단 걸 참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마나 마스터는 뼈를 깎고 피를 흘 린 자들 중에서도 선택 받은 자들만 오를 수 있는 경지다.
그만큼 자부심이 매우 높다. 지금이야 강현도 기사라지만 제안을 받을 적엔 용병이었다.
일개 용병에게 자신들보다 훨씬 좋
은 대우를 제안했었다는 게 밝혀진 다면 다들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 드리안 공작파에서 마 나 마스터들이 이탈하는 상황이 발 생할 수도 있었다.
드리안 공작은 강현이 협박을 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이를 갈았다.
“이놈…… 지금 내게 협박을 하는 것이냐?”
“거래입니다.”
“기어이 이 몸을 적으로 돌리려 드 는구나.”
“여태까지 아군이었던 것처럼 말씀
하시는군요.”
“크옥, 이래서 이세계인 놈들
“시간은 귀중한 겁니다. 빠른 결정 부탁드리지요.”
드리안 공작 입장에선 별것도 아닌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었 다.
섭외 제안이 비수가 되어 자신을 겨누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당시 건넨 쪽지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강현도 강현이다.
필시 언젠가는 효용성이 있으리라 여기고 보관한 게 분명하다.
강현은 드리안 공작의 분풀이를 마 냥 보고 있을 생각은 없기에 바로 일어나고자 했다.
드리안 공작은 당황하여 일단 그를 붙잡고 보았다.
“알겠네. 그걸로 거래하지. 그러니 일단 앉게.”
말하다 보니 강현에게 대해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자는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미친 자를 상대로 거래를 하려 들 었으니 일이 이리도 꼬일 수밖에. 드리안 공작은 곧 죽어도 자신의 수가 허술했다고는 인정하지 않고, 그저 강현이 미친놈이라고만 여겼 다.
“쪽지와 최진철의 정보를 교환하 지.”
“정보부터 말씀하시지요.”
“최진철은 엘프의 숲에서 발견되었 네. 엘프의 숲에 생겨난 S랭크 웨이 브에 들어간 것까진 확인되었는데, 그 후에 S랭크 웨이브가 공략되었다 더군. 지금은 엘프의 숲에서 제법 대우 받으며 지내고 있다네.”
드리안 공작이 수정구슬 하나를 꺼 내 보였다.
수정구슬은 기록 능력을 지닌 보구 인 둣,구슬 안에 엘프의 숲 상징인 라이프트리와 그 아래로 엘프들과 함께 서 있는 최진철이 비치고 있었 다.
강현은 머리를 차갑게 했다.
최진철이 웨이브를 공략했다니…….
이는 여태껏 조직이 해 온 일과는 정반대의 방향성이었다.
최진철이 어째서 웨이브를 공략했 을까?
예전에 말했던 '웨이브의 진실’과 관련이 있는 일일까.
그 부분은 조직 상층부를 잡아내면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굳이 이제 와서 최진철을 잡으러 제국을 벗어나 엘프의 숲까지 갈 생 각은 없었다.
‘정말 살아 있었군.’
막상 정보를 듣고 보니 바르가스와 이어 줄 만한 정보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토막만 한 목격만으로 강 현을 낚으려 했던 셈이었다.
강현은 빛바랜 쪽지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일어났다.
“별 볼 일 없는 정보였군요. 그래 도 약속대로 쪽지는 드리겠습니다. 누구랑 달리 속이 좁진 않으니 말입 니다.”
쪽지를 계속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오늘만큼 큰 효과를 보긴 힘들 거 다.
드리안 공작이 바보가 아닌 이상 마나 마스터들에게 손을 써 두면 그 만이니까.
쪽지는 조작된 거라는 둥,처음부 터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다는 둥 핑겟거리는 많다.
오늘처럼 기습적으로 쓸 때나 효과
가 있는 것이기에 더 이상은 쓸모가 없었다.
블필요한 종이쪼가리를 계속 지니 고 있을 바엔,드리안 공작의 속을 긁는 데나 쓰는 것이 훨씬 나았다. 강현의 의도대로 드리안 공작은 지 금까지 중에서 가장 볼만한 표정을 지었다.
앞니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것 이,마치 시궁창 쥐 한 마리가 앞에 있는 듯했다.
드리안 공작은 밖으로 나가는 강현 을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황궁에 가서도 그리 미친놈 처럼 굴었다간 금방 고꾸라질 걸 세.”
강현은 문지방을 넘으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드리안 공작의 속을 긁 었다.
“소원 기도라면 신전에서 하십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