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화
강현이 벤젠 기사단 단장이 된 지 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벤젠 기사단은 미공략 던전 을 돌면서 공략을 계속했다.
한 던전을 공략하고 테헤란에 돌아 와서 휴식,다시 공략 원정을 반복 하는 식으로 총 3개의 던전을 공략 했다.
그중 두 곳은 S랭크였고,한 곳은
SS 랭크였다.
세 차례의 원정 중에서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실력자들만 모아 놓은 기사 단이라 할지라도,SS랭크를 사망자 없이 클리어한다는 건 단언코 불가 능한 일이었다.
SS랭크 던전 공략을 마치고 데헤 란에 복귀한 기사들은 퇴근길에 올 탔다.
“으으? 고되구만. 이번 SS랭크 던 전은 특히나 힘들었어.”
“그래도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이 야. 공략법을 생각하면 절반 정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던전이었잖 아.”
“지하 2층에선 정말 위험했다고. 마나 없이 프로즌 리치를 잡으라는 게 말이나 되냐?”
“동감이야. 정말 꼼짝 없이 당하는 줄 알았지. 근데 거기서 프로즌 리치를 마나 금지 구역으로 끌어들인 단장님도 대단해. 그 상황에서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어?”
“그건 그렇고,던전 순회랑 조직 공략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벤젠 기사단원들 모두 실력은 여느 기사단에도 뒤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던전을 돌며 수련한다고 티가 나게 강해지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일단 단장 명령이니 따르고는 있는 데,던전 공략이 조직과 무슨 연관 성이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간의 경험으로 강현의 능 력에 매료된 단원들이었다.
때문에 강현이 다른 모종의 의도로
던전 순회를 하는 거라 짐작했다.
“따로 의도하는 바가 있겠지. 우린 주어진 명령이나 제대로 수행하자 고.”
“하긴 괜한 소리 꺼냈다가 도깨비 단장한테 머리 나쁘단 소리 들을 라.”
던전을 공략할 때 어설픈 의견을 내놓으면 강현에게서 가차 없이 머 리 나쁘단 말이 돌아왔다.
기가 막힌 것은,자신들의 의견이 부정당한 뒤에 강현이 내리는 명령 은 더 황당하다는 거다.
그런데도 그 황당한 의견이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내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퇴근길에 올라 왕궁을 벗어나던 기 사들에게 살가운 인사 소리가 들려 왔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내일은 비번 이니까 푹 쉬고 모레 봬요.”
벤젠 기사단의 홍일점이 된 김혜림 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와 활기찬 모습 에서 기사들은 활력을 얻었다.
“혜림 양은 볼수록 매력 있단 말이 지. 실력도 꽤 괜찮은 편이고.”
“성격도 엄청 좋더라고. 분명 원래 세계에서도 사회성 좋던 사람일걸?”
“그 무뚝뚝한 단장한텐 정말 아까 운 여자지. 단장은 참 재수도 좋아.”
“근데 사귀는 건 아니라던데?”
“정말이야? 으음,그거 고민되는 걸.”
기사 몇 명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양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 뒤편에서 무뚝뚝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모레 다시 보도록 하지.”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기사들 전원이 움찔했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 를까,바로 뒤에 강현이 서 있었다. 기사들은 놀란 나머지 얼어붙어 있 다가 뒤늦게 어정쩡하게 경례 자세 를 취했다.
“단장님,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들어가십셔.”
강현은 가벼운 손짓으로 경례를 받 아 주며 기사들을 지나쳤다.
바로 등 뒤에 있었기에 방금 한 말을 모두 들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기사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
한데 앞서 나가던 강현이 나지막이 말소리를 흘렸다.
“쓸데없는데 힘 빼지 말고 제대로 쉬어 두도록.”
단호하게 한 마디 날려 놓곤 김혜 림과 함께 퇴근하는 강현이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기 사들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강현이 남긴 말을 두고 전원이 똑같 은 생각을 했다.
“방금 철벽 친 거 아닌가?”
“아마도?”
“질투라니……. 단장도 일단은 감 정이 있긴 있구나.”
SS 랭크 던전에서 프로즌 리치를 사냥할 때도 리치보다 더 차가운 얼 굴을 띠고 있는 게 바로 강현이란 사람이다.
그런 강현이 철벽을 치다니.
강현이 단장이 된 지 한 달째 되 는 날.
처음으로 강현의 인간다운 모습을
보았다고 느끼는 기사들이었다.
*
빌로스 제국의 황궁 회의장에선 한 창 긴장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번 슈타인 백작가 사건을 두고 황실과 두 공작파가 근 두 달 가까 이 공방전을 벌였다.
이번 사건과 두 공작가의 관련성을 두고 각종 증거 조작과 은폐 공작이 난무했다.
에르델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두 공작파의 처벌을 주장했고,두 공작 파가 그에 맞서는 형태였다. 처음에는 에르델이 유리했다.
그녀가 내세운 증인과 증거들은 분 명하고,명확했다.
그러나 중간에 상황이 반전되었다.
별안간 제1황녀와 제2황자가 두 공작파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공작파를 상대하는 데만도 온 힘을 쏟아야 했던 에르델이 두 황족 까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결과, 황제와 황궁의회는 두 공 작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공판 결과,케이델 공작가와 드리 안 공작가는 슈타인 백작가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선언한다.”
황궁의회장 리바시치가 판결을 선 언함으로써,두 공작가의 무죄가 확 정되 었다.
회의장 한편에 서 있던 에르델은 허탈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 다.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증거를 긁어모았다.
한데 갑자기 두 공작과 황위계승권 자들이 담합하더니,승패가 뒤집어 져 버렸다.
증인과 용의자들은 꼬리 자르기로 그 효용성을 상실당했고,자신이 내 놓은 증거들은 진위여부도 불확실한 반박 증거품들로 무시당했다.
이에 더하여,판결을 내리는 황궁 의회의 절반 이상이 두 황족의 세력 이란 것도 이 부조리한 판결에 한몫 을 더했다.
에르델의 시선이 회의장 가장 안쪽 의 천막이 드리워진 곳으로 향했다. 천막 너머에는 황제의 실루엣이 아 른거리고 있었다.
에르델은 천막 너머의 황제를 향해 외쳤다.
“아바마마! 이건 말도 안 돼요! 두 공작이 꾸민 일들을 생각해 보세 요!”
에르델이 애타게 외쳤지만,천막 너머의 실루엣은 조용히 회의장 뒷 문을 통해 빠져나가 버렸다.
황제는 항상 그랬다.
있는 듯 없는 듯 자식에게조차 얼 굴을 내비치지 않았으며, 어지간한 대소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과 같이 두 공작이 반역 을 꾀한 게 빤한 일에도 말이다. 에르델은 분함에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과악 움켜쥐었다.
각종 자료가 빽빽하게 기록된 서류 가 손 안에서 꾸깃꾸깃 구겨졌다.
불난 곳에 기름을 붇듯 두 공작이 곁을 지나치며 비웃음을 홀렸다.
“괜한 일로 나랏일에 누를 끼치는 군요. 앞으로 불필요한 착각은 삼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황녀님.”
“성혼할 시기도 되셨으니 듬직한 부군을 찾는데 힘쓰시는 게 어떠신 지요? 이왕 찾으시는 김에 조금이라 도 국익에 도움이 될 자를 찾길 바 타겠습니다.”
조롱하는 소리가 귓속을 후벼 팠 다.
에르델은 분함이 넘쳐흐르려는 걸 가까스로 참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 다.
사건의 규모가 큰 만큼 패배한 쪽 엔 그만한 페널티가 따르기 마련이 다.
이번 한 번의 패배로 현안의 공주 란 별칭은 하루아침에 나락공주로 변했다.
패배의 영향은 다음날 국정회의 에 서 바로 나타났다.
본디 빌로스 제국의 황족은 직책과 상관없이 국정회의에 참가할 수 있 었다.
한데 에르델이 국정회의에 나타나자 곳곳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황궁의원 들이며 대신들의 표정에는 조롱하는 기색이 또렷했다.
‘어제 그 망신을 당해 놓고 무슨 낯짝으로 나타난 거지? 낯짝 한번 두껍군.’
‘나라꼴을 어지럽혔으면 죄책감이 라도 느껴야지,눈치 없이 나대는 꼬락서니 하고는.’
'결국 현안의 공주니 뭐니 해도 왕 위계승권을 물고 늘어지고 싶던 거 겠지.’
빌로스 제국의 황궁에서의 평가는 오로지 성과주의였다.
승자가 정의이며,패자는 철저하게 물어 뜯겼다.
상대적으로 제1황녀나 제2황자보 다 세력이 약한 에르델에겐 이번 사 건이 판세를 뒤집을 유일한 기회였 다.
그러나 참패를 당했으니 그 누구도 에르델의 능력을 믿지 않을 것이며, 이번 패배가 앞으로도 발목을 잡을 것이었다.
에르델은 황족을 위한 상석에 앉으 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국정회의가 시작되었 다.
여전히 에르델이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맞은편에서 제2황자 드래코프가 건의사항을 제시했다.
“리바시치 의회장,본래 예정된 안 건을 논하기 전에 한 가지 제안해도 되겠나?”
“허가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최근 두 달간 웨이브의 던전화 비율이 높아지고 있네. 누구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아 도 알겠지.”
누구라고 지목은 하지 않았지만 드 래코프의 시선은 에르델에게 꽂혀 있었다.
두 공작이 황궁에 묶여 있음으로 서,두 공작파에 줄을 댄 수많은 귀 족들이 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웨이브가 나타나도 제때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 했다.
두 공작과의 법정 싸움에서 패한 것도 모자라,최근 웨이브 공략 실 패의 폐해를 에르델에게 덮어씌우는 것이었다.
에르델은 따가운 시선 때문에 자신 이 회의장에 있는지 불구덩이 속에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드래코프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 다.
형제이기 전에 왕위 계승을 두고 다투는 적이다.
위로는커녕 누구보다 앞장서서 에 르델을 짓밟고 있었다.
드래코프는 에르델에게 한껏 망신 을 주고는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국의 마나마스터들을 한데 모아 웨이브 공략을 우선시하는 연합기사 단을 만드는 게 어떻겠나? 당장 피 폐해져 있는 지방귀족들과 백성들은 희망을 얻을 것이고,지친 기사들에 겐 유래 없는 본보기가 될 걸세.”
웨이브 공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 고 하지만 그 이면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유명한 기사들을 모아 화젯거 리로 삼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국 10인의 마나마스터들 이 과연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실력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그들이 연합기사단이란 이름의 광대짓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패배의 쓴맛은 쓴맛이고,일은 일 이다.
에르델은 좌불안석임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했다.
“취지는 좋지만 마나마스터들이 받 아들일까요?”
역시나 에르델이 말을 꺼내자마자 사방에서 못마땅해했다.
드래코프는 예상한 질문이라는 듯 바로 답을 내었다.
“이미 10인의 마나마스터 중 두 명의 참가 의사를 얻어 냈지. 악마 사냥꾼 오브렌 경과 인간포대 하워 드 경이 연합기사단에 합류하겠다고 약조했지.”
둘 다 제1황녀와 제2황자의 측근 이었다.
에르델은 두 황족이 연합기사단을 창설하려는데 무언가 노림수가 있음 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속을 떠보고자 질문 공세를 계속했다.
“황실 소속의 마나마스터 두 명이 나선다고 연합기사단이라 이름 붙이 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 한 명은 더 모았으면 하는데 나머지는 전부 거절하더군. 그래서 말인데,브리니아 공국에 벤 젠 기사단이 새로 생겼다지? 최근 활동을 보니 던전 공략이 주된 활동인 것 같은데 그들에게 연합을 요구 하는 게 어떻겠나?”
벤젠 기사단이라면 에르델도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찌 모를 수 있으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현이 단장으 로 부임된 기사단인데.
항상 강현의 행방을 주의 깊게 지 켜보던 에르델로선 모를 수가 없었 다.
에르델은 드래코프의 제안이 처음 부터 벤젠 기사단을 끌어들이기 위 한 속셈임을 알아차렸다.
'오라버니는 강현 씨를 제국으로 불러들이려는 속셈이야. 대체 무슨 꿍꿍이지?’
황궁의회에서는 강현이 제의를 수 락하면,즉 마나마스터가 3명 이상 모이면 연합기사단을 만들어도 좋다 고 결론을 내렸다.
에르델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으리 라 여기곤 황궁의 사절단이 출발하 기 전에 자신이 먼저 강현에게 서신 을 보냈다.
*
[분명 강현 씨에게 어떤 위해를 가 하려고 불러들이는 걸 거예요. 적당 한 핑계를 대서 거절하도록 하세 요.]
에르델에게서 온 편지의 마지막 문 구였다.
앞선 내용으로는 에르델의 근황과 연합기사단 발족 계기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었다.
에르델의 편지를 읽은 강현은 벽난 로 안에 편지를 던졌다.
불붙은 편지가 순식간에 타오르며 잿더미로 가라앉았다.
에르델은 거절하라고 했지만 거절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이런 반응을 끌어오기 위해 그간 던전을 돈 것이었다.
일부러 한 달이란 시간을 소비해 가며 미끼를 던졌고, 이제야 미끼를 물었는데 가만있을 수야 있겠는가.
강현은 지난 한 달 동안 던전 공 락을 하면서 얻은 스킬북을 꺼내 들 었다.
스킬북 표지에는 이리 적혀 있었 다.
[군단의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