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화
조피스 사건이 발생한 후,일주일 이 지났다.
그사이 왕궁 내에선 생포한 조피스 를 심문하여 정보를 토해 내게 했 다.
허나 생각보다 조피스에게서 얻어 낸 정보 중 쓸 만한 것은 거의 없 었다. 기껏해야 공국 내의 지부장 몇 명을 잡아낸 정도에 불과했다.
그 외의 성과라면 왕궁의회에서 부 정부패를 일삼던 왕궁의원들을 속아 냈다는 점이었다.
의회의원들의 자격박탈 및 대체자 선임으로 왕궁 안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불어 강현도 벤젠 기사단 단장이 되면서 테헤란에 자리를 잡았다.
*
위치는 공국 왕궁에서 10분 거리, 방은 3개에 마당과 우물이 있는 집. 벤젠 기사단 단장이 된 강현을 위 해 왕궁에서 마련해 준 거처였다. 강현은 거실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동향이라 아침에는 약간 덥겠군.”
자취생 기분을 내며 주거지 환경을 평가하고 있는데 주방 쪽에서 김혜 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 씨! 식기 배치 좀 도와주세 요! 수납장이 높아서 발이 안 닿아 요.”
강현은 주방으로 가 보았다.
주방에선 김혜림이 식기나 조리도 구,식재료 등을 잔뜩 사 와선 하나 하나 정리하기 바빴다.
반죽용 보울을 수납장 맨 위에 넣 으려고 까치발까지 들었건만 키가 닿지 않아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강현은 보울을 잡아 수납장 맨 위 에 놓아 주었다.
그러자 김혜림이 자신의 팔뚝을 주 무르며 투덜거렸다.
“여기 주방은 다 좋은데 수납장이 너무 높아요. 발판이라도 가져다 놓든지 해야지 원.”
이제는 조리도구를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던 김혜림이 문득 고개를 들 었다.
그러다가 강현이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단 걸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천진난만하게 서 있는 김혜림을 두 고 강현이 입을 열었다.
“내 집에서 살 생각이냐?”
“그럼 어디서 살아요?”
“네 집을 구해야지.”
“에이,뭐 하러 그런 돈 낭비를 해 요. 여긴 집세도 공짜겠다 같이 살 면 저축도 되고 좋잖아요.”
강현이 벤젠 기사단의 단장이 되면 서 김혜림도 벤젠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지금도 셋방을 구할 자금 정도는 가지고 있었고,월급도 기본급이 30 골드나 되기에 방을 잡을 여유는 충 분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같이 살겠 다니.
뭐,아무래도 별 상관이야 없다.
따지고 보면 혼자 지내기엔 집이 지나치게 크기도 하고,그런 만큼 집안일을 돌볼 가사 도우미 정도는 필요했다.
“남은 방을 놀리기도 뭐하니 받아 주지.”
“네네,어련하시겠어요. 식사는 어 떻게 할까요? 새 살림도 차렸겠다 거하게 차려 볼까요?”
“레시피는 양배추 찌개 하나만 아 는 게 아니었나?”
“강현 씨가 좋아하니까 주구장창 그거만 한 거지,할 줄 아는 건 많 아요. 뭐 따로 좋아하는 거라도 있 어요?”
“맛만 있으면 아무 거나 상관없 어.”
“주는 대로 먹겠다는 거네요.”
“맛만 있으면.”
“그 말이 그 말이죠. 시간 좀 걸리 니까 뭐라도 하고 있어요. 괜히 방 해하지 말고.”
김혜림이 유일하게 강현에게 큰소 리 칠 수 있는 게 바로 요리였다. 적신 도마에 야채를 을려 썰기 시 작하는데 주방 칼 다루는 손길이나, 주방 도구를 다루는 몸짓 등이 주부 뺨치는 수준이었다.
항상 먹던 찌개는 재료를 살 때 상인들에게 썰어 달라고 해서 김혜 림이 직접 써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주방에 서서 칼질하는 솜씨를 보니 소싯적에 식칼 좀 쥐어 본 듯했다.
김혜림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강현은 대걸레를 쥐고 새 집 청소에 나섰다.
공국과 제국을 한바탕 뒤엎은 마나
마스터가 대걸레를 쥐다니…….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청소를 마치고 한숨 돌리려고 할 때,문 밖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딸랑딸랑!
사람이 찾아온 것이었다.
대문 앞에 달린 작은 겹문을 열어 보니 네베르가 보였다.
프라넬라 공주 호위를 마치고 막 테헤란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강현이 물었다.
“용무는?”
“집들이일세. 기사단 단장까지 됐는 데 이제 와서 경계할 필요가 있나?”
“뭐든 주의해서 나쁠 건 없지.”
“마치 길고양이 같군. 주변 사람을 집사 취급하는 거나,발톱 세우는 것까지 닮았군 닮았어.”
“글쎄……. 공감은 안 되는군.”
강현이 문을 열어 주자 네베르가 들어오며 팔뚝만 한 상자를 내밀었 다.
“집들이 선물이네. 칸베이나산 비 누일세.”
“집들이 선물은 항상 가정용품이라 더니.”
“마음에 안 드나?”
“이왕 받은 거니 쓰도록 하지.”
강현과 네베르 사이에 딱딱한 대화 가 오가는데 마당 안쪽의 문이 열렸 다.
그곳에서 김혜림이 나오며 강현을 불렀다.
“강현 씨,누가 찾아왔어요? 아, 네베르 경…… 아니,이제 네베르 백작님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
“아직 정식으로 작위 계승은 하지 않았으니 그냥 이름으로 부르게. 나 이 차이도 그리 많이 나지 않으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연세라니…… 올해 스물일곱이니 까 아직 오빠 소리 들을 나이일세.”
“엥? 강현 씨랑 동갑이라고요?”
“내가 그리 늙어 보이나?”
“머리 스타일이랑 말투 때문에 적 어도 서른은 넘은 줄 알았어요. 뭐, 백작 작위 받으실 때까진 네베르 씨라 부를게요. 일단 들어오세요. 마침 식사 준비 중이었거든요.”
김혜림은 강현이 들고 있는 비누 세트를 대신 들어 주며 안으로 들어 갔다.
앞치마 차림으로 활기차게 움직이 는 김혜림을 보고 네베르가 속삭이 듯 말했다.
“자네 안사람 성격한번 쾌활하 군.”
“결혼한 걸로 보이나?”
“아니란 말인가? 내 여태껏 보기에
“동료 관계일 뿐이야.”
강현은 김혜림과의 관계에 대해 일 축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네베르가 강현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서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동료 사이에 같이 살면서 내 조까지 해 주던가?
하지만 괜한 말을 했다간 강현의 기분만 거스를까 싶어 속으로만 생 각하는 네베르였다.
12첩 반찬과 고기 요리가 차려진 밥상을 사이에 두고 강현과 김혜림, 네베르가 둘러앉았다.
네베르는 프라넬라 공주를 호위하 던 동안의 일을 말해 주었다.
“공주님을 노린 습격은 한 번이 끝 이었네. 그 외에는 꽤 순탄한 여정 이었지.”
“프라넬라 공주님이 화내시진 않았
나?”
“그런 일은 없었네. 하지만 충격이 적지 않으시니 당분간 요양지에서 심신을 추스를 모양이야. 안전 문제 도 있고 하니 내가 고향으로 갈 때 함께할 예정이라네.”
본디 네베르의 고향인 델라프 백작 령은 휴양지로 유명했다.
지금은 비록 조직의 공작으로 웨이 브 공략을 실패하여 영주성과 그 주 변 도심지가 던전화되는 등 쑥대밭 이 되었다지만,백작령 전체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네베르는 백작 작위를 계승한 후 영지를 복구하고 군사 양성에 힘 쓸 생각이었다.
웨이브 공략 실패로 던전화된 영지 라지만,마냥 방치할 수만도 없었다.
“조직 상층부에 대한 정보는 공왕 전하께 전해 들었네. 제국의 제1황 녀와 제2황자 모두가 조직과 손을 잡은 상태라지?”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제국 자체를 상대한다고 생각해야겠지.”
“홈,일이 상당히 복잡해지겠군. 우 리 브리니아 공국은 제국의 제후국 이지 않나. 조직이 제국 황족과 손 을 잡고 있다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네. 나야 만약을 대비해 군사 양 성에 힘쓸 것이네만 자네는 어떻게 움직일 건가?”
상대는 무려 제국 황족들과 손을 잡았다.
강현이 일개 용병에서 기사로 승격
(?)했다고는 하나,공국의 기사라는 신분으로 어찌하기에는 그 격차가 아득했다.
물론 강현에게도 에르델 황녀라는 연줄이 있긴 하다.
그러나 가장 세력이 약한 황녀라는 배경을 감안하면 기댈 구석이 없다 해도 무방했다.
그런고로 공국 기사의 위치에서 조 직 상층부를 어찌 공략할지 생각해 둬야 했다.
강현은 단장직을 맡기 전부터 생각 해 둔 게 있는 듯 느긋하게 젓가락으로 생선구이를 눌렀다.
“의심 많은 물고기를 낚으려면 시 간이 필요하지.”
“시간 말고도 미끼가 필요할 텐 데?”
“나라는 미끼가 있는데 미끼 걱정 이 필요할까?”
현재 조직 입장에선 강현이 가장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기회만 닿는다면 제거 대상 1순위 일 터.
자신이라는 탐스러운 미끼가 있으 니 미끼를 물게 할 만한 이유만 만 들어 주면 된다.
강현은 발라낸 생선 살점을 입에 넣으며 잘근잘근 씹었다.
*
의회의원 부정부패 조사 때문에 한 창 바빴던 벤젠 기사단은 하루 휴식 이후 통상 업무로 돌아갔다.
벤젠 기사단의 통상 업무라 함은 당연 조직 말살을 위한 활동이었다. 벤젠 기사단 기사들은 왕궁으로 출 근하며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했다.
“결국 최강현 단장님이 계속 단장 직을 유지하기로 했다지? 앞으로 어 떻게 움직이게 되려나.”
“조직 상층부에 대한 정보를 입수 했잖아. 바로 제국으로 넘어가지 않 을까?”
“워낙에 노림수가 좋으신 분이니까 기발한 작전을 준비해 두셨을지도 모르지.”
조피스를 발각하고 포획하는데 과 정에서 강현의 능력은 여실히 입증 되었다.
그 뛰어난 실력과 지략을 두 눈으 로 직접 보았기에 다들 기대가 컸 다.
조직의 상층부가 제국 황족과 손을 잡고 있다지만 어떤 기발한 작전으 로 그들을 공략할지 궁금했다. 이윽고 벤젠 기사단 본부에 기사들 이 모두 모였다.
기사들이 아침 브리핑을 위해 본부 앞에 오와 열을 맞추어 섰다.
때를 맞추어 강현과 김혜림도 나타 났다.
업무 중에는 강현의 부하인 김혜림 인지라 장난기가 쏙 빠진 모습으로 기사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강현은 기사들 맞은편에 서서 첫 브리핑을 시작했다.
“지금 막 기사 서약을 마치고 오는 길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정식 단 장이 된 셈이지.”
“저희는 이미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 주십시오.”
“네베르에게 인계 받은 기사단 보 고서를 봤는데 이세계인 4명,현지 인 3명,7명의 기사로 구성되어 있 더군. 이번에 충원된 김혜림,그리고 나까지 포함하면 총 9명이로군.”
“원래는 더 많았지만 칼덴 협곡에 서의 전투 당시 다수가 사망했습니 다. 보충 인원 후보들은 따로 스카 우트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리겠습니 다.”
“아니,인원은 이만하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장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이어서 강현이 당장 해야 할 임무 를 옮었다.
대단한 작전을 기대하던 기사들은 곧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뜻밖에도 강현이 내놓은 첫 임무라 는 것은 무척이나 주업무와 동떨어 진 것이었다.
“당분간 던전 순회나 하도록 하 지.”
*
빌로스 제국 황궁.
4개로 나뉜 가지각색의 정원 중 한 곳에 한 사내가 거닐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이 돋보이는 사내는 한 창 만개한 봄꽃 사이를 거닐다가 문 득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아무도 없는 뒤편을 향해 한 마디 날렸다.
“보고해라,쉐인.”
사내의 말소리가 흩어진 직후,그 늘진 나무 아래에서 그림자가 솟아 나더니 쉐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쓴 음 침한 모습이었다.
조직 상층부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간 이후,쉐인은 강현의 움직임을 염탐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 그가 돌아왔다는 건 강현의 움직임을 보고하기 위함이리라.
쉐인은 붉은 머리 사내의 명령에 따라 보고를 올렸다.
“결국 최강현은 벤젠 기사단 단장 이 되었습니다.”
“공국인가……. 안타깝군. 제국 내 의 기사가 되었으면 단숨에 뭉개 줬 을 텐데 말이지.”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놈이 최적의 판
단을 한 셈이지.”
조직의 상층부에 대한 정보가 홀러 나갔음에도 붉은 머리 사내에게선 한 점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정도 문제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붉은 머리 사내는 강현에게 흥미를 내비치며 그의 근황을 물었다.
“그래서…… 녀석은 요즘 뭘 하고 있지?”
“단장이 된 이후로 계속 던전 공략 만 하고 있습니다. 레벨업과 보구수집을 위한 일환으로 추정됩니다.”
쉐인은 나름대로 해석을 가미하여 보고를 올렸다.
붉은 머리 사내는 보고를 듣곤 잠
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얼 마 지나지 않아 입꼬리를 말아 올리 며 중얼거렸다.
“그리 나왔나. 저쪽이 미끼를 흔든 다면 물어 주는 게 예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