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화
공국에 잠입한 간부의 이름을 확인 한 강현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설마 공왕의 사위될 사람이 조직의 간부였을 줄이야.
그렇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지금까지 본 네베르의 성격상 공왕 의 사위라 할지라도 상관치 않을 거 다.
상대가 공왕의 사위라면 힘보다는 머리를 써서 제압해야만 했다.
‘공왕은 공명정대한 성격이라 했으 니 문제될 건 없어. 하지만 왕궁 안 에 있는 자를 잡으려면 합당한 절차 를 밟아야 해.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순순히 절차를 밟게 놔두진 않 을 터.’
왕궁 안에서 누군가를 체포하기 위 해선 공왕과 왕궁의회의 허가가 필 요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만큼 조피스를 잡 으려면 좀 더 지능적으로 움직여야 할 거다.
슬슬 네베르와 접촉해야 할 것 같 다.
“서신을 가로채는 건 중단하지. 네 베르가 조피스에게 가기 전에 그와 접촉해야겠어.”
“조피스가 누군데요?”
“공왕의 사위.”
“잠시만요. 얼마 전에 비슷한 이름
을 들은 것 같은데…… 아,맞다. 이제 기억났네. 공주랑 약혼한 사람 맞죠?”
대화를 나누던 중 문 쪽에서 문고 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이내 곧 문이 열리면서 병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대걸레를 든 채로 방에 들 어와선 바닥의 핏자국을 닦기 시작 했다.
꼬질꼬질한 걸레가 코바와 칼리고 의 마지막 흔적을 차츰차츰 지워 나 갔다.
병사들은 아직도 자기 부대에 닥친 일이 실감되지 않는지 탄식 섞인 대화를 나누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구 만. 코바 경이 반역죄에 연루되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네베르 경이 기사단을 만들어서 뭔가 한다더니 반역자 무리들을 소 탕하고 있던 거군. 그나저나 코바 경 한 명만 역모를 꾸민 건 아닐 텐데.”
“우린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상책이 야. 위에서 무슨 짓을 하든 어차피 명령대로 해야 되는 팔자잖아.”
대걸레로 바닥을 벅벅 문지르는 병 사들 뒤로는 강현과 김혜림이 있었 다.
그들이 들어오기 직전,김혜림이
재빠르게 카모플라쥬를 쓰면서 아슬 아슬하게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김혜림이 손가락으로 문 쪽을 콕콕 가리키며 강현에게 따라오라고 손짓 했다.
‘여기서 들키면 큰일 나니까 최대 한 조심해서 가죠. 제가 앞장설 게 요.’
손짓발짓으로 메시지를 전한 김혜 림은 살금살금 발을 옮겼다. 고양이마냥 뒤꿈치를 든 채로 발걸 음을 옮기는데 조심스럽기가 흡사 첩보물을 보는 듯했다.
혹여나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지는 않을지,숨소리 때문에 들키지 않을 지.
온갖 주의를 기울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진땀 빼며 움직이는 김혜림이 었다.
그런데 강현은 가만히 서 있다가 빙백검을 검집째로 손에 쥐고는 두 병사를 향해 내리쳤다.
빡! 빠각!
무방비 상태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두 병사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강현은 기절한 두 병사를 지나치며 창문을 열었다. 그러곤 아무 일 없 었다는 양 말했다.
“네베르와 거리가 벌어졌겠군. 얼 른 따라가도록 하지.”
창문 바깥으로 나간 후 뒤를 보았 는데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김혜림이 보였다.
강현의 행동에 심통이 났는지 팔짱 을 단단히 끼곤 볼을 부풀리고 있었 다.
김혜림은 한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 린 상태로 눈을 홀겼다.
“꼭 그렇게 사람 바보 만들어야겠 어요?”
“이쪽이 더 빠르지 않나?”
“할 거면 더 빨리하면 좋았잖아요. 괜히 바보같이 진땀 뻤네.”
“빨리 오기나 해.”
“에휴,가끔씩 보면 일부러 저러는 것 같다니깐.”
워낙에 표정 변화가 없으니 일부러 놀리는 건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김혜림의 뿔난 반응을 두고 강현은 그저 어깨를 으쏙일 뿐이었다. 김혜림은 투덜거리면서도 강현을 따라 쫄래졸래 창문 바깥으로 나갔 다.
*
두 사람은 서둘러 벤젠 기사단을 추적했다.
상황이 바뀌었기에 미행을 중단하 고 바로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근처 마을에서 벤젠 기사단 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데 변 수가 하나 생겼다.
벤젠 기사단이 마을에서 말을 빌려 출발해 버린 것이다.
사람 발걸음으로 말의 띔박질을 따 라잡을 순 없었다.
때문에 강현과 김혜림도 익숙지 않 은 말을 빌려야 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말이 달리다 멈추다를 반복했지만 강현이 겨우 요령을 터득하면서 달리는 구색 정 도는 금방 갖추었다.
허나 기마술 숙련도가 다르다 보니 벤젠 기사단과의 거리가 점점 벌어 졌다.
다그닥! 다그닥!
김혜림은 강현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강현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말이 지칠까 봐 배려하고 있 는 거 맞죠?”
“천하의 강현 씨도 못 하는 게 있 네요.”
“목적지는 알고 있으니 상관없어.”
“그래도 저쪽이 먼저 도착하면 의 미 없잖아요.”
안절부절못한다고 말의 속도가 빨 라지는 건 아니다.
무리하게 말을 몰다가 낙마라도 하 면 그게 더 문제였다.
그렇다곤 해도 마냥 네베르가 먼저 가게 놔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선가 거리를 좁혀야만 한다.
강현은 말을 몰다가 문득 강을 보 았다.
강현은 물론이고 벤젠 기사단도 깊 은 강물 때문에 곧장 수도로 향하지 못하고 빙 둘러가는 중이었다.
강을 바로 건널 수 있으면 벤젠 기사단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힐 수 있을 터.
시도해서 나쁠 건 없었다.
“강으로 건너 볼까.”
강현의 중얼거림을 들은 김혜림이 강을 보고 대차게 고개를 저었다.
“딱 봐도 무리잖아요.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구만.”
말로 지나갈 수 있는 깊이였으면 네베르의 기사들도 진작에 넘어갔을 거다.
깊이도 깊이거니와 너비도 상당하 여 말을 타고 지날 수준이 아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물가로 몰았다.
“대체 어쩌게요?”
김혜림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 강현이 빙백검을 뽑아 들고 강에 담 갔다. 그러곤 한껏 마나를 불어넣 자,??????.
쩌저적!
빙백검의 주변으로부터 강이 얼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러시아에 세계의 한극(寒極)이라
불리는 오미야콘의 호수마냥 수면이 꽁꽁 얼어붙었다.
강현은 빙백검을 물에 담근 채로 자신이 만들어 낸 빙판 위를 걸어갔 다.
강현이 나아가는 코스를 따라 강물 이 얼어붙으며 빙판길이 생겨났다. 강현이 얼음 다리 위에서 김혜림을 돌아보며 말했다.
“딱 보기에도 건널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나?”
김혜림은 이번에는 놀리는 게 맞다 고 확신하곤 얼음 위에서 발을 강하 게 굴렀다.
“우씨,깨지기라도 해 봐라. 백 배 로 돌려줄 테다.”
그러나 어찌나 단단하게 얼었는지 금이 가기는커녕 되려 김혜림만 빙 판 위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 었다.
*
네베르를 비롯한 벤젠 기사단은 어 느덧 공국의 수도 테헤란에 다다랐 다.
테헤란으로 들어서면서 재차 오버 로드의 수정으로 서신의 위치를 확 인했다.
그 결과,네베르는 서신이 최종적 으로 왕궁 안에 도달했음을 알게 되 었다.
설마 다른 곳도 아니고 왕궁에 조 직의 간부가 있을 줄이야.
등잔 밑이 어둡다고 왕궁 안에 적 을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셈이었 다.
네베르는 신성한 왕궁 안에 조직의 간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분노가 끓어올랐다.
“감히 조직원 따위가 왕궁을 드나 들고 있었단 말인가. 감히 조직원 따위가……
존경하는 공왕 전하의 곁에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차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일어났다.
네베르가 왕궁으로 향하기 앞서 빅 터가 걱정스레 말을 꺼냈다.
“단장님,조직 간부가 왕궁 안에 있다면 일이 복잡해집니다.”
“무슨 말이더냐?”
“만약 저희가 손대기 어려운 고위 직 신분으로 위장한 거라면 일이 커 지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그만한 자리에 앉은 자가 충성은 못 할망정 조직 따위에 가담하는 게 말 이나 되느냐. 범인을 찾는다면 내 망설이지 않고 목을 칠 것이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네베르는 상 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원래 신분은 귀족이기 때문에 더더 욱 의무감에 민감했다.
왕궁의 고위직들은 모두 나라의 평 안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 발탁된 자 들이 다.
반면 조직은 어떤가.
나라의 평안과 왕실의 안녕을 무너 뜨리려는 자들이지 않은가.
결코 가만히 좌시할 수 없었다.
네베르는 망설일 것 없이 왕궁으로 향했다.
한데 그 때였다.
한 필의 말이 나타나 벤젠 기사단 의 앞을 가로막았다.
말 등에는 두 남녀가 타고 있었는 데 그중 남자의 차림새가 눈에 익었 다.
네베르는 금방 칼덴 협곡에서 부딪
쳤던 마나 마스터임을 떠올리곤 송 곳니를 드러냈다.
“그래,서신은 네놈이 가지고 있었 지. 왕궁의 반역자에게 서신을 전달 하고 돌아오던 참이더냐.”
네베르가 마침 잘 걸렸다는 양 검 에 손을 올렸다.
강현은 그에 맞서 빙백검을 쥐는 대신 에메랄드 산맥의 금고에서 챙 긴 코바의 편지를 내밀었다.
“일단 오해부터 풀었으면 하군.”
“조직원의 말 따윈 들을 가치도 없 다.”
“싸우는 건 이걸 보고 난 후에 해 도 늦지 않지.”
강현이 네베르를 향해 편지를 던졌
다.
네베르는 편지를 낚아채며 강현의 모습을 살폈다.
우연히 마주쳤다기엔 강현의 태도 가 너무나도 태연했다.
일부러 자신을 만나기 위해 대기하 고 있던 듯했다.
네베르는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내 강현의 포위를 지시하곤 편지를 펼 쳤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네베르 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거기 남자. 이 편지는 어디서 얻 었지?”
“너희가 코바를 처형한 이후에 그 의 집무실에서 찾아낸 물건이다.”
“우리 뒤를 쫓고 있었나? 도통 이 해할 수 없군. 분명 네놈은 서신을 가지고 먼저 떠나지 않았었나?”
네베르는 드러난 전개가 복잡하여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서신을 가지고 있던 자가 왜 자신 을 미행했으며,무엇을 노리고 이제 와서 코바의 편지를 밝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시시비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선 자 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강현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이 분명 하기에 자리를 옮기고자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지.”
길 위에서 말을 탄 채로 이야기를
나누기엔 할 말이 너무 많고 복잡했 다.
네베르는 귀신에게라도 홀린 기분 으로 강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근처 여관 별채를 잡아 자리를 옮 긴 후,강현은 네베르에게 여태껏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라르손에게 의뢰를 받은 것부터, 벤젠 기사단과 조직을 착각했으며, 후에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일부러 서신을 조직원에게 넘긴 것까지. 여태까지 강현에게 놀아났다는 걸 깨달은 네베르는 손가락으로 관자놀 이를 꾸욱 눌렀다.
“그러니까 조직이 아무것도 모르고
서신을 전달하고 있는 건 전부 자네 의 계략이었다는 건가?”
“제대로 이해했군.”
“흠,머리가 아프군. 나와 조직 모 두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니……
“오해는 풀렸나?”
“정리하자면 나나 그쪽에게 있어 조직은 공공의 적이라는 거군.”
“그런 셈이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네베르의 표정 이 안 좋았다.
아무래도 강현의 손바닥 위에서 놀 아난 게 영 불쾌한 모양이었다.
네베르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 며 핏발 선 눈빛으로 강현을 보았다.
“덕분에 조피스에게까지 도달했으 니 날 이용한 건 퉁쳐 주지. 보상으 론 조직 상층부 정보를 공유하는 걸 로 하고. 그걸로 됐나?”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쪽이 막무 가내로 조피스를 치려 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되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려는 건가? 공주님은 진심으로 조피스를 사랑하 고 계시네. 그래서 전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혼을 이뤄 냈지. 그런데 실제로는 부마 자리를 얻기 위해 거 짓으로 사랑했단 것 아닌가. 그런 천하의 몹쓸 놈을 가만히 놔두라 고?”
네베르가 쥐고 있던 유리잔의 손잡 이가 쩌저적 갈라졌다.
거칠어진 마나가 몸 곳곳에서 흘러 넘치며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나 강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저 냉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네베르의 기세를 흘려 넘길 뿐이었 다.
“그쪽이 찾아가면 조피스가 잘도 백기를 들겠군.”
“네가 가져온 코바의 편지를 공왕 전하께 전해 드리면 될 일이다. 이 쪽은 이쪽대로 절차를 밟을 터이니 어쯤잖은 훈수는 집어치워라.”
“과연 그걸로 충분할까? 내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러나 네베르는 불쾌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군. 서신 과 코바의 편지. 이 두 개로도 충분 한 증거가 되거늘 자꾸 되도 않은 참견을 하려 드는구나. 내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잠자코 여기서 대기 하도록. 알겠나?”
강현에겐 원만하게 조피스를 잡을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네베르는 들을 생각조차 없 는지 자리를 박차며 별채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강현이 일어서려 하자 벤젠 기사단 기사들의 뽑아 들며 앞을 가로막았 다.
“단장님의 말씀 들있겠지? 일이 끝 날 때까지 얌전히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