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화
브리니아 공국과 하니온 왕국 사이 에 위치한 에메랄드 산맥.
산맥 곳곳에는 불법 밀입국을 감시 하기 위한 공국군의 막사가 설치되 어 있었다.
그 수많은 막사 중 한 곳.
소규모 부대가 주둔한 막사 안에서 코바가 웃음을 홀렸다.
“훗,살다 보니 로스탱 따위가 도 움이 될 때도 있군.”
방금 막 연락책으로부터 서신을 전 해 받았다.
서신의 내용은 볼 수 없었지만 어 떤 서신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현재 조직 내에서 가장 큰 이슈인, 일명 ‘조직 상층부 서신’이었다.
이 서신을 상층부에 전달하면 막대 한 포상금은 물론이고,조직 내의 입지 또한 다질 수 있었다.
코바는 연락책을 돌려보내지 않고 바로 새로운 일거리를 주었다.
“너는 곧바로 이 서신을 공국 수도 에 있는 분께 전달하거라.”
“지금 바로 말입니까?”
“이런 일은 빨리 처리하는 게 상책 이지. 지금 당장 출발하도록.”
으레 사람이 무리를 이루면 파벌이 생기는 법이다.
조직의 경우 간부들을 중심으로 파 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중 코바는 공국 쪽 간부에게 줄 을 서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간부들이 제국에서 활 동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줄을 타 도 한참 잘못 탄 편이다.
하지만 이번 서신 건으로 자신이 줄을 선 간부가 힘을 얻으면 코바도 한 줄기 빛이 생겼다.
연락책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서신 을 가지고 공국 수도를 향해 떠나갔 다.
방에 홀로 남은 코바는 집무실의 책장을 뒤적거렸다.
“내게도 시운이 흐르는 건가. 잘만 하면 중책을 맡을 수 있을지도.”
제국과 공국 사이에서 조직원들을 밀입국시키는 중책이라지만 마냥 산 골짜기에서만 지낼 순 없었다.
만약 일이 잘 풀리면 제국 백작, 후작가에 잠입하는 일을 맡게 될지 도 모른다. 아니,어쩌면 제국 황궁 에 드나들 수도 있겠지.
코바는 웃음을 흘리며 책장을 옆으 로 밀어냈다.
책장 뒤의 벽에 붙은 벽장을 열자 금고 문이 드러났다.
“비자금을 미리 옮겨 두는 게 좋겠 군.”
금고 안에는 여태껏 모아 둔 비자 금이 있었다.
밀입국자들의 소지품을 압수하여 빼돌린 것도 있고,근처 대장간과 결탁하여 받은 리베이트 자금도 있 었다.
코바가 희희낙락하며 금고 잠금 장 치를 풀고 있을 무렵.
열린 창문을 통해 한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코바가 갑작스런 인기척을 알아채 고 스킬을 발동하려다가 멈칫했다.
인기척의 주인이 익히 아는 인상이 었던 때문이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 말했다.
“오랜만이군,칼리고. 예의는 염가 판매로 팔아먹었나 보지?”
한때 제국 동부 지방의 지부장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칼리고임을 알아보았다.
코바를 찾아온 칼리고는 다소 꾀죄 죄한 몰골이었다.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듯 머리는 산발이고,피부는 땟물이 방울졌으 며,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넝마가 따로 없었다.
칼리고는 코바가 시비를 걸든 말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서신은…… 서신은 어디 있느냐?”
“대뜸 찾아와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시치미 떼지 마라. 얼른 로스탱이 보낸 서신을 내놓으란 말이다.”
“도통 무슨 소린지 원. 그보다 내 집무실에 악취를 풍기지 말아 주겠 나? 지부장씩이나 되는 놈이 그리 품위가 없어서야.”
“우리가 그 서신 때문에 얼마나 고 생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느냐? 그놈 의 사냥개 때문에 스티븐이 죽었다. 힐라는 꽁무니를 내뺀 지 오래고. 만약 네놈이 서신을 내놓지 않겠다 면 힘을 써서라도 가져갈 것이니 잘 생각하거라.”
코바는 능청맞은 태도로 있다가 사 냥개란 말에 표정을 달리했다.
칼리고가 말한 사냥개란 인물이 네 베르를 말하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 었다.
공국에서 활동하는 조직원 중 네베 르의 무서움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목적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면 모조리 파괴하는데다,명문 백작가의 잠정 가주인지라 현재 직책은 기사 지만 어지간한 귀족보다 더욱 대접 받는 자였다.
코바는 황급히 창문을 닫으며 곁눈 질로 바깥을 살폈다.
“제길,사냥개에게 쫓기고 있는 중 이었으면 그것부터 말해야 할 것 아 냐. 미행은 확실히 떨쳐 냈나?”
“이번에는 확실히 미행을 떨쳤다.”
“이번에는?”
“말 돌리는 건 그쯤 해 두시지. 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 록”
칼리고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같은 조직원이고 뭐고 당장 베어 버리겠단 기세로 원드 블레어드를 전개했다.
칼리고의 주변에 바람이 이는 것을 본 코바가 하는 수 없이 사실을 토 해 냈다.
“쳇,이미 공국 수도로 보냈다. 정 얻고 싶으면 수도로 쫓아가시던지.”
“공국 수도? 빌어먹을 놈. 남의 공 적을 그리 처먹고 싶었느냐?”
“공적이란 건 결제 받았을 때야말 로 인정되는 거 아니었나? 간부 앞 에서도 그리 눈을 시뻘겋게 붉힐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서신은 이미 지부장보다 윗선인 사 람에게로 넘어갔다.
이제 와서 칼리고가 어찌할 수 없 으리라.
그렇게 두 지부장 간의 갈등이 커 져 갈 때였다.
바깥 복도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 려왔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 오더니 누군 가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투광!
코바는 허락도 없이 집무실에 찾아 온 자를 탓했다.
“허락도 없이 이 무슨 무례더냐!”
그러나 막상 집무실에 들어온 자를 확인하자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 다.
문을 박차고 나타난 것은 바로 네
베르를 비롯한 공국의 기사들이었 다.
네베르가 코바와 칼리고를 번갈아 쳐다보곤 독기 어린 표정으로 검을 뽑았다.
“이런 곳까지 조직이 뿌리를 뻗었 었군.”
코바는 서슬이 퍼래져선 손을 내저 었다.
“네,네베르 경! 저,전 아닙니다! 갑자기 이놈들이 쳐들어와선……
서격!
코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네베르 의 검이 코바의 몸을 베어 냈다. 조직원의 말 따윈 들을 필요도 없 으며 들을 생각도 없었다.
코바의 허리가 갈라지면서 집무실 내에 싸한 공기가 퍼졌다.
“즉!”
칼리고로선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 다.
미행이 없는 걸 몇 번이나 확인했 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혹시 모를 추격에 대 비하여 가진 인원을 더욱 쪼개어 사 방으로 퍼뜨렸지 않은가!
그야말로 다 했는데!
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 는데 어째서 적을 뿌리치지 못하난 말이다!
막막하기 짝이 없는 중에도 네베르 가 피에 젖은 검을 들고 몸을 돌렸다.
그가 구석으로 내몰린 칼리고에게 다가갔다.
“또 네놈이로군. 찾고 찾아 다다른 묏자리가 여기였나 보지?”
“이런 망할!”
절규하듯 욕지거리를 내지르는 칼 리고의 머리 위로 네베르의 검이 떨 어 졌다.
서걱! 툭!
칼리고의 머리가 바닥을 구르면서 집무실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손님 접대를 위해 차를 준비해 온 병사가 쟁반을 떨어뜨리면서 적막이 깨졌다.
쨍그랑!
“어,어어! 기사님들…… 왜 코바 경을..
막사 안의 병사들은 벤젠 기사단의 방문을 지나가던 중에 들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코바의 집무실로 직행한 것도 인사 차 들른 것으로 알았는데,막상 와 보니 코바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네베르는 소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몇 명만 내려가서 병사들에게 상 황을 설명하도록. 나머지는 서신을 찾는다.”
“네.”
몇 시간 전,오버로드의 수정으로 서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한시라도 빨리 서신을 되찾기 위해 달려왔고,이곳에 서신이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수색을 하기도 전에 빅터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 왔다.
“네베르 단장님. 서신의 위치가 다 시 바뀌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또다시 다른 곳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상부로 전달하고 있는 형국 인가.”
“아무래도 코바 경은 지부장급 정 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부장보 다 더 위라고 한다면……
“으음,서신을 추적함으로써 끄나 풀들을 색출하게 될 줄이야. 오히려 서신을 잃은 것이 득이 된 건가. 어 쩌면 공국 내에 숨은 조직 간부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현재 서신은 북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북동쪽으로 간다면 공국 수도에 도달하게 됩니 다.”
공국 수도에 조직의 간부 중 한 명이 있다는 뜻일까?
타르손이 알아낸 건 제국 내 조직 상층부 정보뿐,공국 내의 간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조직이 알아서 서신을 수도 에 잠입한 간부에게 전달해 주고 있 는 덕분에,밟힐 일 없던 꼬리를 밟 은 꼴이 되었다.
네베르는 서신을 잃은 게 전화위복 이 되었다 여기며 손가락 뼈마디를 풀었다.
xr tz tz
ㄱ--? 국.
“아무래도 하늘이 공국을 돕는 것 같구나.”
네베르는 이 상황이 마냥 운이 좋 아 생겨난 것으로 여기며 기사들을 이끌고 수도로 떠났다.
본인이 말한 하늘이 단 한 명의 인간임을 모른 채로 말이다.
?
모든 인기척이 사라진 후,집무실 내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카모를라쥬를 푼 김혜림은 팔꿈치 로 강현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들었어요? 하늘이 공국을 돕는다 는데요?”
네베르가 칼리고를 벨 무렵 집무실 에 들어왔던 강현과 김혜림이다.
당연 네베르의 말을 모두 듣고 있 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이란 말까 지 듣게 된 강현이었으나 정작 본인 은 별 감흥 없었다.
“마나포션이나 먹어 둬.”
안전을 위해 카모플라쥬를 쓰고 이 동해야 하는 판국인지라 김혜림의 마나유지가 중요했다.
덕분에 김혜림은 미행 내내 마나포
션을 계속 마셔야 했다 마치 자양강장제라도 먹듯이 마나 포션을 벌컥벌컥 마시던 김혜림이 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빈 포션병을 아공간 반지 에 넣으며 벽을 가리켰다.
“강현 씨,금고가 있어요. 기왕 들 른 거 열어 보고 가죠.”
강현이 집무실에 들어올 때부터 드 러나 있던 금고였다.
네베르는 눈치채지 못한 금고였다.
오로지 서신을 쫓는 데만 급급하였 으니 금고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리라.
금고엔 다이얼식 잠금장치가 설치 되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강현은 빙백검에 마나 블레어드를 두르고 금고를 통째로 도려냈다. 스스슥!
마나 블래이드의 검격에 강철 재질 의 금고문이 두부처럼 썰리며 떨어 졌다.
금고 안에는 다량의 금품과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금품은 눈대중으로 대충 재어 보니 150골드가량 되어 보였다.
강현은 그중 절반인 75골드를 김 혜림에게 건넸다.
“반씩 나누지.”
안 그래도 화살 값조차 충당하기 힘든 지경이었던 김혜림이었다.
이제 숙식 때마다 강현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게 된 터라 눈에 띄게 기뻐했다.
김혜림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강 현에게 빚진 만큼의 액수를 내밀었 다.
“여기 빚진 거 청산이요. 아휴,속 시원해라. 드디어 빚쟁이 소리 안 듣겠네.”
“신용불량자 신세는 면했군.”
“정 못 갚으면 시집이라도 가려 했 죠. 그럼 빚은 탕감되잖아요.”
“은혜를 원수로 갚을 셈인가.”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 다른 획득품인 편지를 열어 보았다.
내용 자체는 ‘더 이상 산골짜기에 서 썩을 수 없다’, ‘공국 수도로 불러 주십시오’ 등의 요청안이었다. 조직에 대해선 언급되지 않았지만, 코바가 조직원임을 감안하면 조직 간부에게 보내려던 편지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편지 내용 중 실수인지,아 니면 무심코 적은 건지 공국 내 간 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피스 님. 절 공국 수도로 불러 주신다면…….]
조피 스.
얼마 전,공국의 공주와 약혼한 이 세계인이자 왕궁의 1급 집무관이었 다.
즉,공왕의 사위될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