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하는 플레이어-57화 (57/381)

57화

전장을 벗어난 강현과 김혜림은 칼 덴 협곡을 빠져나왔다.

칼덴 협곡을 지나 공국 안쪽을 향 해 움직이다 보니 도시 하나가 나타 났다.

브리니아 공국 쪽 국경도시인 데르 먼 시였다.

데르먼 시는 밀가루와 설탕이 특산 품으로 도시 곳곳에 수제 빵집이 가 득했다.

빵 굽는 냄새가 가득한 거리에는 코에 생크림을 묻힌 아이들이 뛰어 다녔고,가판대에 놓인 빵에선 두툼 한 치즈와 딸기쟁이 듬뿍 홀러내리고 있었다.

관광객이었다면 식당 테라스에 앉 아 식빵에 버터라도 발랐겠지만 강 현과 김혜림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 다.

강현과 김혜림은 요깃거리로 산 싸 구려 토스트를 입속에 욱여넣으며 말했다.

“토스트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데르먼 남작가 저택은 도시 동쪽에 있다더군.”

“로스탱이란 조직원이 과연 저택에 있을까요? 임무 때문에 도시를 떠난 상태면 괜히 헛걸음만 한 셈이에 요.”

“공국에 있는 조직원들에게도 서신

의 행방은 큰 관심사일 테지. 어지 간해선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 아.”

데르먼 시 동쪽 외곽에 들어서자 작은 저택 하나가 나왔다.

강현은 저택 앞에서 문지기를 통해 로스탱이란 기사를 불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안쪽에서 단정한 차림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로스탱은 얼굴 구석구석 웃음기가 묻은 인상 좋은 청년이었다.

별안간 찾아온 여행자들 때문에 갑 자기 불려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친 절한 모습을 내비쳤다.

“반갑습니다,로스탱입니다. 절 찾 으셨다지요?”

첫 인상만 보면 친절한 사람 같았 다.

그러나 그가 조직원이라는 걸 잊어 선 안 된다.

지금 보이는 친절한 모습 자체가 가식이리라.

조직원 입장에선 기사의 신분으로 귀족가에 잠입한 이상 철저하게 기 사 연기를 해내야 한다.

신뢰를 얻기 위해선 인품과 실력을 동시에 겸비한 기사로 보여야 하니 까.

강현은 새삼 조직원들의 연기 실력 을 되뇌었다.

‘조직에 가입하면 연기 수업부터 시키는 모양이군.’

덕분에 문전박대당하지 않고 이리 대화를 틀 수 있는 거지만 말이다. 강현은 로스탱에게 가까이 붙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서신과 관련된 일이다. 자세한 이 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도록 하 지.”

로스탱의 어깨가 미미하게나마 들 썩였다.

서신이란 단어만으로도 민감한 반 응이 었다.

공국 내 조직원들도 서신의 행방을 신경 쓰고 있으리란 예상이 적중한 것이었다.

서신의 중요성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빨랐다.

로스탱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 고 싶은 눈치였다.

로스탱은 문지기 병사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쳤 다.

“아,자네가 그 친구인가. 식전이면 내가 한 끼 사도록 하지. 바일,내 잠시 지인이 찾아와서 자리를 비울 테니 남작님께서 날 찾으면 그리 알 려드리게.”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 오.”

적당한 핑계로 저택에서 벗어난 세 사람은 시내로 들어가는 대신 한적 한 장소로 이동했다.

휴작을 위해 비워 둔 작은 개간지

위에서 로스탱이 걸음을 멈췄다. 아까까지만 해도 영업용 미소로 가 득하던 얼굴은 세상불만 다 찌든 듯 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까는 잠입을 위해 위장한 모습이 라면,지금은 말 그대로 본모습이었 다.

로스탱이 목소리를 묵직하게 깔며 말했다.

“확실히 해 두지. 서신이라는 게 지금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는 그 서신이더냐?”

강현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러곤 썰이 붙어 있는 쪽 을 앞으로 향하게 하여 봉인의 썰을 보여 주었다.

“명실상부 공국 왕실이 쓰는 봉인 의 썰이다. 이거면 됐나?”

“흠,정말이로군. 그런데 왜 내게 서신을 가지고 온 거지? 분명 제국 의 조직원들이 서신을 되찾기 위해 나선 걸로 알고 있다만.”

“칼덴 협곡 쪽에서 공국의 사냥개 와 교전을 벌인 건 알고 있나?”

“네베르와 싸웠단 말인가? 제법 출 혈이 컸겠군.”

“어찌어찌 교전 중에 서신을 름쳐 내어 나 홀로 이탈한 상황이다. 서 신 처리를 위해 공국 내 상층부의 힘을 빌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연 락할 수 있는지 아나?”

서신 처리를 위해 자신을 찾아왔음

을 알게 된 로스탱이었다.

로스탱은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빛 으로 서신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찾아왔군. 이 지역 지부장 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 지.”

“그렇다면 말이 빠르겠군. 지부장 은 어디 있지?”

“우리 지부장은 의심이 많아서 같 은 지부 소속 조직원이 아니면 만나 주지 않아. 그러니 서신은 내가 전 해 주도록 하지.”

로스탱의 말에 노이즈가 섞였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신을 받아 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서신을 받은 후,마치 자신이 서신 을 취한 것처럼 꾸며 공적을 독차지 하려는 속셈이 훤히 보였다.

조직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서신인 만큼 처리했을 경우 주어지는 보상 이 만만찮다.

적어도 400~500골드의 포상금은 얻을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스킬북 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래서 지부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 면서도 알고 있다는 식으로 거짓말 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로스탱에게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부탁하지.”

강현이 서신을 건네주고 떠난 후,

로스탱은 확신을 더하기 위해 봉인 의 썰에 감정서를 붙여 보았다. 감정서에 글씨가 새겨지면서 서신 을 봉하고 있는 보구의 설명이 나타 났다.

정말로 공국 왕실에서 쓰는 봉인의 썰이 었다.

감정서를 통해 서신이 진품임을 확 인한 로스탱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크크,급하긴 엄청 급했던 모양이 군. 공적을 세울 수 있는 물건을 이 리 쉽게 넘겨주면 쓰나.”

떠보기나 하려고 슬쩍 던져 본 거 였는데 말이지.

적어도 조금은 의심할 줄 알았는데

이리 넙죽 줄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셈 이었다.

로스탱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끼며 시내로 향했다.

그가 시내로 들어가 찾아간 곳은 어느 허름한 주점이었다.

먼지 낀 유리잔을 닦고 있던 바텐 더가 로스탱을 힐끗 보았다.

로스탱은 비어 있는 카운터 바의 중앙 자리에 앉아 동전 3개를 내밀 었다.

“바카디. 얼음 넣어서 쿼터로.”

바텐더가 동전 3개를 받더니 찬장 에 놓인 술병을 45도로 비틀었다. 그러면서 술병 뒤에 놓여 있던 작은 오르골 상자를 열었다.

바텐더가 연 오르골 상자는 ‘소리 먹는 오르골’이란 보구였다.

오르골을 열면 일정 범위 내에 방 음 결계를 펼치는 효과가 있었다. 철저한 보안 하에서 바텐더가 입을 열었다.

“용건은?”

바텐더는 다름 아닌 조직의 비밀 연락책이 었다.

지부장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면 무조건 연락책을 통해야만 했다.

로스탱은 바텐더에게 서신을 내밀 었다.

“이걸 코바 지부장에게 전달해 줘. 로스탱이 얻었다는 말과 함께.”

?

연락책에게 서신을 넘긴 로스탱이 주점에서 나왔다.

조직에서 떨어질 포상금 생각에 한 껏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로스탱을 멀찍이서 지 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바로 강현과 김혜림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둘은 로스탱을 미행했고,그가 정말로 지부장에게 서신을 전달하는지 확실하게 확인했 다.

강현은 멀어지는 로스탱의 뒷모습 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진 계획대로군.”

“과연 생각대로 잘 풀릴까요? 서신 을 그냥 넘겨준 건 너무 도박인 거 같은데요.”

“네베르는 서신을 추적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어. 사냥개는 서신 의 냄새를 쫓아 모든 사냥감을 물어 뜯겠지.”

네베르에게 서신 추적 수단이 있음 은 이미 확인된 바다.

조직도 서신을 중요시 여기는 만큼 운반을 계속할 테고 말이다.

네베르는 서신을 쫓으면서 마주치 는 족족 조직원을 처리할 거다. 오해를 풀려고 옥신각신할 바엔 차 라리 네베르의 분노를 이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세운 작전이었다. 작전이 성공하면 강현 입장에선 손 도 안 대고 조직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김혜림은 서신이 자신들의 손을 떠난 것이 영 불안할 따름이었 다.

“근데 결국 공왕과 거래를 하려면 서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잖아요. 어 떻게 되찾을 거예요?”

“이제부터 네베르를 쫓아야지. 우 리에겐 카모를라쥬가 있고,위치 되 감기가 있어. 종점에 다다랐을 때 서신을 되찾아오는 건 일도 아니 지.”

“아시”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발상을 네베르와 조직의 전투 중에 떠올렸다니.

김혜림은 강현의 발상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되뇌었다.

언젠간 본인도 수 싸움 하나하나가 중요해지는 경지에 이를 것이기에.

*

저택으로 돌아가던 로스탱 앞에 일 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그 무리의 선두에서 다용도 조끼를 입은 중년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쪽이 로스탱인가?”

로스탱은 막 서신을 부치고 온 참

이라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중년 사내의 말은 로스탱으로 하여금 검을 내리게 만 들었다.

“제국 동부에서 활동하는 지부장 칼리고일세. 조직원 하나가 서신을 가져오지 않았나?”

오늘 마주친 멍청한 조직원의 상관 쯤 되는 모양이군.

같은 조직원임을 안 이상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직급상으로 자신보다 상 급자 였다.

경솔하게 대할 까닭이 없었다.

로스탱은 아까 강현을 대했던 것과 달리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신 자라면 제국으로 돌아간 다 했습니다.”

“제국으로 돌아가? 큭,길이 엇갈 렸나. 아직 그는 서신을 가지고 있 나?”

“서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직속상관에 게 보내 버린 참이다.

이제 와서 사실대로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칼리고는 한시가 급한 때라 로스탱 을 다그쳤다.

“얼른 말하지 못할까! 서신은 어디 에 있느냐!”

“코,코바 지부장님께 보냈습니다. 제 선에서 처리할 것이 못 되었기 에……

“연락책을 통해 보냈느냐?”

“그,그렇습니다.”

“젠장,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이는 군.”

자칫 잘못하면 다른 지부장에게 공 로를 빼앗길 수 있었다.

어떻게든 서신이 전달되기 전에 가 로채야만 했다.

칼리고는 가까운 연락책에게 가기 위하여 바로 움직이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측면에서 화살이 날 아들더니 로스탱의 목을 꿰뚫었다. 푸욱!

“크헉!”

로스탱이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꺽 꺽 숨을 내뱉다가 절명했다.

눈앞에서 로스탱의 죽음을 목격한 칼리고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포장도로 측면의 비탈길 위를 본 순간 그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미친놈들! 벌써 추격해 왔다고?”

분명 칼덴 협곡에서 제대로 떨쳐 냈을 터이다.

미행이 있는지 없는지 거듭 확인을 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어떻게 놈들이 벌써 여기까 지!

비탈길 위에는 벤젠 기사단이 떡하

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조직원들에게 있어 광견이나 다름없는 자가 우뚝 서 있었다.

비탈길 위에 서 있던 네베르는 칼 리고를 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더러운 낯짝들을 다시 보게 되 어 기쁘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