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화
공국을 향해 이동하던 강현과 김혜 림은 국경을 넘기 위해 국경도시 빌 링턴에 다다랐다.
수많은 국경도시 중 하나인 빌링턴 은 제국에서 가장 바가지가 심한 도 시였다.
어느 유명한 유랑시인은 빌링턴을 두고 ‘그들은 모든 것을 높게 부른 다. 그래 놓곤 즐기듯 손님과 흥정 을 시작한다. 깎아 주는 것 하나는 쉬프섬의 양모업자들보다 잘 깎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여관을 잡으려고 하자마자 얼토당토않은 가격이 튀어 나왔다.
“2인실, 1박 2일에 4골드.”
봄이고,보리 거래 때문에 상인 교 류가 많아 1인실이 없는 것까진 이 해한다.
하지만 2인실을 1박 2일에 4골드 나 받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가격 이었다.
평범한 도시에선 80실버인 숙박비 를 무려 다섯 배나 높여 부르고 있 었다.
김혜림이 여관 주인의 말에 펄펄 뛰며 발끈했다.
“평균가보다 다섯 배나 비싼 게 말 이 돼요?”
“여기선 4골드가 평균가야. 그리고
구더기가 기어 다니지 않는 침대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그럼 85실버로 해 줘요. 2인실은 많다면서요. 빈 방 놀리느니 85실버 라도 받으시죠?”
“3골드 80실버. 커플 손님은 방을 지저분하게 써서 값을 더 받아도 모 자라다고.”
“흥,이 남자는 실오라기 한 을 없 어도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이거든 요? 86실버.”
“그거 안타깝구만. 3골드 70실버.”
“10실버짜리 동정은 필요 없네요.
86실버 30브론즈.”
이럴 땐 또 알뜰하기 짝이 없는 김혜림인지라 브론즈 단위로 홍정을 하기 시작했다.
여관 주인도 모처럼 호적수를 만났 다고 생각하는지 거부하지 않고 흥 정 싸움을 벌였다.
강현도 모름지기 남자인지라 홍정 은 귀찮은 소란에 불과했다.
돈도 수백 골드나 있겠다 그냥 4 골드 지불하면 끝이었다.
“그냥 오늘 숙박비는 내가 내지.”
그러나 김혜림은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여긴 제가 책임질 테니까,구경이 나 하고 있어요. 87실버 10브론즈!”
김혜림은 결국 30분에 달하는 흥 정 끝에 1골드로 2인실 방에 목욕 물을 제공하는 조건을 받아 냈다.
종국에는 로비에서 쉬는 사람들까 지 구경꾼으로 변모해선 김혜림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기까지 했다.
강현은 짐을 풀며 말했다.
“방 하나 잡는데 그리 요란을 떨다 니.”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살림 으로 이어진다고요. 오늘 깎은 몫만 큼 빚에서 차감해 줘요.”
“그러고 보니 20골드 빚이 있었지.”
“잊고 있었어요? 아깝다. 말하지 말걸.”
“설마,그걸 잊을 리가.”
“그렇다고 믿어 줄게요. 내일은 바 로 공국으로 넘어갈 거죠?”
“그래야지.”
국경을 넘어가는데 절차는 그리 까 다롤지 않았다.
반입 금지 물품을 가지고 있지만 않으면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브리니아 공국이 제국의 제후국이 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현은 여태껏 여행을 하며 풍문으 로 들었던 브리니아 공국에 대한 정 보를 떠올렸다.
“제국 초대 황제가 대륙통일 때 점 령했던 나라가 그대로 공국이 된 형 태였었나.”
“뭐가요?”
“브리니아 공국 말이야.”
“아마도요. 영토 규모로만 따지면 제국의 4분의 1은 되니 단순한 공국이라 칭할 수만은 없죠. 잘만 하 면 든든한 후원자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서신 한 장으로 거기까지 얻을 수 있다면 아무도 뇌물 따윈 쓰지 않겠 지.”
“보통 서신이 아니잖아요. 조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물건이에 요.”
강현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냈다.
이 서신에는 조직의 상층부 정보가 담겨 있다.
강현은 썰에 감정서를 붙여 본 결 과 이것이 봉인의 썰이고,한 세트 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신에 달린 봉인의 썰은 투시 능 력을 막는 건 물론이고, 서신이 훼 손되지 않게 보호하는 능력까지 있 었다.
봉인의 썰과 한 세트인 ‘개봉의 씰’을 붙이지 않는 이상 서신을 없 애는 것도,여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말이지 봉인이란 이름이 걸맞는 보구였다.
그보다 슬슬 조직 측도 융륭의 사 망 사실을 확인했을 거다.
강현은 아공간 주머니에 도로 서신 을 넣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덴 협곡에 도착할 때까지 조직 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문제인데 말 이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변장을 해 두는 게 좋겠군.
짐 정리를 마친 강현과 김혜림은 새로이 검은색 로브를 사서 둘렀으 며,각자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마무리로 어두운 톤의 분가루까지 사서 바르니 둘은 마치 동남아 사람 처럼 보였다.
*
조직의 제국 동부 아지트.
좀처럼 서로 맞닥뜨릴 일 없는 지 부장들이 한데 모였다.
머릿수가 막 일곱 명이 되었을 때,
동부 지부장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융륭이 당했다더군.”
“잘됐네. 남의 스텟으로 잘난 척하 는 게 안 그래도 재수 없었는데. 생 긴 것마냥 하는 짓도 거미 같았었 지. 분명 족보에 거미가 끼어 있을 걸?”
“거기에 빨강 파랑 뒤섞인 졸졸이 까지 입고 있었으면 완벽했겠군.”
실없는 농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다용도 조끼를 걸친 중년 사내가 주 의를 주었다.
“농담은 그쯤하지. 만담이나 하자 고 모인 게 아니니까. 지금 문제는 어떻게 서신을 처리하느냐다. 서신 을 건네받은 게 빙검의 용병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겠지?”
“마나 마스터라며? 지부장급으로는 턱도 안 될 텐데? 조직에 충성은 하지만 목숨줄을 도화선으로 바꿀 생각은 없어.”
“놈이 빌링턴에 있다는 것까진 알 아냈다. 거기서 공국으로 들어가려 면 칼덴 협곡을 지나야 하지.”
조끼를 걸친 중년 사내가 원탁 중 앙에 지도를 펼쳤다.
벌써 조사를 마쳤는지 빌링턴에서 칼덴 협곡까지의 루트가 선으로 그 어져 있었다.
동부 지부장 중 유달리 딱 달라붙 는 정장 차림의 여자가 맞은편의 한 남자를 힐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
“놈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문제는 화력이야. 코찔찔이 불꽃놀 이 세트로 불꽃축제가 가능할 거라 생각해?”
여자의 눈길을 받은 턱수염이 까칠 하게 난 금발 백인 사내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죽고 싶나? 누가 코찔찔이 불꽃놀 이 세트란 거지?”
한순간에 장내 분위기가 험악해졌 다.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다지만 지부 장들은 평소 개인적으로 활동했다. 정보유출을 최대한 막기 위해 지부 장급끼리도 접촉에 제약을 두는 것 이었다.
긴급회의란 명목으로 이 자리에 지 부장들끼리 모인 것도 이번이 처음 이었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이나 얼굴 정도 만 알고 있었다.
융륭같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에도 유명했던 자라면 모를까,다른 자들 은 서로의 능력조차 모르는 편이었 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자들이 모였 기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져도 이상 할 게 없었다.
하나,이 두 남녀는 일면식이 있던 지 유별나게 투닥거렸다.
중년사내가 그 둘 사이를 중재하듯 말했다.
“발끈하지 마라,스티븐. 힐라는 상 대적으로 말했을 뿐이야. 여기서 누 가 빙검의 용병에게 비벼 볼 수 있 겠나.”
“제길,말을 해도 꼭 사람 신경 긁 는 말투로 한단 말이지. 그래서 화 력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거야? 전 부 다 몰려가서 집단 린치라도 할 셈이야?”
“지금 황궁과 두 공작파의 대립 구 도가 형성되었으니, 그걸 뒷받침할 인원은 남아 있어야 하지. 여기 모 인 사람 중 세 사람만 간다. 지목 받는 사람은 지부의 병력을 이끌고 칼덴 협곡으로 가라.”
“지목 당했을 경우 거부권은?”
“그분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다.”
“거부권은 없다는 거군. 쳇,합동 작전은 질색인데.”
지부장들 모두 합동 작전을 꺼리는 듯 불만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분’으로부터 직접 명령 을 전달 받은 한 지부장은 불만을 한 귀로 홀려 넘겼다.
‘그분’의 지령은 절대적.
불만은 있어도 거부란 있을 수 없 었다.
“이의란 없다. 지금부터 칼덴 협곡 으로 갈 세 명을 지목하지.”
*
이튿날,강현과 김혜림은 새벽 일 찍 국경 검문소로 향했다.
검문소 통과 과정에 줄을 서지 않 기 위함도 있지만,조직의 움직임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검문소를 통과하는 과정은 간편했 다.
간단한 소지품 검사와 출국 목적만 묻는 게 전부였다.
출국 목적도 그리 깐깐하게 물어보 지도 않았다.
소지품 검사 도중에 빙백검을 확인 한 병사가 강현을 알아본 덕분이었 다.
“푸른 비늘의 검? 설마 그 소문 의……
“무슨 문제라도?”
병사의 심상잖은 표정을 읽은 김혜 림이 눈치껏 물었다.
하나,병사가 휘휘 고개를 저었다.
“아뇨,문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에르델 황녀님의 은인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르델이 황궁으로 돌아가 슈타인 백작령의 일을 보고한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강현을 생명의 은인이 라 밝혀 여기까지 소문이 퍼진 것이 리라.
덕분에 강현은 예우를 받으며 국경 을 넘을 수 있었다.
국경에서 칼덴 협곡으로 가려면 숲 하나를 지나야 했다.
그렇게 숲으로 들어선 지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커다란 고목이 빽빽이 솟은 곳에서 강현이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김혜림. 카모를라쥬를 써.”
“네? 갑자기 왜요?”
“미행이 붙었어.”
김혜림은 엉겁결에 뒤를 돌아보려 다가 간신히 참아 냈다.
여기서 뒤를 돌아보면 미행을 알아 차렸다고 알려 주는 꼴이나 마찬가 지였다.
지금 두 사람을 미행할 자들이라면 조직밖에 없었다.
조직도 상대가 강현이라면 만반의 준비를 했을 터.
놈들의 계획을 비틀고 빈틈을 노리 려면 적을 끌어내는 게 먼저였다. 때문에 강현이 은신 스킬인 카모를 라쥬를 펼치라고 말한 것이었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 접어들어 자연 스레 모습이 가려질 즈음,김혜림이 카모를라쥬를 전개했다.
강현과 김혜림의 몸 주위로 옅은 녹색 빛이 깃들며 두 사람의 신형이 풍경에 녹아들었다.
잠시 후,뒤편에서 두 명의 사내가 뛰쳐나오며 황급히 사방을 두리번거 렸다.
“설마 들킨 건가. 이동 스킬을 쓴 거면 이미 놓쳤다고 보는 게……
“침착해. 빅터를 기다리는 게 먼저
야. 반경 20km 내라면 아직 뒤쫓을 기회는 남아 있어.”
강현과 김혜림이 근처에 있는 줄은 모른 채 두 남자가 횡설수설했다.
카모를라쥬를 쓴 채로 나무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강현은 모든 대화 를 고스란히 들었다.
두 사내의 대화로 보건데 동료가 더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게다가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수단까지 갖춘 듯이 보였다.
'저 둘은 선발대고,뒤따르는 본대 에는 20km 이내를 탐색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있는 거군. 굳이 되돌아가 지 않는 건 본대가 근처에 있기 때 문인가.’
당장 20km 바깥으로 벗어나는 건 불가능이다.
마침 인적이 드문 숲이니 전투를 벌일 거면 여기서 벌여야 한다. 상대도 대대적으로 전투를 벌일 생 각으로 국경에서 거리를 둘 때까지 미행만 붙여 놓은 것이리라. 그렇다면 선발대인 두 사내를 미리 제거해 두는 게 나았다.
강현은 김혜림에게 눈짓을 보냈다.
‘저 둘을 처리할 동안 저격 위치를 잡아 둬. 녀석들의 본대가 도착할 때 엄호 부탁하지.’
눈짓만으로도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는 충분했다.
김혜림이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저격 포인트를 찾아 움직 였다.
김혜림이 멀어지고 강현의 카모를 라쥬가 풀렸다.
동시에 강현은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무방비에 가까운 두 사내 를 향해 몸을 날렸다.
“흐억! 놈이다!”
“어서 후발대에 이 사실을……
두 사내가 강현을 알아차리고 신호 를 보내려 했을 때엔,이미 빙백검 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두 사내가 채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전에,마나 블레이드를 전개한 빙백 검이 떨어졌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별안간 맞은편 수풀에서 또 다른 자가 튀어나오더니, 두 사내와 강현 사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쩌영!
그 검과 빙백검이 맞부딪치며 커다 란 굉음이 터졌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놀라운 것이 었다.
상대의 검이 빙백검을 막아 낸 것 이었다. 아니,막아 낸 것에 그치지 않고 빙백검을 밀어내는 수준까지 이르렸다.
끼릭! 끼기긱!
그 반력에 강현이 반 발작 정도 뒤로 밀려났다.
마나 블레이드와도 견주는 위력에
그림자의 검을 확인했다.
그 순간,강현이 눈빛이 차갑게 식 었다.
빙백검을 밀어낸 자가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리며 노기를 발했다.
“서신을 내놓아라. 그것은 우리의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