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화
슈타인 백작령 동쪽의 작은 마을.
봄보리가 가득 핀 벌판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아침 댓바람부터 보 리 이삭 나부끼는 소리가 귓가를 간 지럽 힌다.
마을 내에 30채밖에 없는 오두막 집 중 한 채에서 훤칠한 인상의 청 년이 걸어 나왔다.
꼬박 하루를 내리 잠들었던 강현은 뭉친 어깨 근육을 풀며 몸 상태를 가늠했다.
'아직 라그나로스와 싸운 영향이 남아 있군.’
스스로 생각해도 라그나로스와의
연속적인 싸움은 무모했다고 생각되 었다.
크라이머 던전 2층에서 세이덴을 상대로 수련할 때에도 연속 20시간 전투는 하지 않았었다.
더욱이 하도 불에 그을린 탓인지 손등이며 얼굴 피부가 햇볕에 탄 것 마냥 허물이 일어나 있었다.
무심코 콧잔등의 허물에 손을 대려 할 때 마당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젊은이,허물은 벗기는 게 아녀. 그러다 잘생긴 얼굴에 탈날라.”
이곳,아이더 마을의 촌장이었다. 어제 오후,아이더 마을에 도착한 후 여관이 없어 곤란하던 차에 친절을 베풀어 하룻밤 묵게 해 준 사람 이었다.
촌장은 절구에 보리 이삭을 넣고 빻다가 일손을 멈추며 사람 좋은 미 소를 지어 보였다.
“거 젊은이 잘도 자더만. 코고는 소리가 아주 잔칫날 수준이던데.”
“그랬습니까?”
“허허,농담일세.”
“재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박비 는 얼마나 지불하면 되겠습니까?”
강현이 돈을 꺼내려 하자 촌장은 대뜸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어허,숙박비는 무슨. 어차피 받아 봐야 마누라 주머니에 들어갈 건데 받아서 뭐하나.”
촌장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 리를 하자,마당 구석의 텃밭에 물 을 주던 촌장 부인이 잔소리했다.
“저 영감쟁이 또 쓸데없는 소리한 다. 돈만 생기면 허구한 날 바깥에 서 술만 퍼마시는데 돈 쥐여 줘서 어쩌자고?”
“거참! 손님 있는데서 남사스럽게 구박은! 됐고,아침상이나 차려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침상을 차려오니 마니 시키나.”
“젊은이들 첫 끼니니까 아침이지!”
“첫 끼고 뭐고 점심 때 먹으면 점 심이라 해야지!”
“에잉,저놈의 여편네. 갈수록 남편 알기를 우습게 보고! 내가 콱 죽어버리든가 해야지.”
“죽으려거든 절구통 안에 이삭이나 다 빻고 죽으소.”
딱히 싸울 거리도 없었는데 어느새 투닥거리는 촌장 부부였다.
남이 들으면 부부싸움을 방불케 하 는 말싸움이었지만,강현은 이 말다 툼이 다른 의미임을 알았다.
이번에 얻은 새로운 특수능력,‘간 파’의 효과 덕분이었다.
간파의 효과는 상대가 거짓말을 할 때,거짓말 속에 ‘삐?’라는 노이즈 가 살짝 섞여서 들려왔다.
상대의 말을 집중해야만 노이즈를 구분할 수 있어서 거슬릴 정도의 소 음은 아니었다.
버리든가 해야지.”
“죽으려거든 절구통 안에 이삭이나 다 빻고 죽으소.”
딱히 싸울 거리도 없었는데 어느새 투닥거리는 촌장 부부였다.
남이 들으면 부부싸움을 방불케 하 는 말싸움이었지만,강현은 이 말다 툼이 다른 의미임을 알았다.
이번에 얻은 새로운 특수능력,‘간 파’의 효과 덕분이었다.
간파의 효과는 상대가 거짓말을 할 때,거짓말 속에 ‘삐?’라는 노이즈 가 살짝 섞여서 들려왔다.
상대의 말을 집중해야만 노이즈를 구분할 수 있어서 거슬릴 정도의 소 음은 아니었다.
부부싸움 내내 노이즈가 살짝 섞인 것으로,둘 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 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부부싸움은 촌장 부인의 승리 로 마무리되었다.
연륜 넘치는 애정 싸움이 끝나 갈 즈음,오두막집 뒤편에서 김혜림이 나타났다.
냇가에서 씻고 온 건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강현 씨,일어나셨어요?”
“씻고 왔나?”
“네. 강현 씨는 어쩌실래요? 씻고 식사하실래요?”
촌장 부인이 텃밭의 채소를 쑤욱 뽑아내며 말했다.
“총각,내 이거 다 뽑고 식사 준비 할 테니까 씻고 오소.”
“아,제가 도울게요.”
“아가씨 참 눈치 빠르네. 시집실끼 잘하겠어.”
“헤헤,갈 곳은 있는데 문을 안 열 어 줘서 못 가고 있죠.”
강현은 김혜림의 말을 못 들은 척 흘려 넘기며 냇가로 향했다.
냇가에서 대충 얼굴에 물을 끼얹으 며 세안을 하는데 건너편에서 아낙 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기 국경 너머 공국에선 공 주님이 약혼하셨다며?”
“내가 어제 모슈 아재한테 들었는 데 상대가 이세계인이라더라고.”
“그게 참말이야? 공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뭐 하러 이세계인이랑 결혼 하려 한데.”
“나도 모르지. 아무튼 그 이세계인 은 한 자리 꿰찼다더만. 여자 한 명 잘 꾀어서 팔자 핀 거지.”
“에구구,그래도 둘이 좋아 약혼한 건데 그죄 말하면 쓰나.”
시끄러운 수다 너머로 세수를 마친 강현은 촌장의 집으로 돌아왔다. 오두막집에 들어서니 어느덧 식사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식사는 제국의 일반 가정집에서 흔 히 볼 수 있는 요리들로 나왔다. 빵과 설탕에 절인 콩,각종 샐러드 류 등이었다.
식사 도중 김혜림이 입을 오물거리 며 말을 꺼냈다.
“깝깝,언제 출발할 거예요?”
“식사 끝나고 좀 쉬다가.”
“목적지는요?”
“안 정했어. 당분간은 조용히 다닐 생각이야.”
이번 일로 강현의 위치는 매우 애 매해졌다.
두 공작파에게 ‘최진철을 찾으면 섭외에 응하겠다’라고 선언한 상태 에서 에르델과 함께 움직였다. 거기에 봉인이 풀린 웨이브에서 에 르델만 달랑 살려서 나왔으니 주변 이목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번 결혼식의 뒤처리는 에르델의 몫이지, 자신의 몫이 아니다. 괜히 말려들어 사건 증인으로 불려 다니는 건 사양이다.
당분간은 조용히 다니면서 조직에 대한 정보나 간간이 조사해 볼 생각 이었다.
‘테라 시스템의 진실이라……
최진철이 죽기 직전에 남겼던 단서 다.
단순히 자신의 빈틈을 끌어내기 위 함이었는지,아니면 정말 협상을 위 해 꺼낸 말인지 지금에 와서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최진철이 알고 있는 정보 라면 조직의 상층부도 알고 있을 터.
당분간 조직을 목표로 움직이는 것 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자신의 바지 에 빵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게 보였 다.
옆에서 김혜림이 빵을 뜯어먹다가 홀리면서 부스러기가 된 것이었다. 부스러기를 털어 내며 주의를 주었 다.
“홀리지 말고 먹어.”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근육통이 생 겨서요.”
“단련이 부족하군.”
“그 정도로 움직여 놓고도 멀쩡한 사람이 이상한 거예요.”
“아무튼 홀리지 말도록.”
“바지 더러워지는 게 싫으면 직접 먹여 주시던가요.”
“요즘 따라 자꾸 불가능에 도전하 려 하는군.”
어느새 투닥거리기 시작한 두 사람 을 보던 촌장 부인이 김혜림 편을 들어주었다.
“청년,그러면 못 써. 젊을 때부터 안사람한테 잘해 줘야지. 안 그러면 여기 영감쟁이처럼 늙어서 대접 못 받아.”
“여기서 내 얘기가 왜 나와? 누가 들으면 내가 젊었을 적에 못 해 준 줄 알겠네.”
“얼씨구,착각도 유분수지 젊을 때 그리 고생을 시켜 놓고 이제 와서 뭔 소리래.”
“당신 기억 안 나? 콩 하면 콩 갖 다 주고,팥 하면 팥 갖다 줬구만.”
“영감쟁이 헛소리는 됐고. 젊은이 들은 싸우지 말고 많이들 들어. 음 식은 넉넉하게 준비해 놨으니까.”
정말이지 과분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주는 촌장 부부였다.
세상이 삭막해졌다 해도 시골 인심 은 남아 있다 했던가.
강현과 김혜림은 모처럼 집에 들른 기분에 잠기며 편히 식사를 계속했 다.
그런데 잠시 후 현관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옆집에서라도 찾아온 걸까?
촌장이 식사를 멈추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열린 문 너머로 동 네 사람이 보였다.
한데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편으로 다수의 마을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낮은 소리로 촌장에게 무언 가 말을 전했다.
그 말을 잠잠히 듣던 촌장은 별안 간 정색을 하더니 사람들을 돌려보 냈다.
“알겠네.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 주 게나.”
촌장이 문을 닫고 다시 식탁에 앉 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고목숲에서 시체가 여럿 발 견되 었다는군.”
무슨 일인가 싶어 막 질문을 하려 던 촌장 부인이 사정을 듣곤 몸서리 를 쳤다.
“에구 세상에. 누가 죽었대?”
“적어도 이 주변 사람은 아닌 듯하 이. 이세계인들끼리 싸운 거겠지.”
“쯧쯧,타지까지 와서 허구한 날 뭔 짓이람.”
“내 말이. 하여간 그놈의 이세계인 들이 문제야. 오갈 곳 없는 난민들 받아 줬더니 허구한 날 나쁜 짓만 해 대니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 나.”
강현이야 강심장이니 태연하게 식
사를 계속했지만,빵을 먹던 김혜림 의 움직임은 다소 조심스러워졌다. 촌장 부부는 강현 일행이 이세계인 이라는 걸 몰랐기에 대놓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어디 한구석에 몰아넣고 따로 살 게 하든가 해야지 원. 나라에선 일 도 안 하고 뭐 하나 몰라.”
현지인들이 이세계인을 어떻게 여 기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단면이었 다.
요 몇 년간,이세계인들의 범죄 횟 수는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차원이동을 하는 이세계인 의 숫자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세계인의 숫자가 늘어난 만큼 질
나쁜 이세계인의 숫자도 덩달아 늘 어난 듯했다.
범죄율만 따지면 현지인과 크게 다 를 게 없으나,굴러온 돌의 잡음이 더욱 부정적으로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강현과 김혜림이 이세계인이라는 걸 모르는 촌장 부부는 곧 떠날 두 사람을 걱정해 주었다.
“두 사람도 이세계인들을 조심하 게. 항상 남을 속이는 족속들이니 까.”
*
“남을 속이는 족속들
아이더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김혜 림이 중얼거렸다.
촌장 부부에게 악의가 없음을 알면 서도 내내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신경 쓰이나?”
“신경 쓰일 수밖에 없죠. 저도 이 세계인이니까요. 강현 씨는 아무 생 각도 안 들었어요?”
강현은 보리밭 사이를 성큼성큼 걸 으며 무뚝뚝하게 한 마디했다.
“본인 할 일만 잘하면 문제없어.”
인식이란 결국 개개인의 행동이 모 여서 만들어진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게 아 니라,아래에서 위로 생겨나는 것이 다.
휘둘릴 필요 없이 본인의 길만 묵 묵하게 가면 그만이다.
게다가 인식이라는 건 능력과 반비 례하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난 자는 인식과 상관없이 대우받기 마련이 다.
같은 이세계인들이라도 기사들은 존경 받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김혜림도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닫고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강현 씨 말이 맞아요. 쓸데없는 걱정을 했네요.”
“알면 됐어.”
아이더 마을을 떠난 직후 계속 우 울해하던 김혜림이 기운을 되찾았 다.
일렁이던 보리 물결도 어느덧 끝이 보였다.
보리밭 벌판의 끝에는 갈림길이 있 었다.
갈림길 하나는 고목숲으로,나머지 하나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고목숲에선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했으니 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택했 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 산길 로 들어서는데 김혜림이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아,지금 물방울 떨어졌어요. 설마 비 오나.”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에 먹구름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물방울이 제법 굵은 걸로 보아 한 바탕 쏟아질 것 같았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동장군이 기승 을 부리는 마당이다.
몸이 젖어서 좋은 건 없었다. 강현은 나무 밑에서 피할 수 있는 비구름이 아닌 걸 보곤 걸음을 재촉 했다.
“동굴이라도 찾아야겠군.”
“벌써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얼른 뛰어요!”
쏴아아아!
강현과 김혜림은 산길을 타고 올라 가며 동굴을 찾았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나뭇가지 에 달린 꽃봉오리 아래로 물방울이 타고 흘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찬바람까지 부는 탓에 덮어쓴 로브 안으로도 빗 방울이 튀어 들어왔다.
드러난 손은 물기에 젖어 손가락 끝이 쭈글쭈글해졌고,신발도 젖어 질척거렸다.
기껏 아이더 마을에서 뽀송뽀송해 져서 나왔건만 여행 시작 초반부터 껍껍함에 잠겨야만 했다.
동굴을 찾아 한참 산길을 오르던 중 김혜림이 마침내 계곡 사이에 있 는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이에요! 어후,겨우 찾았네. 얼른 들어가서 불부터 피우죠. 기껏 새 양말 신었는데 다 젖어 버렸네.”
불 피우고 발 말릴 생각에 냅다 동굴로 뛰어가는 김혜림이었다.
한데 김혜림을 따라 동굴로 향하던 중이었다.
동굴 안쪽에서 푸른 불빛이 반짝였 다.
그 섬광을 눈치첸 강현이 급히 김 혜림의 목덜미를 낚아채며 잡아끌었 다.
“온다. 물러나.”
“으엑,갑자기 무슨……
쉬익!
별안간 동굴에서 단검 두 자루가 튀어나왔다.
마나가 담긴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김혜림의 얼굴 앞을 스쳤다.
“휴우,죽을 뻔……
김혜림이 안도의 숨을 뱉었다. 그런데 빗나갔다고 생각한 단검이 별안간 허공에서 방향을 틀며 다시 날아들었다.
강현이 김혜림을 뿌리치고 빙백검 을 쥐었다.
“스킬인가.”
유도 능력을 지닌 스킬임이 분명했 다.
빗나가도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능 력이리라.
피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 힘으로 떨쳐 내야 했다.
유려하게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던 단검에 빙백검을 그어 냈다.
푸른 비늘의 검신이 훑어내듯 궤적 을 그리며 두 자루의 단검을 쳐 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두 번의 마찰이 이루어졌지만,마찰음은 동 시에 울려 퍼졌다.
쨍!
단검에 부여된 마나는 마나유저 상 급 수준이었다.
상당한 위력이었으나 마나 블레어 드 앞에선 짚단이나 마찬가지였다. 단검의 날이 대번에 쪼개지고 바닥 에 내동댕이쳐졌다.
강현은 휘두른 빙백검을 가슴팍으 로 당기며 동굴 안쪽을 주시했다.
“적어도 겨울잠에서 깬 곰은 아니 군.”
대뜸 공격을 한 자가 동굴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걸어 나오는 본새가 영 이 상했다.
어슴푸레 비치는 그림자는 움직일 때마다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윽고 사내 한 명이 모습 을 드러냈다.
옆구리 가득 피가 흥건히 젖어 있 는 부상자였다.
그가 숨을 몰아쉬며 꾸역꾸역 양손 에 단검을 쥐었다.
“하아하아,조직 놈들이 벌써 쫓아 왔나. 집요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