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화
강현 일행은 밤새도록 움직였다.
근처에 마을이 있었지만 찾아가지 않았다.
가까운 마을에 암살자들의 대기 병 력이 있을지도 몰라서였다.
그리고 별이 질 즈음에야 나타난 작은 마을에 허름한 여관이나마 잡 을 수 있었다.
“강현 씨,식사하실 거죠?”
해가 중천에 떴을 즈음 김혜림이 찾아왔다.
강현은 문을 열었다.
건너편에 이쁘게 몸단장을 한 김혜 림이 보였다.
언제나 입던 카키색의 여행복이 아 닌 푸른색 원피스에, 어디서 구했는 지 리본이 달린 브림햇을 쓰고 있었 으며,열은 화장까지 했다.
강현은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말했 다.
“식사는 내 방에서 하지. 3인분 모 두 내 방으로 가져와.”
언제나처럼 할 말만 마치고 문을 닫는데 김혜림이 문틈에 발을 끼워 넣었다.
벌어진 문 틈 사이로 김혜림이 딱 딱한 미소를 보였다.
“뭐 할 말 없어요?”
강현은 김혜림을 스윽 보고는 대답 했다.
“지금 20골드를 갚으려는 건가?”
여객선에서 빚진 20골드였다.
“그거 말고요.”
“못 보던 옷이군.”
“그게 다가 아닐 텐데요?”
볼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모습에서 기어코 한 마디 듣고야 말겠다는 의 지가 전해졌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숙소를 정했 다.
잠을 잘 시간도 없었을 텐데,그새 나가서 꾸미고 온 것이었다.
강현은 형식적으로나마 말했다.
“어울리는군.”
국어책을 읽듯 딱딱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김혜림의 볼
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녀는 꽃봉오리가 피듯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헤헤,얼른 식사 준비하고 올게 요.”
에르델과 함께하게 되면서 괜한 경 쟁심을 불태우는 김혜림이었다. 강현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 다.
강현은 식사를 하기에 앞서 능력치 를 정리해 두고자 했다.
몽발리를 떠난 후로 꽤 시간이 지 났다.
그사이 레벨이 올랐을 것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 보너스 포인트를 올려 두고자 했다.
그런데 상태창이 이상했다.
[최강현 (lv.94)]
(갑옷의 저주 적용 중 : 남은 시간
24시간)
파괴 125
실드 4
회피 76
마나 55
회복 23
보너스 포인트 : 24 보유스킬 : 각성의 서(?),세이덴의 독주머니(S),마나폭검(S),석상 호 걸의 갑옷(S), 쉐도우 리퍼의 외갑 (SS), 명계의 서(?)
모든 능력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 다.
그리고 처음 보는 ‘갑옷의 저주’라 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갑옷의 저주로 스탯이 절반으로 줄 어든 것이다.
갑옷의 저주라면…….
강현은 마스크헬를 거한의 갑옷을 떠올렸다.
‘놈의 갑옷은 저주 능력이 있는 보 구였던가.’ 상태창에 따르면 저주 효과의 남은 시간은 24시간.
하루를 꼬박 절반짜리 스텟인 채로 지내야 했다.
스렛이 절반으로 줄면서 ‘왜곡’과 ‘정제마나’ 스텟이 ‘회피’와 ‘마나’로 돌아왔다.
그나마 파괴는 포인트를 많이 투자 한 터라 '공격’으로 돌아가지 않았 다.
아직 마나유저 상급의 힘은 발휘할 수 있었다.
감소된 스렛도 스텟이지만 저주의 남은 시간 또한 중요했다.
‘놈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저주가 풀리기 전에 습격 하고 싶겠군.’
암살 세력 역시 갑옷의 저주를 알 고 있을 테니,추가병력을 붙일 가 능성이 높았다.
강현은 일단 보너스 포인트를 모두
회피에 투자했다.
다행히 새로 부여한 스렛에는 저주 가 적용되지 않았다.
회피 포인트가 100을 달성하면서 능력치가 다시 왜곡으로 변했다.
[최강현 (lv.94)]
(갑옷의 저주 적용 중 : 남은 시간
24시간)
파괴 125
실드 4
왜곡 100
마나 55
회복 23
보너스 포인트 : 0
보유스킬 : 각성의 서(?),세이덴의
독주머니(S),마나폭검(S), 석상 호 걸의 갑옷(S), 쉐도우 리퍼의 외갑 (SS), 명계의 서(?)
이제는 적들도 대대적인 공격을 쉽 게 감행할 순 없을 거다. 그리되면 주변 이목이 쏠릴 테니.
단일 공격이라면 왜곡 효과만으로 도 7, 8할은 흘려 넘길 수 있다.
그때 김혜림이 식사를 가져왔다.
“강현 씨? 식사 가져왔어요.”
아직도 신이 났는지 목소리 톤이 높았다.
‘일부러 일을 늘릴 필욘 없지.’
강현은 저주에 대한 얘기는 침묵하 기로 했다.
막 습격에서 벗어난 지금,괜히 김 혜림과 에르델에게 불안감을 심어 줄 필요는 없다. 불안감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식사 준비를 마친 김혜림은 에르델 을 데리고 강현의 방에 왔다.
에르델은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 다.
습격도 습격이고,밤을 세우다시피 걸음한 탓이었다.
새 옷을 입은 김혜림과 달리,그녀 는 활동성이 편한 여행복 복장이었 다.
그 때문인지 본래의 미모가 조금은 희석된 모습이었다.
평소 고귀한 수발을 받는 일상과는
거리가 먼 처지였지만 불평은 하지 않았다.
에르델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행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드네 요.”
“조용히 움직이다 보면 더더욱 신 경 쓸 게 많아지지요.”
“그냥 솔직한 감상이에요.”
“평범하게 간다 치면 슈타인 백작 가까지 사홀은 더 걸릴 겁니다.”
“누구 속도 기준이죠?”
“황녀님 속도로 계산했을 때의 소 요 시간입니다.”
말을 타면 좋겠지만,이런 시골에 서는 말을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눈에 띄기도 쉽다.
차라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걸어가 는 게 나았다.
하지만 에르델은 좀 더 시간을 줄 이고 싶은 듯했다.
“강현 씨의 속도에 맞추면 얼마나 걸리죠?”
“이틀이면 갑니다. 하지만 영지에 도착하면 황녀님은 사흘 동안 앓아 눕겠죠.”
옆에서 빵을 오물거리던 김혜림이 한 마디 거들었다.
“이 사람 엄청 빨라요. 평소에는 저도 항상 뛰다시피 걷는다니깐요.”
에르델은 의외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인 사이인데도 그렇게 박하게
구는군요.”
어제 나루터에서 물에 빠뜨린 것까 지 포함하여 하는 말이었다.
김혜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쑥스 러워했다.
“에헤헤,연인 사이는 아녜요. 그냥 함께 다니는 동료죠.”
“아,제가 그만 오해를……. 너무 어울리셔서 분명 연인일 거라고 생 각했었어요.”
“이 사람한테 분홍빛 사고방식 같 은 건 없거든요.”
“그렇군요. 정말 귀엽고 아름다우 신데.”
에르델의 칭찬에 김혜림이 함박미 소를 지었다.
기쁨이 주체가 안 되는지 강현의 무릎을 탁탁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 삭이는 김혜림이었다.
“생각보다 좋은 분이시네요. 경계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경계할 필요 없지.”
“하하하,하긴 그렇죠? 나도 참. 괜히 열 냈네.”
“그래,맹세까지 했으니 나중에 보 수를 잊어먹었다느니 하는 말은 않 겠지.”
그제야 김혜림은 서로 다른 주제로 말했음을 깨달았다.
강현이 말한 경계란 에르델이 배신 하느냐,마느냐를 뜻하는 것이었다.
역시 강현은 강현이다.
“굳이 말하자면 회색빛 사고방식이 네요.”
“뭐가?”
“그냥 혼잣말이에요. 그보다 어떤 놈들이 습격을 한 걸까요?”
드디어 무거운 주제가 튀어나왔다. 아침,아니 아점 밥상에서 툭 던지 듯 나올 말은 아니지만 반드시 논해 야 할 주제였다.
먼저 에르델이 의견을 내놓았다.
“후보는 많죠. 두 공작파는 물론이 고,황제파 내에서도 저를 안 좋게 보는 자들이 있으니까요.”
“황제파 내에서라면?”
“제 위로 두 명의 언니와 오빠가 있어요. 제1계승권자인 루이즈 언니와 제2계승권자인 에덴 오빠죠.”
김혜림이 의문을 표했다.
“황녀님이 더 서열이 낮은 거 아닌 가요? 굳이 이런 수까지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우리에게 계승권 순위는 의미 없 어요. 다음날 아침을 맞을 수 있느 냐 없느냐의 나날을 살아가니까요.”
“으음,결국 모두가 의심스럽다는 거군요.”
한편 강현의 생각은 달랐다.
'두 공작파는 이 습격과 무관할 거
다. 그들의 동기라면 결혼식의 암약 을 숨기고 싶을 뿐이야. 굳이 황녀 제거라는 위험성을 감수하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테지.’
그렇다면 황제파 내의 다른 계승권 자를 의심할 수 있다.
황권 계승의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 서 황녀를 습격할 수도 있는 것이 다.
이뿐만 아니라,강현은 또 다른 용 의세력을 알고 있다.
바로 이세계인 조직이다.
조직은 최진철을 통해 두 공작파의 이간질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황녀가 끼어들면 차질이 라도 생기는 걸까.
황제파든,조직이든 황녀의 결혼식 참석을 꺼리는 것만은 확실하군. 어쩌면 조직에서 한 황제 후계자를 지원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없다.
어쨌든 황녀를 슈타인 백작가로 데 려간다.
그래야만 최진철을 잡을 수 있으니 까.
어느새 모든 그릇이 비워졌다.
식사를 마친 뒤엔 지도를 펼치고 경로를 살폈다.
제국 남서 지방을 유심히 보다가 강현이 말했다.
“황녀님의 걸음속도로 이틀 안에 도착할 방법이 있긴 합니다.”
“제가 사흘 동안 앓아눕지 않아도 되는 방법인가요?”
“힘든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산을 타야 하니까.”
강현은 손가락으로 산등성이 부분 을 짚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바로 슈타인 영 지입니다.”
본래 경로는 산을 우회하기 때문에 사홀을 예상했다.
하지만 산을 건넌다면 바로 슈타인 영지 였다.
걸음속도를 재촉하지 않아도 되지 만 산을 타야 하기 때문에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에르델은 고민 없이 강현의 의견을 택했다.
“해 보죠. 시간을 줄여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루트를 정했으니 이제 출발하는 일
만 남았다.
강현을 비롯한 세 사람은 곧바로 짐을 꾸려 바티치 영지와 슈타인 영 지 사이에 있는 클라임 산으로 향했 다.
*
클라임 산은 생각보다 더욱 험했 다.
예전에 던전이 생겨났던 곳이고 그 후로 몇 년 동안 사람이 오르지 않 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원래 있던 산길에도 잡 초가 무성해서 걸음이 불편했다. 산길에 익숙한 김혜림조차 숨을 헐떡일 정도니 에르델은 말할 것도 없 었다.
강현은 쉬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이 틀거리라고 했던지라 슬슬 휴식 시 간을 가졌다.
“여기서 쉬었다 가지.”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진땀을 흘리 던 두 여자는 진심으로 반색했다. 에르델은 근처 바위에 털썩 주저앉 았고,김혜림은 그나마 기운이 남아 있는지 수통을 꺼내 들었다.
김혜림은 수통을 몇 번 흔들어 보 다가 미간을 좁혔다.
“물 다 마셨네요. 물 좀 떠을게요.”
“가는 김에 옷도 갈아입는 게 좋겠 군.”
그녀는 여전히 원피스 차림이었다. 이왕 새 옷을 산 거 좀 더 입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산을 타기에 는 불편했다.
김혜림도 그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 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요. 엿보려면 눈치채지 못하게 봐 주세요.”
“허물 벗는 걸 굳이 구경할 필요가 있을까.”
“어휴,내가 말을 말아야지.”
김혜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참 떨어진 계곡으로 내려갔다.
먼저 수통을 물속에 담그고 물을
받고 있는데 계곡물 건너편에서 자 갈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그럭! 절그럭!
고개를 들자 마스크헬름을 쓴 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메이스를 어깨에 걸친 채 스 산한 목소리를 뱉었다.
“황녀가 제 발로 떨어져 나왔군.”
금방 이전 여객선에서의 거한임을 기억해 냈다.
에르델이 꾸미지 않고,김혜림은 꽃 단장을 한 탓에 황녀로 착각한 것이 었다.
같은 흑발에 몸집도 비슷한지라 어 둠 속에선 착각할 만도 했다.
김혜림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을 직감하곤 어설프게 웃었다.
“아하하,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
데요.”
그러나 마스크헬름 거한은 메이스 에 마나를 부여하며 짤막한 명령을 내렸다.
“쳐라.”
그와 동시에 뒤편의 수풀이 흔들리 며 무기를 든 자들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