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화
주눅 들기는커녕 되려 공격적인 반 응이 돌아왔다.
황녀의 이름과 자신의 기세가 먹히 지 않는 것에 기사가 주춤거렸다. 그러나 곧 상대를 앞두고 주춤거린 것을 자각하고는 언성을 높이며 무 마하려 했다.
“이놈! 무례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정녕 피를 보고 싶은 게냐!”
기사가 당장이라도 배겠다는 양 검 을 뽑았다.
그러나 강현은 꿈쩍도 안 했다.
밑에서 에르델 황녀로 추정되는 여인 이 움직이는 기색을 눈치채서였다.
에르델 황녀가 망사 너머로 말을 꺼냈다.
“라디스트 경. 그쯤 해 두세요.”
라디스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황녀님. 이자의 무례함을 그냥 넘어갈 순 없습니다.”
“그대는 지금 나를 포함한 호위대 전원을 죽일 생각이신가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려오세요.”
단호한 명령.
머뭇거리던 라디스트는 결국 발판 아래로 내려설 수밖에 없었다.
라디스트가 물러난 자리로 에르델 황녀가 올라와 강현 앞에 다소곳이 섰다.
“빙검의 용병이 명성을 떨치고 있 다 듣긴 했지만 이리 젊을 줄은 몰 탔네요.”
빙검의 용병이란 말에 발판 아래 모여 있던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빙백검의 검신에는 특유의 푸른 비 늘 무늬가 있었는데,그것이 강현의 심볼처럼 된 것이었다.
‘……소문이 마냥 헛된 것만은 아 니었군.’
그리고 그녀의 이런 반응은 사실 강현이 유도한 것이었다.
에르델 황녀가 현명함이 뛰어나다 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강현은 의도적으로 빙백검 의 검신을 내비쳤다.
과연 에르델 황녀는 검신에 새겨진 무늬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어느새 빙검의 용병이란 별 명이 붙어 있을 줄은,자신도 예상 밖이었다.
“촌스러운 별명이군.”
“인정받는 이름일수록 단순한 별명 이 붙게 되죠.”
“혼잣말이었습니다. 실례가 되었다 면 사과드리죠.”
“실례는 이쪽에서 했죠. 절 속 좁 은 사람으로 만들지 마세요.”
에르델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흑발과 대비되는 새하얀 피 부와 자연스럽게 올라간 눈꼬리,그 안에 숨 쉬고 있는 벽안이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여우상의 인상이었는 데,눈웃음만으로도 남자를 홀릴 것 같은 미모였다.
에르델이 모자를 가슴에 안은 채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엘리오스 킨 에르델이라 해요.”
“최강현입니다.”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예정대로 배 에 타도록 하세요.”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에르델은 밑에 있던 기사들에게 명 령을 내렸다.
“타지 못하는 두 명은 후속편을 타 고 오세요.”
기사들은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 지만 별수 없었다.
어찌 황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 겠는가.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 에르델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도로 모자를 썼다.
“후후,서로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하네요.”
강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김혜림과 함께 배 에 올랐다.
1등선답게 탑승객마다 개인 선실이 제공되었다.
갑판 밑에 마련된 개인 선실에 각 자 짐을 풀고는 식사를 해결하기 위 해 선실 밖으로 나왔다.
식사는 연회장에 뷔페식으로 준비 되어 있었다.
강현이 밖으로 나오자 김혜림이 먼 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연회장으로 가며 김혜림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예쁜 황녀님한테 관심 받아서 좋 아요?”
“전혀.”
“아주 살살 녹는 미소를 보내던데 요.”
“나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 둬서 나 쁠 게 없으니까.”
“그 정도 미인인데 아무런 느낌도
안 들었어요?”
“또 바다생물에 비교하길 바라는 건가?”
그제야 김혜림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일희일비하든 말든 강현은 연회장을 향해 걸었다.
연회장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른 탑승객들은 주로 상인들이 많 았다.
연회장 안은 상인들과 그들이 고용 한 호위무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둘은 음식을 담아 빈 테이블에 앉 았다. 그러고는 식사를 시작하는데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그거 들었나? 이 배에 에르델 황 녀님이 탔다더군.”
“으음,황가에서 두 백작가의 결혼 식에 에르델 황녀님을 보낸다더니 사실이었구만.”
“에르델 황녀님은 왕위계승권 제3 순위잖나. 인사 드려서 나쁠 건 없 을 것 같은데.”
“어허,꿈도 꾸지 말게. 황녀님쯤 되는 분이 우릴 만나 주기나 하겠는 가.”
곳곳이 에르델 황녀 이야기로 떠들 썩했다.
강현의 이야기는 조금도 없었다.
에르델 황녀에게 관심이 쏠려 강현 의 존재감을 모르는 것이었다.
강현은 오히려 이 편이 홀가분했 다.
자신에게로 관심이 쏟아지면 성가 시기만 할 뿐이다.
식사를 마치고는 각자 선실로 돌아 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선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황 녀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배에 타기 전 마찰을 일으켰던 기 사,라디스트가 말을 걸어왔다.
“황녀님께서 그쪽을 보고자 하신 다. 따라오라.”
강현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이유는?”
순간,라디스트가 대놓고 불쾌한 표 정을 지었다.
황녀가 호출했건만 이런 거만함이 라니! 대체 뭘 믿고 이리도 뻣뻣하 단 말인가!
황제파도 강현이 마나 마스터의 경 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 해도 그를 불러들인 것은 일국의 황녀다.
황족을 모신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기사들로선,황족의 이름값을 헐값 취급하는 강현이 아니꼬웠다.
“황녀님의 부름을 받는 것만으로도 황송하게 여겨라.”
“강압적으로 끌고 오라는 게 황녀 의 명령이었나?”
단 한 마디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 한 마디로 인해,더 이상 화를
내면 황녀의 성품에까지 흠을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황녀의 명예를 지키려면 꼬리를 내 릴 수밖에 없는 꼴이 된 셈.
“크옥,불러오라는 말만 하셨다.”
“따로 볼일이 있으니 시간이 나면
찾아뵙겠다고 전하도록.”
간단히 찍어 누른 강현이 건조하게 기사들을 지나쳤다. 그 뒤를 김혜림 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뒤통수로 기사들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김혜림이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미운 털이 아주 단단히 박히겠는 데요.”
“황녀는 단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 야.”
“뭘요?”
“내가 황녀에게 접근하려고 배에 탄 건지,아니면 우연히 같이 타게 된 건지.”
하지만 이로써 알게 되었을 거다.
강현이 우연히 같은 배에 탔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면 에르델 황녀도 나름대로 동선을 정할 터다.
먼저 자신을 굽혀서라도 찾아올지, 아니면 아예 강현에게서 관심을 끊 을지.
강현으로선 그녀의 반응을 보고 움 직여도 늦지 않았다.
‘서로 좋은 여행인가……. 그랬으 면 좋겠군.’
그사이 여객선은 슈타인 영지를 향 해 운항을 시작했다.
*
1등선은 망망대해,아니 망망대하 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강 위를 미 끄러지듯 이동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주위가 모두 컴컴해졌다.
강현은 촛대에 양초를 끼우고 불을 붙였다.
은은한 촛불빛이 선실을 밝히는 가 운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 요?”
가녀린 목소리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르델 황녀였다.
‘이리 나왔나.’
아까도 생각했었지만 황녀 쪽에선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황녀가 직접 강현을 찾아오거나, 강현에게 관심을 끄거나.
황녀는 전자를 택했고,그중에도 타인의 시선이 뜸한 밤중을 택했다. 문을 열자 망사 달린 모자를 쓴 황녀가 서 있었다.
기사들은 대동하지 않았다.
기사들조차 모르게 빠져나온 것이 리라.
“들어오시죠.”
에르델 황녀가 방 안에 들어서자, 강현은 문을 닫으며 테이블 옆의 의 자를 권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가운데 그녀가 모자를 벗고 벽안을 드러냈다.
“호출은 무시하더니,직접 찾아오 니까 바로 들여보내 주는군요.”
“외간 남자의 방에 불쑥 찾아온 분 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요.”
“아무 남자나 막 찾아오진 않는답 니다.”
“그래야지요. 제국의 황녀이시니
말입니다.”
혀는 검보다 날카롭다. 짧은 순간 에도 몇 번이나 공방이 오갔다.
에르델이 흥미로운 눈길로 강현을 보았다.
“솔직히 말하죠. 황제파에서도 최 강현 씨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어 요.”
“기사직 제안이라도 하실 겁니까?”
“이쪽으로선 강현 씨가 중립을 유 지하면 좋고,가담하면 더 좋죠.”
“제가 두 공작파의 제안을 거절했 다는 건 아실 겁니다.”
“네,그리고 최진철이란 사람을 찾 고 있다는 것도 알죠. 그 사람,지 금 슈타인 백작가에 있는 거죠?”
강현이 에르델 황녀와 별개로 슈타 인 백작가로 가고 있다는 건 증명되 었다.
단지 그 사실만으로 강현의 목적지 를 읽어 낸 에르델 황녀였다.
하나 강현 역시 그녀가 여기까지 읽어 내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으실 것 같 습니다만.”
“이쪽은 결혼식 때까지 슈타인 백 작가에서 머무를 거예요. 내 호위기 사로서 함께 들어가지 않겠어요?”
“잠입할 수 있게 길을 터 주시겠 다?”
“이해가 빨라서 좋네요.”
슈타인 백작가에 잠입하는 신분으
로서 빙검의 용병과 황녀의 호위기 사는 그 효용성이 명백히 달랐다.
빙검의 용병이라는 타이틀을 앞세 운다면 불필요한 날파리들이 붙는 다.
슈타인 백작은 물론,여러 귀족들 이 강현을 섭외하려 들거나 호감을 쌓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에르델 황녀의 호위기사라 면 다르다.
잠입의 수월함은 물론이고,황실의 비호를 명분 삼아 저택 내를 어려움 없이 드나들 수 있다.
'분명 좋은 제안이긴 하군.’
하지만 강현은 단호하게 고개 저었 다.
“거절하겠습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 계약기 간은 이번 일까지 만이에요. 결혼식 이 끝날 때까지만 손을 잡도록 하죠.”
“저와 손을 잡을 경우 황녀님께서 얻는 이득은 뭡니까?”
강현이 직접적인 물음에,에르델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거래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알려 줘야겠죠? 이 결혼식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준비되었어요. 두 공작 파가 손을 잡는 일이니 하루아침에 이루어졌을 리 없죠. 하지만 여태까 지 대립해 온 두 공작파가,그들의 핵심 세력 간의 결혼식만으로 화해 할 수 있을까요?”
결혼식 밑에는 숨겨진 암약이 있 다.
그건 강현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의아해하 는 반응을 보였다.
“결혼식은 빌미일 뿐 숨겨진 약속 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어요. 강현 씨가 최진철의 수색을 겸해 그 숨겨진 조약까지 함께 알아 봐 주면 좋겠어요.”
“어째서 제 손을 빌리려는 겁니 까?”
“제가 마음껏 돌아다니도록 슈타인 백작이 놔둘 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강현 씨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목적은 다르지만,무대는 같았다.
잠시 동안 둘 사이 침묵이 감돌았 다.
에르델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이는 강현에게도 해가 될 거래가 아니다.
반드시 좋은 대답이 돌아올 것이었 다.
그런데 강현이 예상과 완전히 다른 대답을 뱉었다.
“그래도 거절하겠습니다.”
에르델 황녀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제안 이상으로 서로에게 윈윈 이 되는 제안은 없었다.
그런데 거절한다고?
에르델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제가 잘못 들은……
헌데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 에 바깥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황녀를 찾아라! 황녀를 베는 자에 겐 특별 포상금을 내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