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화
“사람 잘못 본 것 같군.”
성가신 예감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 다.
하지만 기사들이 앞길을 막았다.
갈색 콧수염 사내가 말에서 내리고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난 빌토르 제2기사단 단장 프라임 일세. 위협을 하려고 찾아온 게 아 니니 마음 풀게나.”
강현이 부정했음에도 제 할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용모를 알고 접근한 것이다.
빌토르 백작가에는 제5기사단까지 있었는데 제2순위라면 기사단 내에서 두 번째 가는 실력자란 소리다. 그만한 인물이 직접 찾아온 것이 다.
분명 예삿일로 접촉한 것은 아니리 라.
강현은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용건은?”
차가운 반응에 기사들이 인상을 찌 푸렸다.
저희들의 단장이 저토록 정중히 나 섰다.
무려 빌토르 백작가의 프라임 기사 단장이 말이다.
한데 일개 용병 따위가 이리도 뻣 뻣하게 굴다니!
프라임이 그 분위기를 읽어 내곤 기사들을 강하게 쏘아보았다.
‘경솔하게 굴지 마라.’
기사들에게 무언의 주의를 준 프라 임이 다시 말했다.
“길거리에서 나눌 만한 이야기가 아닐세. 자리를 옮기지 않겠는가?”
“꺼림칙한 이야기인 모양이군.”
“그건 아닐세.”
“그럼 말 못할 이유가 없겠지.”
“크흐 ”
고작 말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이지 만 프라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 다.
보통은 빌토르 백작가의 이름만으 로도 상대는 주눅 들고는 했다.
더욱이 뒤편에는 자신을 따르는 기 사들까지 함께 있었다.
한데도 강현은 흔들림이 없었다.
‘게다가 늘어뜨린 손 위치,그리고 저 발 모양새……
언제든 발검을 할 수 있는 자세다.
한데 그조차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신이 아니고선 간파하지 못할 둣 했다.
프라임은 숨을 길게 내뱉고 되도록 낮은 목소리로 용건을 말했다.
“자네에게 기사직을 제안하기 위해 왔다네. 마나 마스터인 만큼 섭섭잖 은 대우를 약속하지.”
접근한 의도가 뭔가 했더니 기사단 영입 제안이었다.
한데…….
‘내가 마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까지 알고 있다.’
강현이 마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은 바로 얼마 전, 베이커 영지의 웨이브 공략 당시였다.
그때 마나 블레이드를 펼쳤던 것을 부상자들이 베이커 자작에게 전한 모양이었다.
베이커 자작은 뒷배로 케이델 공작 가를 두고 있었다.
순간,머릿속에서 저편의 사정들이 그려졌다.
'베이커 자작이 케이델 공작에게 밀고를 올렸군. 그리고 그 밀고를 통해 케이델 공작이 섭외를 명령했을 것이고……
그 명령을 하달 받은 것이 눈앞의 빌토르 백작가였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 가능한 일 이었다.
‘루카스 척살을 숨겨 준 건 이걸 위함이었나.’
제국은 황제파,드리안 공작파,케 이델 공작파의 3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그 3대 세력은 서로서로 첩자를 심어 놓았다.
강현이 마나 마스터에 올랐다는 사 실을 케이델 공작이 알았다면,곧 드리안 공작파와 황제파도 강현의 존재를 알아차릴 터.
그 다른 세력들이 알아채기 전에 케이델 공작파가 나선 것이다. 강현이라는,새로운 마나 마스터를 섭외하기 위해.
‘마나 마스터……. 날 제외하고 열 명 정도 있었던가.’
현재 제국엔 열 명의 마나 마스터 가 있었다.
그중 왕실 기사단이 4명,드리안 공작가에 3명,케이델 공작가에 3명 이 소속되어 있었다.
강현은 제국 귀족서 개정판에 실려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황제파가 두 공작파에 비해 마나 마스터가 한 명 많았다.
케이델 공작은 그 한 명의 약세를
보완하려고 강현을 섭외하려는 듯했 다.
마나 마스터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제국을 통틀어 10명밖에 되지 않 는다는 머릿수만으로도 그 가치를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나 마스터 한 명을 두더라도 무 력의 척도가 뒤바뀌니,무슨 짓을 해서라도 강현을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기사단에는 관심 없어.”
“단호하군. 조건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돈이라면 충분해.”
“물론 자네는 평균 연봉의 2배를
준비해 두었네. 그리고 그 외에도 자네 개인부대의 창설 권한을 주겠 네. 별동대로서 부대 내의 인사권과 활동권도 최대한 보장하지. 신임 기 사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조건이 아닌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파격적인 정도가 아니다. 대기업으로 치면 신입사원에게 부 서 하나를 마음대로 만들 권한과 부 서 내의 인사권,부서 활동 영역까 지 전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 을 주는 셈이다.
그러나 강현은 한 치의 고민도 없 이 몸을 돌렸다.
“필요 없는 것만 잔뜩 모아 왔군.”
프라임으로선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설마 이처럼 바로 거절당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이미 강현보다 먼저 경지에 오른
10인의 마나 마스터들보다도 좋은 조건이다.
그 상당한 조건을 거절하다니.
그것도 일고의 재고 없이 말이다.
프라임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 다. 빌토르 백작의 명은 지엄했다.
“잠깐. 이 조건으로 안 된다면 원 하는 것을 말하게나. 내 최대한 조 건을 맞출 것을 약속하지.”
강현이 서슴없이 말했다.
“그쪽이 물러나 주는 것.”
기사들의 어깨너머로 김혜림이 서
성이는 게 보였다.
숙소를 잡고 왔는데 기사들이 가로 막고 있어 끼어들지 말지 고민하는 듯했다.
강현은 기사들이 길을 열 기색이 없자 빙백검에 손을 올렸다.
“비키지 않는다면 사슴의 뿔을 꺾 겠다.”
기사들의 제복 가슴팍에 사슴뿔 문 양이 새겨져 있었다.
강현의 검에 베인다면 목숨이 무사 하지 못할 터.
더불어 빌토르 백작가, 나아가 제 국 3대 세력인 케이델 공작가와 척 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 미도 있었다.
공격적인 몸짓에 기사들도 반격을 준비하며 프라임을 보았다.
프라임은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말을 꺼냈다.
“길을 터 주게.”
기사들이 못마땅해하며 한옆으로 물러났다.
강현은 열린 길을 통해 김혜림과 합류했다.
“누구예요?”
“빌토르 기사단.”
“분위기가 무시무시하던데…… 무 슨 문제 생긴 건 아니죠?”
“기사단 입단을 제안하더군.”
“빌토르 기사단에서요? 설마 거절 했어요?”
“득 볼 게 없어.”
김혜림은 충분히 납득했다.
강현의 목적은 최진철을 찾는 것이 다.
귀족가의 기사단에 들면 아무리 자 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대도 어떻게든 귀족가의 잣대가 따라붙게 된다. 게 다가 각종 행사의 참석을 강요당할 거다.
지금의 강현에게 기사직은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김혜림은 슬쩍 뒤를 보았다.
기사들을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자 신들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것 같진 않네요.”
“경고는 충분히 해 뒀어.”
“세상에는 경고를 껌으로 아는 귀 족들이 많잖아요.”
“검으로 처리하면 그만이야.”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런가 싶더니 김혜림이 고개를 갸 웃거렸다.
“지금 말장난한 거죠?”
“전혀.”
“품,껌으로 검으로래.”
뭐가 그리 재밌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는 김혜림이었다. 강현으로선 핀잔을 줄 생각조차 들 지 않았다.
보면 볼수록 괴팍한 성격이라는 생 각만 들뿐.
그래서 혼자 웃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김혜림은 숙소를 잡을 땐 항상 1 인실 두 개를 잡고는 했다.
당연한 조치다.
오늘 역시 1인실 두 개에 각각 들 어가 휴식을 취했다.
강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상태창을 확인했다.
[최강현 (lv.92)]
파괴 : 203
실드 : 9
왜곡 : 152
정제마나 : 111
회복 : 46
보너스 포인트 : 48
보유스킬 : 각성의 서(?),세이덴의 독주머니(S),마나폭검(S),석상 호 걸의 갑옷(S),쉐도우 리퍼의 외갑 (SS), 명계의 서(?)
울라임 숲에서 나왔을 때 이미 레 벨88에 경험치는 90퍼센트였다.
지난 열흘 동안 명계의 서가 적용 되어 시간당 1퍼센트씩 오른 덕에 4레벨이 올라 있었다.
아이로스의 팔찌 덕분에 6포인트, 아나리스의 가호 덕분에 추가로 6포인트.
1레벨당 보너스포인트 12씩 얻었 기에 총 48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강현은 기로에 섰다.
‘파괴를 좀 더 올리느냐,실드에
투자하느냐인데..:
스렛이 300을 돌파하면 2차 각성 을 한다.
공격 스렛의 1차 각성이 파괴이니 2차 각성은 더욱 강력할 터.
한편 실드 스텟을 1차 각성시키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실드 스렛의 1차 각성은 무려 반 사 능력이다.
셀로리아의 반지에 의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반사 능력을 각성시키는 것도 좋았다.
잠깐 고민하던 강현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공격에 힘을 싣는 게 좋겠군. 아 직 왜곡과 반지,소환석으로도 방어 쪽은 충분해.’
강현은 모조리 파괴에 스텟을 투자 했다.
선 공격 투자,후 방어 투자로 가 기로 정했다.
어차피 앞으로는 가만히 있어도 보 너스 포인트가 쌓일 테니 포인트 걱 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최강현 (lv.92)]
파괴 : 251
실드 : 9
왜곡 : 152
정제마나 : 111
회복 : 46
보너스 포인트 : 0
보유스킬 : 각성의 서(?),세이덴의 독주머니 (S), 마나폭검 (S),석상 호 걸의 갑옷(S), 쉐도우 리퍼의 외갑 (SS), 명계의 서(?)
스텟 부여를 마친 뒤엔 휴식을 취 하려 했다.
한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 다.
똑똑.
적어도 김혜림은 아니다. 그 여자
는 지금 씻는 중일 테고 한 번 씻 기 시작하면 한 시간은 걸리니까. 그렇다면 소식 없는 불청객일 터. 강현은 침묵했다. 굳이 대답할 필 요가 없었다.
그러자 바깥에서 다소 굵직한 소리 가 들려왔다.
“안에 있는 거 알고 왔네,최강현 군. 드리안 공작님을 섬기는 철갑기 마대 부대장 겔로그라고 하네. 잠시 대화를 했으면 하는데?”
이번에는 드리안 공작가에서 사람 이 왔다.
드리안 공작파에서도 열한 번째 마 나 마스터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었 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반응이다. 목적은 물을 것도 없었다.
강현은 빙백검을 허리춤에 단 채로 문에 다가섰다.
“그쪽도 같은 소리를 하러 왔나.”
강현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빌토르 기사단과의 일 또한 목격했을 터다. 그렇다면 긴말할 필요 없다.
강현이 케이델 공작파의 제안을 받 았다는 건 알고 있을 터.
“우린 더 좋은 제안을 들고 왔네. 문을 열어 주겠나?”
짐작대로의 반응이 돌아왔다.
케이델 공작파의 카드를 확인하려 고 지금껏 가만있었던 모양이었다. 강현이 케이델 공작파의 카드를 거절하자마자 더 좋은 조건을 준비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조건이라도 강현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절하지.”
“그럼 읽기라도 해 주게나. 생각이 있다면 푸른잎 여관으로 연락을 주 게.”
문지방 틈으로 종이 한 장이 밀려 들어왔다.
드리안 공작파의 제안 내용이었다.
케이델 공작파가 경솔하게 말로 전 한 것을 답습하여 미리 제안서를 준 비한 것이었다.
강현은 종이를 주워 들었다.
[3년만 드리안 공작가의 기사로 활 동해 주면 귀족 작위를 얻을 수 있 게 해 주겠네. 빈말이 아니라 기사 서약 전에 공작님이 직접 서면으로 약속을 해 주실 걸세. 이세계인이 귀족 작위를 받은 적은 없지만 케이 델 공작님깬 그만한 힘이 있으시네. 잘 고려해 보게나.]
귀족 작위.
분명 케이델 공작파의 조건보다 훨 씬 더 파격적이다.
이만한 조건이면 이미 다른 마나 마스터들보다 몇 배나 더 높은 대우 다.
하지만 알고나 있는 걸까?
이는 기존의 마나 마스터들의 불만 을 이끌어 낼 뿐인 제안이었다.
‘세력 불리기에 급급해서 생각이 짧아졌군. 아니면 딱 3년만 이용하 고 버릴 생각이거나.’
어느 쪽이든 드리안 공작파에 인상 만 나빠지는 제안이었다.
후에 기사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드리안 공작파에 가담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종이는 챙겨 두었다.
저희들이야 보안을 위해 서면을 준 비해 둔 거겠지만 차라리 구전으로 전하는 게 나았다.
서면은 이처럼 증거가 남고 만다.
즉,저희들 손으로 강현에게 카드
를 바친 바나 마찬가지다.
종이를 챙겨 두자 문고리를 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철컥.
어느 바보가 함부로 들어오려나 싶 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 씨. 문 열어요.”
“할 말이라도 있나?”
“일단 문이나 열어 줘요. 복도 춥
단 말이에요.”
문을 열자 반팔,반바지 차림의 김 혜림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고 몸 주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걸로 보아 막 목욕을 마친 것 같았다.
김혜림이 안으로 들어오며 젖은 머
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아까 문 앞에 누가 있던 것 같은 데 누구였어요?”
“그걸 물으려고 왔나?”
“저도 알아야 조심을 하죠.”
“드리안 공작가에서 제의가 왔다.”
“이번엔 드리안 공작파군요. 대답 은 물어볼 것도 없겠네요.”
강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 다.
“제가 목욕하면서 생각해 봤는데 어느 쪽이든 들어가서 그쪽 정보망 을 이용하는 건 어때요? 둘 다 제 국 3대 세력이니까 정보망이 잘되어 있을 것 같은데.”
강현은 다시 문을 열었다.
“복도에서 머리 좀 더 식히는 게 좋겠군.”
“칫,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두 세력의 정보망은 나쁘지 않다.
베이커 자작령을 떠난 지 얼마 지 나지 않았는데도 강현의 위치를 잡 아 낼 정도니까.
그래도 기사직을 받아들이는 건…….
그 순간,뇌리에 한 줄기 생각이 스쳐 갔다.
“그거 나쁘지 않군.”
시무룩한 표정으로 문을 지나던 김 혜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 제안을 받아들이게요?”
“그럴 리가.”
“그럼요?”
강현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세력을 정보 창구로 이용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