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
강현과 김혜림은 어두운 벌판을 가 로질러 웨이브 보석으로 향했다. 위치로 보아 마을 쪽에서 웨이브가 일어난 듯했다.
두 사람은 수확을 마친 밀밭 사이 를 달렸다.
드러누운 지푸라기 더미를 밟으며 나아가던 중 김혜림이 물었다.
“이번에도 방침을 정해 두죠. 전 예전처럼 레벨업 중심으로 움직이려 해요. 강현 씨는요?”
“베이커 기사단과의 접촉.”
“정보를 얻기 위함이죠?”
“그래.”
“그 과정에서 충돌 가능성은요?”
“분명 일어나겠지.”
“일단 물어보겠는데 최진철이란 사 람과 기사와의 관계는 어떻게 돼 요?”
김혜림의 입장에선 기사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베이커 가의 기사인데 무작 정 검을 들이미는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럴 경우 강현의 움직임에 혼선을 가져올 수도 있다.
찾고 있는 자가 적이라는 걸 확실 히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강현은 단편적이나마 얘기를 해 주 었다.
“어떤 조직이 있고,그 조직원이 베이커 자작가의 기사단에 잠입해 있다. 놈의 목적은 웨이브 공략 실 패인 듯해.”
“그랬군요.”
김혜림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강현이 의외란 기색을 드러냈다.
“의외군. 좀 더 궁금해할 거라 여 겼는데.”
“오!”
“음?”
“강현 씨가 제 반응에 신경 쓰기는 처음이네요.”
“그럴 만했으니까.”
“사실은 그 조직에 관해 저도 조금 정보가 있어요.”
달리던 강현이 속도를 늦췄다.
생각지도 않던 곳에서 정보원이 있 던 셈이었다.
강현은 김혜림을 똑바로 바라보았 다.
담담한 표정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홀러나왔다.
“말해 봐.”
“후후,좀 더 정중하게 부탁하면 생각해 볼게요.”
김혜림의 표정이 우줄해졌다. 처음으로 강현을 휘어잡을 건수가 생긴 것에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강현은 한심하단 눈으로 김혜림을 보다가 한 마디 날렸다.
“대단한 건 아닌가 보군.”
“강현 씨에겐 필요한 정보일 수도 있죠. 들어서 나쁠 건 없을 걸요.”
“네가 얻을 수 있는 정보라면 나도 얻을 수 있겠지.”
“그건 절대 무리죠.”
“부정하는 걸 보니 정곡을 찔렀
군.”
“우씨,아닌데……
“말해 봐. 들어 보고 판단하지.”
“에휴,강현 씨랑 협상하려 한 내
가 바보지. 한참 전의 예전 일이에 요. 제가 짐을 도둑맞고 방황할 때 모르는 사람이 찾아왔었어요.”
“무슨 일로?”
“이세계인이 현지인보다 더 우월하 다면서 이리 사는 게 억울하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한테 협력하면 스킬북을 주겠다고 했었어 요. 뭐라더라 무슨 남자를 유혹하는 거라던가?”
남자를 유혹하는 스킬북이란 말에 바로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강현은 즉시 그 스킬북의 정체를 알아챘다.
“매료인가.”
“어? 어떻게 알았어요?”
“결국 제안을 받았다는 게 끝이 군.”
“그 사람이 조직원인지 아닌지는 모르잖아요. 들어 보니 조직이란 곳 과 제게 제안을 한 자의 의도가 비 숫해서 해 본 말이에요.”
의문점 하나가 풀렸다.
어떻게 이하나가 조직에 가담했나 했더니,단순히 방황하는 그녀에게 조직이 접근해 왔을 뿐이었다. 그리 고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최진 철의 행방을 알게 된 것이고 말이 다.
조직은 밑바닥을 기는 이세계인에 게 우월주의를 자극하여 끄나풀로 활용하는 듯했다.
강현은 김혜림이 조직의 제안을 거 절한 것을 의외라 여겼다.
“용케도 받아들이지 않았군.”
보통은 힘든 생활고에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적응되지 않는 환경과 향수병,삭
막한 인간관계.
심신이 메말라 가는 와중에 스킬북 을 준다 하면 열에 아홉은 받아들일 거다.
그러나 김혜림은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았다.
“전 죽어도 환경 탓만큼은 하고 싶 지 않거든요.”
김혜림의 눈동자에 애잔함이 깃들 었다.
원래 세계에서 보냈던 삶을 떠올리 는 것이리라.
그녀에게 있어 환경 탓을 한다는 건 일평생을 일만 하며 살아간 그녀 의 부모님 탓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차라리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할지 언정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김혜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면 이하나가 발데르에 있을 일도 없 었을 거고,최진철에 관한 단서도 얻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베킨스 던전에서 강현과 만 나지도 못했을 거고 말이다.
인연이라는 건 사소한 선택만으로 도 쉽게 바뀌는 듯했다.
강현은 도로 고개를 앞으로 향하며 말했다.
“좋은 자세로군.”
“웬일로 칭찬을 다 하신데.”
“슬슬 앞이나 보도록. 마을이다.”
어느덧 벌판을 지나 마을이 나타났
다.
마을 주민들은 웨이브 공략 실패를 대비하여 부랴부랴 피난 중이었다.
“엄마,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뒤 보지 말고 얼른 가. 당분간 마 을 바깥에 있자꾸나.”
“어서 서둘러! 공략 실패하면 모두 다 죽는다고!”
강현과 김혜림은 밀려드는 인파 사 이를 역주행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 광장에 이르렀 을 때였다.
광장 중심에서 팔각형 모양의 거대 한 붉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이 20미터짜리 보석은 밑면이 뾰족한 데도 불구하고 수직으로 서 있었고,그 주변을 베이커 자작가의 문양을 단 병사들이 에워싼 채 경비 를 서고 있었다.
김혜림은 광장에 들어서기 앞서 걱 정하는 기색을 비쳤다.
“이대로 들어가도 돼요? 지명수배 가 여기까지 퍼져 있으면 제 발로 잡혀 들어가는 꼴이에요.”
발데르 자작가가 아직 지명수배를 거두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김혜림은 베이커 자작령까지 수배 지가 전달되었을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강현은 단호하게 그 가능성을 일축 했다.
“아까 지나올 때 마을 게시판을 봐
놨어. 수배지는 없었지.”
“그 난리통에 그게 보였어요?”
“반드시 확인해야 할 부분이었으니 까.”
대화를 마친 강현과 김혜림은 광장 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다가서자 병사들이 창을 겨누며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기본적으로 웨이브나 던전의 관리 는 해당 영지에서 맡았다.
“어디의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올롬보르에서 베킨스 던전을 공략 한 최강현이라 합니다. 근처를 지나 다가 웨이브 소식을 듣고 참가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강현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영지 입장에서는 공략을 못할 경우 땅덩이를 잃게 되니 실력이 입증된 자의 지원을 매우 반기는 편이었다. SS랭크 던전을 공략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면 충분히 안으로 들여보내 줄 것이었다.
강현은 검 손잡이를 살짝 밀어 푸 른 검신을 보여 주었다.
베킨스 던전을 공략한 푸른 검신의 용병.
이 정도만 하면 어느 정도 알아들 겠지.
하지만 병사들은 강현을 알아보지 못했다.
“올롬보르의 베킨스 던전? 거기 던 전이 공략되었나?”
베킨스 던전이 공략된 사실도 모르 다니.
소식이 늦어도 한참 늦은 영지인 것 같았다.
때마침 곁을 지나치던 중년 사내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더냐?”
“아,베이커 자작님. 이자가 웨이브 공략에 지원을 했습니다. 올롬보르 시의 베킨스 던전을 공략했다고 합 니다만,어떻게 할까요?”
“올롬보르 시의 베킨스 던전이라. 얼마 전에 들어 본 것 같은 기억 이……
옷차림이 제법 고급스럽다 싶었는 데 그가 바로 베이커 자작이었다.
제국 귀족서에는 다소 강직한 성격 으로 기록돼 있던 자였다.
다행이 베이커 자작은 강현의 소식 을 접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베이커 자작은 한동안 강현을 주시 하다 차가운 인상과 푸른 검신을 보 곤 마침내 소문을 떠올려 냈다.
“아,혹시 SS랭크 던전을 단독으로 돌파했다는 자인가?”
표정이 밝아지는 것으로 보아 강현 의 실력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김혜림이 '나도 같이 돌파 했는데…….’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말은 가볍게 묻혀 버렸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웨이브 공략에 지원하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확인차 물어보는 거네만 레벨이 어떻게 되나?”
현재 레벨은 87이지만 김혜림에게 밝혔던 레벨로 대답했다.
“67입니다.”
“오오,레벨이 상당하군. 안 그래도 인력이 부족한 참이었는데 잘됐어. 지금 상황이 급박하니 어서 공략을 도와주게나. 보상은 공략 후에 논하 세.”
“상관없습니다.”
“웨이브 안에는 우리 가문의 기사
15명이 먼저 들어가 있네. 그들과 합류하면 된다네.”
병력이 든든한 영지로 알고 있는데
기사들만 들어가 있다 한다.
강현은 웨이브에 제한이 있음을 직 감했다.
“인원제한이 있습니까?”
“보석 하단에 최대인원 25명이라
적혀 있더군. 혹시 몰라 입장 인원 수를 조정하였는데 올바른 판단이었 던 셈이지. 거기 자네,대책본부로 가서 우리 가문의 브로치를 가져오 게.”
베이커 자작의 명령에 한 병사가 금박 브로치를 가져왔다.
그는 강현과 김혜림에게 각각 브로 치를 건네며 말했다.
“입장 허가를 증명하는 브로치일 세. 기사들에게 보여 주면 합류할 수 있을 것이네. 영지의 안위가 달 린 일이니 잘 부탁함세.”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팍에 브로치를 달았다.
김혜림도 준비를 마치고 곧바로 입 장 준비를 했다.
웨이브 입장 방법은 단순했다.
보석 하단에 손을 대고 빨려들어 가는 이미지를 그리면 되었다.
각자 웨이브 보석에 손을 얹고 머 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리자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시야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안쪽으로 빨려들어 가는 느 낌이 든다 싶더니 이내 시야가 복구 되었다.
강현은 시야가 맑아지자마자 손으
로 눈가를 가렸다.
햇살이 너무 강렬해서였다.
‘웨이브 안쪽은 별개의 세상이라더 니 정말이었군.’
분명 바깥에선 밤중이었는데 웨이 브에 들어오니 완전한 대낮이었다. 하늘은 진짜 하늘이라고 여겨질 정 도로 푸르렸고 구름까지 떠다녔다. 푸른 하늘 아래로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숲 입구에 서 있는 표지판에 대륙 공용어가 적혀 있었다.
[울라임 숲(S랭크)]
[제한시간 : 48시간]
[숲에 있는 몬스터 사냥시 사냥 포
인트가 오릅니다. 사냥 포인트 30, 000을 달성하면 던전 보스가 나 타납니다. 제한시간 안에 던전 보스 를 잡지 못하면 공략 실패입니다. 1 시간 간격으로 개별 포인트가 최하 인 자에게 사신이 붙으니 주의하십 시오. 최하인 자가 다수일 경우 무 작위로 사신이 한 명을 지정하여 붙 게 됩니다.]
[-소형 몬스터 : 1마리 당 10포인 트]
[-중형 몬스터 : 1마리 당 50포인 트]
[-대형 몬스터 : 1마리 당 100포 인트]
[-? : 1마리 당 1, 000포인트]
[-사신 : 1마리 당 3, 000포인트]
S랭크 이하는 사냥이 주된 공략법 이라고 하는데 그에 들어맞는 공략 법이었다.
사냥을 통해 30, 000포인트를 달성 하면 되는 조건이란 뜻이다.
강현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저게 사냥 포인트를 알리는 거겠 군.”
하늘에는 커다란 유리구슬이 떠 있 었다.
유리구슬에는 ‘220/30, 000’이란 숫 자가 떠 있었는데 아마도 사냥 포인 트의 현황을 알려 주는 것 같았다. ‘220’이란 수치는 이미 들어와 있는 베이커 자작가의 기사들이 쌓은 포인트이리라.
그때 옆에 있던 김혜림이 표지판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신이라는 거랑 개별 포인트 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총합 사냥 포인트 외로,공략자마 다 개별 사냥 포인트를 집계하는 거 겠지. 제일 낮은 사람에게 사신이란 게 붙는 모양이고.”
사신이란 이름만으로도 영 좋지 않 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개별 사냥 포인트가 최하위인 자에 겐 사신이란 페널티가 붙는다는 뜻 이리라.
김혜림도 그 부분은 납득한 듯했
다.
“대충 그렇겠네요. 그럼 물음표가 문제인데……
강현으로서도 마리당 1, 000포인트 를 주는 ? 항목은 신경 쓰이는 부 분이었다.
하지만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단서가 없는 지금 지나친 고민은 시간낭비다. 공략을 하다 보면 알 수 있겠지.
S랭크 웨이브인 만큼,SS랭크와 같 이 숨겨진 공략법은 없을 터.
사냥이 주된 공략법이란 걸 안 것 으로 충분하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넋 놓고 있을 시간 없어. 일단 개
별 사냥 포인트를 쌓아 둬야 해. 지 금 시점에선 우리가 가장 낮은 점수 일 테니.”
이제 막 들어왔으므로 둘 다 개별 사냥 포인트가 1점도 없었다.
사신이 나타나는 시점은 두 사람이 들어온 시점으로부터 1시간이 아닌, 공략 시작으로부터 1시간 단위다.
언제부터 공략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는 지금,언제 1시간째가 될지 도 몰랐다.
어쩌면 채 5분을 남겨 두지 않았 을지도 모를 일.
시작하자마자 사신이라는 것과 마 주쳐서 좋을 건 없었다.
“당장은 사냥부터 해야겠군.”
“그래야겠네요.”
강현과 김혜림은 몬스터 사냥을 최 우선으로 두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숲 속을 달리며 마주치는 몬 스터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한편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새로 운 무리가 들어섰다.
새로 들어온 무리 중심에는 루카스 가 있었다.
강현을 추격하던 루카스는 그가 웨 이브 공략에 참여했음을 알았다. 그는 베이커 자작에게 사정을 설명 하고 곧바로 기사들과 함께 들어온 참이었다.
루카스는 오로지 강현을 쫓는 것에
만 혈안이 되어 공략법 등에는 눈길 조차 주지 않았다.
“당장 최강현을 찾아라! 가장 먼저 놈을 찾아낸 자에겐 포상을 내리겠 다!”
기사들은 웨이브의 위험성을 알기 에 조언을 올렸다.
“도련님,저기 표지판이 있습니다. 공략법인 듯하니 숙지한 다음 움직 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략이나 하러 온 줄 아느냐! 몬스터 따윈 만나는 족족 베어 버리면 그만인 것을!”
“A랭크 수준의 웨이브라면 문제 없을 테지만 무려 S랭크입니다. 쉽 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시끄럽……
성질을 내던 루카스가 문득 말을 멈췄다.
눈썹이 휘어질 정도로 찌그러져 있 던 얼굴에는 당혹감이 들어찼다.
루카스의 시선은 기사들의 뒤편에 머물러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기사들도 뒤를 돌 아보았다.
그 순간,기사들의 표정도 루카스 처럼 당혹으로 물들었다.
“저,저건 뭐야!”
기사들의 뒤편에선 거대한 낫을 들 고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해골이 허 공중에 떠 있었다.
그중 한 기사가 눈이 마주치는 순
간,검은 망토의 해골이 거대한 낫 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