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여자라…….
“더 자세히 말해 봐.”
희망이 보이면 사람은 맹목적으로 그 길을 쫓기 마련이다.
괴한은 잘하면 살 수도 있겠다 여 겼는지 필사적으로 단서를 떠올려 냈다.
절박함에 존댓말까지 하는 괴인이 었다.
“그 외에는…… 분 냄새가 아주 강 하게 났었습니다.”
어쨌거나 분 냄새는 아주 중요한 단서였다.
가이아 대륙에서 화장을 하는 신분
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더욱 바짝 빙백검을 붙였다.
정보는 짜낼수록 순도가 높아지는
법이다.
더 숨기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볼 요량으로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아무 말이나 막 뱉으면 살 수 있 다고 생각하나?”
“저,정말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요.”
“더 숨기는 게 있을 텐데?”
“진짜로 모릅니다. 그냥 사람 하나
만 죽이면 된다고 해서…… 푼돈에 혹해 가지고…… 정말입니다.”
빙백검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괴 한이 오들오들 떨었다.
의뢰인은 뒤탈이 없도록 자신의 정 체를 철저히 가린 모양이었다.
더 이상 캐물어도 소용없겠군. 강현은 가차 없이 빙백검을 휘둘렀 다.
서격!
단칼에 떨어진 목이 바닥을 뒹굴었 다.
모닥불이 있는 공터로 되돌아가자 김혜림이 짐을 싸고 있었다.
“일단 이동하죠. 다른 암살자가 없 을 거란 보장은 없잖아요.”
“그러지.”
강현은 흙으로 모닥불을 덮어 불을 끄고 짐을 챙겨 이동했다.
원래 있던 공터로부터 벗어나 30
분쯤 달리다가 냇가를 발견하곤 근 처에 새로운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냇가의 바위 사이에 모습 을 감춘 채 30분쯤 대기했다. 이어지는 추적자가 있는지 확인하 기 위해서였다.
그러고 난 후에야 노숙 준비에 나 섰다.
김혜림은 늦게나마 설거지를 하려 고 철통을 들고 냇가에 손을 담갔 다.
“어유,차가워라. 얼음장이 따로 없 네. 그나저나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 냈어요? 뭔가 이것저것 얘기하던 데.”
강현이 옆에서 수통을 물속에 담갔
다.
물속을 헤엄치던 피라미 한 마리가 놀라서 손등을 훑고 지나갔다.
그 외에는 고요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강현이 말을 꺼낸 건 수통 마개를 닫을 즈음이었다.
“발데르에 유흥가도 있나?”
“도시치고 유흥가 없는 도시는 없 죠. 발데르에는 유달리 많은 편이긴 하지만요.”
“그럼 됐어.”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말을 해 줘요.”
“이건 내 일이야. 네가 관여할 일 이 아니지.”
강현이 누군가에게 복수하려 한다 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김혜림이 다.
하지만 강현이 선을 긋자 잠자코 설거지에 집중했다.
다시 침묵이 도는 사이 강현은 단 서를 조합했다.
‘발데르에 이하나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겠군.’
정확하게 자신을 겨냥한 의뢰였다.
현재 자신의 죽음을 원할 만한 여 자라면 단 한 명뿐이다.
강현을 배신한 세 사람 가운데 유 일한 홍일점.
바로 이하나다.
그녀가 의뢰를 한 게 분명하다.
박인환이 말한 이하나가 발데르에 있다는 것,그리고 강현의 죽음을 원하는 여자.
두 가지만 조합해도 알 일이었다.
‘분을 칠했다는 건 꾸며야 되는 직 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거겠지.’ 가이아 대륙에서 분을 칠하는 여자 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귀족가 여인,또 하나는 유 홍가 여인이다.
그렇다면 이하나가 귀족가 여인일 까?
지난 1년 사이,어느 귀족가의 호 구를 꾀어 결혼을 했을 가능성도 있 다.
하지만 그랬다면 바스코나 박인환
이 좀 더 명확하게 이하나에 대해 밝혔을 것이다.
이세계인이 귀족가와 결혼을 하는 일은 결코 흔치 않다.
소거법에 의해 이하나가 유흥가에 종사 중이라는 것이 예상되었다. 유흥가도 여느 곳 못지않게 소문에 민감하니,강현의 소식을 듣고 의뢰 를 맡긴 게 분명했다.
아마도 베킨스 던전을 공략함으로 인해 자신의 소문이 퍼졌으리라.
‘그렇다면 SS랭크 던전을 클리어했 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텐데,어째 서 이런 어중이떠중이들을 보낸 거 지?’
SS랭크 던전을 공략했다는 사실로
서 강현의 경지가 상당한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급 용병에게 암살 의뢰를 맡겼다.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혹시 돈이 없어서 B급 용병에게 의뢰를 맡겼을까? 아니,고작 그 정 도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다면 차라 리 도망치는 게 낫다.
‘뭔가 꾸미고 있군.’
생각을 마친 강현은 바위 사이로 돌아가 모닥불을 피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온 김혜림이 모닥불을 쬐며 꽁꽁 언 손을 녹였 다.
얼어붙은 손에 온기가 퍼지는 가운
데 김혜림의 입이 열렸다.
“이번 목표는 여자인 거죠?”
아까 유흥가에 대해 물은 것을 바 탕으로 추측한 것이리라.
강현이 잠자코 모닥불에 장작을 더 하는 가운데 김혜림의 질문이 이어 졌다.
“어떤 사이였어요?”
“배신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 니야.”
“좋아했었어요?”
“전혀.”
“하긴 강현 씨는 취향이 있을지조 차 의심스러울 정도니까요.”
“적어도 너 같은 타입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지.”
김혜림은 언제나처럼 볼을 부풀리 는 게 아니라 다소 실망하는 기색으 로 모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원래는 동전 던지기로 불침번 순서 를 정하고 자는 편이지만 자연스럽 게 강현이 먼저 불침번을 서게 되었 다.
강현은 김혜림의 반응을 굳이 신경 쓰기보다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차가운 눈동자에 반사되는 모닥불 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나인 포레스트에서의 습격 이후로 추가적인 습격은 없었다.
덕분에 둘은 별다른 칼부림 없이 발데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데르는 관광도시답게 화려한 건 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발데르의 랜드마크인 그랜드 카지 노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먹자골목 과 강을 이용한 유람선 코스까지 모 든 곳에 사람이 북적거렸다.
발데르의 풍경을 강현은 한 마디로 정리했다.
“허름한 마카오 같군.”
혼잣말을 들었는지 김혜림이 고개 를 갸웃거렸다.
“가 본 적 있어요?”
“글쎄.”
“해외여행도 다니고 제법 형편이
좋았나 보네요.”
“ 99
강현은 대답을 아꼈다.
김혜림으로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 는 것에 익숙해진 터라 더 이상 묻 지 않았다.
둘 사이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다 강현의 입에서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 새어 나왔다.
“……좋았었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으려던 김혜 림이었으나 차마 다시 물을 수가 없 었다.
강현의 표정이 평소보다 한층 더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그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으리라
여기며 입을 닫을 뿐이었다.
그렇게 도시를 거니는데 후줄근한 차림의 사내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거기 여행객 두 분. 발데르엔 처 음이십니까? 1실버만 주시면 비어 있는 여관을 알아봐 드립죠.”
호객으로 먹고사는 호객꾼인 것 같 았다.
김혜림이 먼저 나서며 단칼에 거절 했다.
“여기 주민이에요. 신경 쓰지 말고 가세요.”
주민이라는 소리에 사내가 괜히 말 을 걸었다는 양 미간을 좁히며 물러 났다.
김혜림은 멀어져 가는 사내를 보며 강현에게 설명해 주었다.
“여행객을 상대로 사기 치는 족속 들이에요. 빈방을 알아봐 준다면서 짐도 옮겨 준다고 하죠.”
“짐을 받으면 그대로 튀는 거군.”
“네. 인파 사이로 도망 가 버리면 잡는 건 거의 무리예요.”
“속는 사람이 있긴 하나?”
“있으니까 하는 거겠죠?”
정보를 얻기 전,먼저 잠자리부터 잡아야 했기에 여관을 찾아 돌아다 녔다.
관광도시인 만큼 여관이 셀 수 없 을 만큼 많았다.
강현은 지나치는 여관마다 ‘방 있
음’ 입간판이 서 있는 걸 보았다.
“빈방이 있는 것 같은데 안 들어가 나?”
“좀 더 시내 쪽으로 들어가서 찾는 게 나아요. 외곽 쪽에 있는 여관은 방 자물쇠가 허술해서 잠시만 자리 를 비워도 도둑이 문을 따고 들어오 거든요.”
김혜림의 안내에 따라 거리를 거니 는 사이 온갖 종류의 사기꾼이 접근 해 왔다.
싸게 태워 준다며 배에 오르면 마 을 바깥으로 데려가 납치하는 사공, 길거리 도박판을 벌리고 조작된 주 사위로 사기를 치는 도박사 등 거리 곳곳에 범죄 요소가 다분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말려들 만했다.
그때마다 김혜림의 적절한 대처로 소음 없이 거리를 지날 수 있었다. 강현은 김혜림을 따라가며 입을 열 었다.
“반년 동안 살았다고 했었나.”
“네,이곳도 처음부터 치안이 나빴 던 건 아니에요. 발데르 자작이 사 고로 의식불명이 된 이후,아들인 루카스가 대신 통치를 했는데 그때 부터 개판이 된 거죠.”
시내에 들어서자 거리에서 다소 질 서가 느껴졌다.
외곽 지역과 달리 시내 쪽은 부유 한 상인이나 귀족가 소속의 사람들이 제법 오가는 것 같았다.
길거리를 지나치는 마차의 숫자가 확연히 많아진 것만 봐도 알 수 있 었다.
김혜림은 식당이 딸린 여관을 발견 하곤 강현을 이끌었다.
“저리로 가죠.”
그녀가 정한 여관에 들어가려던 찰 나였다.
“잠깐.”
전방에서 열댓쯤 되는 병사들이 다 가오더니 주위를 둘러쌌다.
병사들이 대뜸 창을 겨누며 말했 다.
“네가 최강현이렷다?”
강현의 얼굴을 알고 있는 듯 말하
는 병사들이었다.
강현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섣부른 대답보다는 상황 파악이 우 선이었다.
어떻게 발데르의 병사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걸까.
미리 인상착의를 파악해 둔 게 아 니라면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리 없 었다.
강현이 대답을 미루자 병사들이 재 촉하듯 다그쳤다.
“얼른 대답해라!”
당장이라도 포박을 하고 체포해 갈 분위기였다.
강현은 태연하게 능청을 떨었다.
“갑자기 사람 붙들어 놓고 무슨 말
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능청을 떨어 보았지만 병사들은 강 현임을 확신하는지 바로 명분을 내 세웠다.
“나인 포레스트에서 무고한 용병들 을 학살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당 장 두 팔을 들고 무릎을 꿇어라. 네 놈을 연행하겠다.”
체포 이유를 듣자마자 바로 상황이 파악됐다.
이하나가 어째서 어중이떠중이들을 암살자로 보냈나 했더니,그들 자체 가 이미 함정이었다.
즉 암살이 목적이 아니라,강현의 반격을 유도하고 살인죄를 덮어씌우 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내 모습은 아마 사람을 풀어 인상 착의를 확인했을 테고.’
병사들은 이미 강현의 용모까지 명 확히 알고 있었다.
발데르 자작가에서 전적으로 이하 나를 돕고 있는 게 아닌 이상 불가 능한 일이었다.
이하나가 단순히 몸이나 파는 창부 에 그치는 게 아니라,발데르 자작 가를 움직일 정도의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병사들은 당장이라도 창을 내지를 태세로 강현을 위협했다.
“이놈! 무릎을 꿇으라는 소리가 들 리지 않느냐!”
김혜림이 옆에서 강현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 했다.
“어쩌죠? 귀족을 적으로 돌리면 성 가셔져요.”
“자작가 아들과 유흥가 여인이라. 대강 그림이 그려지는군.”
“네? 한시가 급한데 무슨 말이에 요?”
“일단 여기를 벗어나지.”
“그러니까 그 방법을……
이하나가 속이 타서 답답해하는 중
에 강현이 움직였다.
강현의 손이 빙백검의 손잡이에 올 려가나 싶더니 기다란 호선이 이어 졌다.
서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