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박인환은 겨우 살아남았다고 생각 했다.
다소 공략이 쉬웠던 지하 1층과 달리 지하 2층은 아수라장의 연속이 었다.
희생 게임임을 알자마자 8명 전원 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사태가 벌어 졌다.
박인환은 그 생지옥에서 희생양을 만들거나 이간질을 벌이면서 꾸역꾸 역 살아남았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남은 경쟁자도 세븐슬라임의 먹잇감으로 떠미는데 성공했다.
이제 마지막 공격으로 세븐슬라임 만 처치하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 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바깥쪽에서 문 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한 쌍의 남 녀가 나타났다.
그들을 목격한 순간 박인환은 자신 의 눈을 의심했다.
남자의 인상이 유달리 익숙해서였 다.
그가 누구였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최강현? 저놈이 살아 있을 리 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머뭇거리는 사이 강현의 검에 깃든 마나가 부서지더니 자신이 서 있는 원형지대로 날아들었다.
‘이런 망할 새끼! 날 보자마자 공 격을 날려?’
박인환은 급한 대로 세븐슬라임 뒤 편으로 몸을 날렸다.
세븐슬라임을 엄폐물 삼아 마나 파 편들을 피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뛰는 게 늦은 탓에 오른쪽 다리에 마나 파편이 틀어박히고 말 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까드득!
박힌 마나 파편이 진동을 일으키더 니 이내 오른쪽 다리가 으스러져 버 렸다.
“크아아악!”
너무나도 큰 통증에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의 고통이 엄 습하자 박인환은 허둥지둥 세븐슬라 임 뒤편으로 기어갔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아픔이었 지만 그대로 가만있다가는 후속타를 피할 수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엄폐물로 써먹을 세븐슬라임이 서 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븐슬라임도 쏟아지는 마나 파편 을 뒤집어쓰고 죽어 버린 것이었다.
믿기 힘든 광경에 박인환이 두 눈 이 짙게 흔들렸다.
‘세,세본슬라임이 일격에 죽어? 어떻게 저놈에게 이런 힘이……!’
이윽고 세븐슬라임이 죽으면서 세 방향에 길이 생겨났다.
강현이 원형 지대로 이어지는 외길 을 타고 다가왔다.
박인환은 다른 문으로 도망치려 했 지만 질질 끌리는 다리 때문에 얼마 가지도 못했다.
이윽고 원형 지대로 올라선 강현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랜만이군.”
박인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강현의 분위기는 자신이 아는 사람 이 맞나 의심스러울 만큼 크게 바뀌 어 있었다.
“어,어떻게 네가 살아 있는 거 지?”
푸욱!
빙백검이 박인환의 왼쪽 허벅지에 내리꽂혔다.
“크아아악!”
한 점 망설임 없는 결단력.
박인환을 대하는 강현의 모습은 지 독하리만치 냉정했다.
“인생의 종착점이 네놈들의 거름 신세라고 생각하니 그냥 죽을 수가 없더군.”
강현의 강력한 무력과 다리에서 올 라오는 지독한 통증에 박인환이 비 굴하게 용서를 빌었다.
“으으,가,강현아 이러지 말자.”
그저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왼쪽 허벅지에 꽂힌 빙백검이 비틀어졌 다.
“크아악!”
근육과 뼈를 긁어내는 고통에 박인 환이 더욱 크게 비명 소리를 내질렀 다.
“그만,그만……! 강현,크흡,강현 아! 우,우리 십 년을 알고 지냈잖 아. 이러지 말고 우리 옛날 생각해 서…… 끄아악!”
“십년지기의 배신은 쓰더군. 덕분 에 몬스터 살코기조차도 달게 느껴 졌었지.”
그러했다.
크라이머 던전에서 씹기도 어려웠
던 몬스터들은 심지어 달게까지 느 껴 졌다.
그 단맛은 바로 이 순간만을 바라 온 복수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 다.
“나,난 최진철의 말에 따랐을 뿐 이야. 모든 건 진철이 그놈이 계획 한 거라고. 널 버리고 받은 돈도 싹 다 그놈이 가져갔어. 우리가 1년 동 안 모든 저금까지 전부 모조리 가져 갔다고.”
“그래서? 그렇다고 네놈이 날 배신 한 게 없어지나?”
“가,강현아. 내가 잘못했어,제발 살려 줘. 앞으로 정말 잘할 테니 까…… 제발……
박인환이 싹싹 양손을 비비며 용서 를 구했다.
크라이머 던전 앞에서 등을 돌리던 모습과 상반되게 한없이 비굴한 모 습.
그러나 강현은 그 모습을 곧이곧대 로 믿지 않았다.
뿌드드득.
빙백검의 냉기 효과를 발동하여 박 인환의 다리를 완전히 얼려 버렸다.
뻣속 깊이 스며드는 냉기가 더욱 싸늘해지자 박인환이 입술까지 바들 바들 떨었다.
박인환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잠깐! 이하나와 최진철이 어 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지금 날 죽이면 개네들 행방을 알려 줄 수 없어!”
그러고 보니 이하나가 없었다.
정보상 바스코는 이하나가 박인환 과 함께 있을 거라 했지만 확실한 정보는 아니었다.
박인환도 이하나와 중간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어디 있지?”
“그건……
강현은 여전히 싸늘한 목소리로 물 었다.
한데 박인환이 말꼬리를 흐리나 싶 더니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빙백검 의 검날을 잡아 쥐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비굴함이 깃들었
던 얼굴에 비릿한 조소가 떠올랐다.
“넌 항상 마무리가 허술했었지. 이 대로 뒈져 버려 병신아.”
박인환은 지난 1년 사이 스킬 하 나를 손에 넣었다.
포이즌 핸드라는 스킬로 아주 강력 한 맹독을 흘려보내는 능력이었다. 물리적인 접촉만 한다면 마나의 흐 름을 통해서도 독을 흘려보낼 수 있 는 터라,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빙 백검을 잡아 쥔 것이었다.
“죽어!”
포이즌 핸드의 맹독이 빙백검을 타 고 강현에게 흘러들었다.
그러나 강현의 표정은 무미건조했 다.
일말의 당혹이나 두려움 따위도 없 었고,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강현이 건조한 눈길로 박인환을 내 려다보다가 허벅지에서 빙백검을 뽑 아냈다.
서격!
빙백검이 뽑히면서 박인환의 허벅 지는 물론이고 검날을 쥐고 있던 손 까지 잘라 냈다.
박인환은 손목에 남은 단면을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어째서? 분명 맹독을 주입했 는데?”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현의 독 면역 스킬인 세이덴의
독주머니를 모르는 이상에야 말이 다.
세이덴의 독주머니 스킬은 s등급이 었다.
반면,박인환의 포이즌 핸드 스킬 은 B 등급.
포이즌 핸드의 맹독은 강현에겐 이 미 의미가 없었다.
“아직도 허술해 보였나 보군.”
강현이 감정 없는 어조로 말했다. 박인환이 스스로 가면을 벗어던져 준 덕분에 놈을 베는 일이 더욱 쉬 워 졌다.
강현이 빙백검을 위로 치켜들고 마 나를 끌어올렸다.
빙백검의 검날에서 눈보라의 기운
이 일어났다.
“기다려! 이번에는 진짜로 말할게! 최진철은 몰라도 이하나는 발데르에 있어!”
어떻게든 살아 보고자 박인환이 발 악했다.
하지만 빙백검은 이미 떨어진 후였 다.
서격!
박인환의 머리가 허공에 붕 뜨더니 구덩이 너머로 떨어져 내렸다. 강현은 빙백검을 검집에 꽂아 넣으 며 나지막이 말했다.
“여전히 쓰레기로 있어 줘서 고맙 군.”
강현의 마지막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목 없는 몸뚱이가 파르르 떨더니 추욱 늘어졌다.
*
박인환을 처리한 강현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배신자 중 한 명을 처리 했을 뿐이다.
‘이하나는 발데르에 있다 했던가.’
그녀를 찾아가기 위해선 우선 베킨 스 던전을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가 야 했다.
흥분을 가라앉힌 강현은 마나 파편 에 쓰러진 세븐슬라임에게서 전리품 을 추출했다.
한데 2-1 구역의 세븐슬라임과는 다른 전리품이 추출되었다.
[아나리스의 가히
등급 : S
타입 : 가호
특징 : 유달리 귀한 물건을 좋아했 던 아나리스 여신의 가호. 가호가 깃든 자는 레벨업 시,습득한 S급 이상의 스킬 개수에 따라 보너스 포 인트를 추가로 얻게 된다. S급 스킬 이 1개면 +1,2개면 +2, 3개면 +3 의 방식을 따르며 최대 적용 개수는 6개다.
아나리스의 가호는 문양이 새겨진
종이였다.
가호 타입의 보구는 신체 부위에 대고 마나를 부여하면 사용할 수 있 었다.
강현은 아나리스의 문양이 그려진 종이를 팔에 대고 마나를 부여했다. 그러자 종이가 녹아내리고 문양이 스며들었다.
이걸로 아나리스의 가호가 깃들었 다.
전리품 습득을 마친 강현은 세븐슬 라임의 전리품이 각각 다른 것에 대 해 생각했다.
'같은 몬스터인데도 전리품이 다르 군. 지하 2증의 전리품은 지하 3증 의 공략법과 무관하다는 건가.’ 지하 1층의 전리품인 서든트리의 열매는 지하 2층의 공략법에도 영향 이 미쳤다.
하지만 지하 2층의 전리품은 랜덤 드랍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이를 통해 지하 2층의 전리품은 지하 3층의 공략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지하 3층은 순수하게 가진 능력으 로만 돌파해야 할 수도 있겠군.’ 생각을 마칠 즈음 김혜림이 가까이 다가왔다.
“볼일은 끝났나요?”
“그래.”
“예상은 했지만 역시 복수 때문이 었네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네,저와는 상관없죠.”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군. 던전을 클리어하러 가지.”
강현이 지하 3층으로 통하는 12시 방향 문으로 다가갔다.
지하 1증에서 지하 2증으로 이동 할 때처럼,건너편으로 들어서자 문 이 알아서 닫혀 버렸다.
지하 3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 을 밟아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깬 건 김혜림이었다.
“대단하네요.”
앞서 걷던 강현은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로 대답했다.
“뭐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점이요.”
“너와는 상관없다는 걸로 마무리 지은 이야기였을 텐데.”
“아뇨,그냥 제 얘기예요. 저도 여 기 와서 친구한테 배신당했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자고 일어났더니 친구가 제 돈과 짐을 모두 가지고 사라졌어요.”
단편적인 내용뿐이었지만 대충 그 림이 그려졌다.
지하 1층에서 김혜림이 내밀었던 꼬질꼬질한 돈이 떠올랐다.
가진 재산을 모두 도둑맞았기 때문
에 남은 것이라곤 그뿐이었으리라. 돈을 잃은 다음 생활은 묻지 않아 도 알 수 있었다.
온갖 잡일을 하며 장비를 구했을 테고 어렵게 던전 공략에 참여할 구 색을 갖췄을 거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이익을 쫓으려 하는 것도 당연했다.
강현은 무덤덤하게 한 마디 뱉었 다.
“그럼 너도 녀석의 전 재산을 뺏으 면 되겠군.”
“아니면 절 떠난 걸 후회할 정도로 잘나가게 되든가요.”
“그걸로 만족한다면 그리하든지.”
“아,참고로 남자 얘기는 아니에요.
같은 여자끼리 다녔었거든요.”
“그런 사소한 것까지 덧붙일 정도 의 정보는 아닌 것 같군.”
“혹시나 신경 쓸까 해서요.”
“전혀.”
잡담을 하며 내려가다 보니 이윽고 지하 3층에 들어서는 문이 보였다.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입구에 공략 법이 새겨져 있었다.
[베킨스 던전 길잡이(지하 3층)] [지하 3층은 미믹 동굴입니다. 살 아남은 자들 중 한 명이라도 던전 보스를 죽이면 클리어입니다.]
간단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었다.
물론 설명처럼 간단한 일만은 아닐 것이었다.
특히 ‘살아남은 자들’이라는 문구 가 눈에 띄었다.
문구만 보자면 지하 1,2층처럼 분 할된 구역에서 각자 공략하는 게 아 닌,생존자 전원이 지하 3층 전체를 무대로 던전 보스를 토벌하는 방식 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공략법을 곧이곧대로 믿을 강현이 아니었다.
'단순히 지하 3층을 뒤적이는 방식 은 아니겠지.’
강현은 문을 열고 지하 3층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건 너비 3
미터의 원형 통로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동굴 통로와 다를 게 없었다.
통로의 길이는 가늠할 수 없었고, 끄트머리에는 여럿으로 갈라지는 갈 림길이 있었다.
강현은 김혜림과 함께 갈림길까지 가 보았다.
“동굴이라기 보단 미로에 가깝군.”
“하나,둘,셋,넷,다섯…… 통로 가 총 다섯 개네요. 들어간 통로 입 구에 표시라도 남겨 둘까요?”
“잠깐.”
강현이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귀를 기울였다.
다섯 개의 통로 중 중앙에 있는
통로에서 뜻 모를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소리가 들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건너편에서 한 사내가 나 타났다.
그의 모습은 입에 담기 힘들 정도 로 처참했다.
마치 무슨 짐승에게라도 뜯어 먹힌 건지 한쪽 팔과 허벅지 일부가 사라 져 있었다.
쩔뚝거리며 걸어오던 사내가 맞은 편의 강현과 김혜림을 발견했는지 필사적으로 팔을 저었다.
“이쪽으로…… 오면 안……. 들어 오면 죽..
단순한 미로는 아닐 거라 예상했 다.
하지만 그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강현과 김혜림은 상황 파악을 위해 사내에게로 달려가려 했다.
허나 두 사람은 이내 멈춰 서고 말았다.
별안간 바닥이며 벽,천장에서 무 수히 많은 이빨이 돋아나더니 통로 가 서서히 좁아지면서 사내를 집어 삼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막혀 버린 통로에서 섬쩟한 소리가 울려왔다.
와드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