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 회: 23장. 폭풍전야 -- >
23장. 폭풍전야(5)
“두 분이서 뭐하세요?”
다현이 그렇게 말하면서 문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다현의 등장에 서로 얼싸안고 있던 소유와 수지가 황급히 떨어졌다.
“여자들끼리 이야기랄까? 안 그래?”
“응. 응.”
소유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수지와 눈을 마주쳤다. 수지는 여자들끼리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한 눈빛이 되어서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앗, 그럼. 저도 끼워주세요.”
다현은 그렇게 말하며 수지의 개인실에 스스럼없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수지 혼자만 있어도 가득 차 보이는 곳에 덩치가 작다고는 하나 다현이까지 안으로 들어오자 금세 좁아졌다.
“네 오빠 이야기 중이었는데? 괜찮아?”
“호오. 환영이죠.”
소유의 말에 다현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다현의 말에 놀란 수지는 소유를 돌아봤다.
“오빠라니 무슨 말이삼?”
“아, 수지야. 넌 모르지. 강현씨 동생 다현이야.”
“안녕하세요. 유다현이라고해요~”
“다현아, 이쪽은 내가 몇 번 이야기했던 절친 함수지야.”
“네. 처음 봤을 때부터 착하고 알아챘어요.”
수지는 다현을 소개받았음에도 인사할 정신이 없었다.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버, 벌써 가족들한테까지 소개 마친 사이 인거심?!”
“아니 아니, 강현씨가 소개해준 건 아니고. 그때 미국에 잠시 갈 때 옆자리였어. 너도 기억하지?”
“아.”
수지는 소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일전에 몬스터 폭탄의 위험성 때문에 지인들을 인맥을 동원해 미국으로 피신시킨 일이 있었다. 그때 소유도 피신시켰고, 사건에 관련된 도퍼들도 모두 비슷한 일을 했었다. 아마 강현도 동생이 있다면 자신과 같이 피신시켰을 테니까 그때 만났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수지가 그런 생각에 빠져 멍하게 있을 때. 다현이가 다가와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수지에게 빙긋 웃었다.
“소유언니 친구시면 저한테도 언니니까 편하게 대하세요.”
“으응. 알았삼. 나는 수지얌.”
수지도 언니로서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다현이 어느새 자신을 유심히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응?”
“언니 말투 넘 귀여워요.”
그렇게 말한 다현은 꺄르르 웃었다. 소유도 동감이라며 맞장구치며 웃었다. 수지의 작은 개인실이 순식간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수지는 그 둘 사이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이 말투가…. 설마 강현님아 동생한테 인정받은 거삼?!’
*****
“그보다 다현아 무슨 일이야?”
한참을 가볍게 웃고 떠들다가 소유가 다현에게 물었다. 이곳은 그냥 지나가다가 들리기에는 비교적 다현이 묵고 있는 거주지와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아참.”
그 말에 다현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무언가를 소유에게 내밀었다. 소중한 물건취급인 듯 가볍게 포장지로 싸여있었다. 그걸 열자 익숙한 팔찌가 보였다.
“앗, 이건.”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품이라고 하셨죠? 이제야 고쳐서 드리네요.”
일전에 끊어진 소유의 팔찌였다. 팔찌의 유일한 장식인 검은 보석뿐만 아니라. 마치 풀을 꼬아 만든 듯 보이는 검은 팔찌의 끈도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이상하게 일반 끈으로는 연결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려버렸지 뭐에요.”
“그래. 정말 고마워.”
누구나 그 앞에서 행복함을 만끽할만한 천사의 미소를 지은 소유는 다현에게서 건네받은 팔찌를 착용했다. 살짝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이내 평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전선이 끊어진 것처럼 몸에 힘이 빠진 채로 쓰러졌다. 다행히 수지의 침대 한 켠에 걸터앉아 있었던 터라 그대로 맨바닥에 넘어져 머리를 부딪친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다.
“소, 소유야?!”
“언니? 언니?”
하지만. 같이 두 사람은 갑자기 눈앞에 있던 사람이 완전 혼이 나가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수지가 소유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봤지만. 소유는 깨어나지 않았다.
“자, 잠깐 도와줄 사람 데려 오겠삼!”
그렇게 말한 수지는 방을 빠져나와 의료실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소유는 정신을 잃은 수지의 모습을 보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급히 잠든듯한 모습.
그리고 이내. 수지가 의사를 거의 엎다시피 해서 모셔왔다. 의사도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가로젓고는 정밀검사를 위해 의료실로 데려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수지가 또 한달음에 의료실로 뛰어가 소유를 옮겨가기 위해 이동식 침대를 가져왔다.
잠시후 함께 이동식침대를 밀던 다현에게 소유의 하얀 손목에 매인 유난히 검은 팔찌가 눈에 띄었다. 금방 팔찌를 꼈다고 해서 갑자기 기절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수지 언니. 저 잠깐. 오빠랑 알렉스님 데려올게요.”
그렇게 말한 다현은 수지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렸다.
*****
소유가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걷는 중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두 발로. 시야에 들어오는 건 산길. 험한 길은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려 만들어진 등산로였다. 지금 소유에게 제일 신경 쓰이는 건 평소보다 시야가 낮은 거였다. 게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걷고 있는 발을 멈추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이지만. 자신의 몸이 아닌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 낮은 시선은 줄곧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에 소유는 자신이 왜 그렇게 걷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닥에 넘어지지 않게 걷는 걸까? 아니, 이때는 바닥에 떨어진 부스럭거리는 낙엽소리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이곳은 어렴풋이 추억한 편에 남은 어린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소유가 의식하기 시작하자 양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오른손에는 아빠와 왼손에는 엄마와 손을 잡은 채였다. 아직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함께 강화도에 등산 다닐 때였다. 그때는 이곳의 이름도 모를 때였지만.
“어머나. 또.”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듯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 소유도 엄마가 왜 그런 목소리를 냈는지 알고 있다. 등산로 주변에 보이는 수많은 시선 때문이었다. 산속에 있는 수많은 동물과 새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동물이라 표정을 알 수 없지만. 이쪽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훠이. 훠이. 꺼져.”
아빠가 손에 들고 있는 등산용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동물들은 여느 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이때 부모님은 고민이 많았다. 부부가 오붓하게 등산 다닐 때는 괜찮았는데, 소유만 데리고 오면 이렇게 동물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이다. 이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한동안 등산로가 폐쇄된 적도 있었으니까.
무척 등산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이라 그때는 낙심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반대로 자신을 데리고 등산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면 안심이지.”
아빠가 한숨을 내쉬셨다. 마니산 참성단 근처까지 오게 되면 동물들이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동물들이 위협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며 가장으로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건 그저 나쁘게만 볼 수는 없었다.
소유 내 가족이 정상에서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평평한 자리에서 돗자리를 깔고 엄마가 새벽부터 일어나서 만든 김밥을 먹는 거였다. 몇 달에 한 번 이렇게 한가롭게 가족의 시간을 갖는 게 전부였다.
“이곳에서는 왜 동물들이 안 나타나는 걸까요?”
“사람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니야?
엄마의 말에 아빠가 입안 가득 김밥을 먹은 채로 대꾸했다. 그로서 이곳을 사수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젊었을 때 친구들과 놀러 온 이곳에서 아내를 만난 각별한 장소였으니까. 게다가 소유를 쫓아오는 듯 보였던 동물들도 이곳까지 안 따라오기도 하고. 하나뿐인 딸로 이곳에서는 조용히 했다. 그렇기에 이곳까지의 등산을 매번 고집하는 편이었다.
한동안 김밥을 먹으면서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은 부부는 짧은 휴식을 마치고 자리를 접고 하산하기로 했다. 그때 엄마가 소유의 손에 뭔가 있는 걸 눈치챘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 같았다.
“소유야. 뭐 들고 있는 거야? 아무거나 먹으면 맴매해.”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소유의 손에 들려있는 돌을 뺏어 들었다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어머, 예뻐라.”
“뭐야?”
“당신 이거 봐요. 무슨 보석 같지 않아요?”
“글쎄. 금이나 다이아몬드 빼고는 보석 같은 걸 본 적이 있어야지. 시커먼 게 희한하게도 예쁘긴 하네.”
“그러게요. 누가 잃어버린 거 같지도 않고 일단 들고 가 볼까 봐요.”
그렇게 말한 엄마는 자신의 주머니에 그 검은 보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늘 그렇듯, 같은 시간 같은 루트로 하산했다. 하지만. 이전까지와 다른 점이 있었다. 아니, 등산할 때와도 달랐다. 평소에 그것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던 부부였기에 달라진 점은 금세 눈치챘다.
“당신….”
“당신도 느꼈어?”
“네. 내려가는 길에는 동물들이 안 보이네요.”
“그러게…. 정말.”
고개를 갸웃거리던 부부는 몇 번의 산행 뒤에 소유가 발견한 검은 돌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니산 정상에서 발견한 다른 검은 끈으로 팔찌를 만들어서 소유에게 줬다.
“소유야. 항상 이 팔찌하고 다녀야 한다.”
산속에서 동물들이 많아서 문제였을 뿐. 평소에도 동물들이 종종 따라다니곤 했으니까. 소유는 씻을 때 빼고는 그 팔찌를 잊는 법 없이 하고 다녔다.
소유는 자신의 손에 있는 팔찌를 보다가 그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자신이 어느덧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모르지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보고 있는데도 눈물이 흘렀다.
한참 동안 울다가 겨우 눈물을 멈췄을 때.
한가지 깨닫는 게 있었다.
마니산의 등산로를 걸을 때. 산 정상에 다가갈수록 동물들이 자신을 보면서 눈빛으로 보였던 감정. 그때는 너무 어린 나이라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경외와 두려움. 그건 이 검은 보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소유가 그걸 깨닫는 순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앗, 눈떴다. 소유씨 괜찮아요?”
소유는 자신을 걱정하는 다정한 목소리. 강현의 목소리를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유야!”
“소유언니!”
소유가 깨어난 걸 확인한 수지와 다현이 차례로 다가와서 안겼다. 소유는 두 사람을 토닥거리면서 그 너머로 강현을 쳐다봤다.
“또 걱정 끼쳐드렸네요.”
“아닙니다. 잠깐 기절해 계셨을 뿐이니. 그리고 팔찌는 잠깐 벗겨서 알렉스님이 분석하고 계십니다.”
“네.”
소유가 자신의 손목에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현이 더욱 소유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언니 미안해. 아무래도 그냥 끈으로는 그 흑요석이 연결되지 않아서…. 근데 그게 언니를 다치게 할 줄.”
다현의 말인즉 끈이 될만한 걸 찾다가 알렉스씨 연구실에서 그 끈을 발견했다고 했다. 검은 보석이랑 어울릴 거 같아서 알렉스에게 이야기했더니 어차피 남은 거라고 가져도 된다고 해서 팔찌를 고치는 게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건 다크매터를 정제한 전선류의 일종으로 예거 아머를 만들다 남은 부분이라고.
“괜찮아. 너도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모르고 한 거잖아.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네. 언니.”
소유가 그렇게 말하면서 다현의 머리를 쓰다듬자. 다현은 힘없이 대답했다. 소유는 다현이 진정한 걸 보고는 강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강현님. 그보다 할 말이 있는데요.”
“네? 네.”
“저를 강화도로 데려가 주세요.”
강현은 소유가 또 뜬금없이 하는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가볍게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데려가 드리고 싶지만. 당장은 안 되겠네요. 내일 바로 일본으로 떠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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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