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9 회: 23장. 폭풍전야 -- >
23장. 폭중전야(4)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최정예 팀이 필요합니다.”
알렉스가 주먹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의 앞에 놓여있는 모니터에는 각 나라 및 대륙별로 쉘터들의 대표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컨드 웨이브 후 어느 정도 쉘터에 자리 잡은 뒤 향후 거취에 대해 원격회의 중이었다.
세컨드 웨이브가 발생한 지 어느덧 한 달. 살아남은 인류 대부분은 지하나 수중의 쉘터에 몸을 숨겼다. 알렉스 루엘은 몬스터 코어의 유통과 예거 판매를 통해 얻은 막대한 수익으로 이 쉘터들을 준비한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세계 곳곳에 마련된 쉘터는 많게는 수만 명이 몇 년 동안 생활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생존만을 고려했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슬슬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 결정할 때였다. 하나는 이 쉘터들을 중심으로 쉘터를 더욱 개발해서 장기체류를 대비하는 것. 다른 하나는 몬스터들을 퇴치하여 지상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표들의 의견은.
후자 쪽으로 몰렸다.
알렉스 루엘이 제시한 자료나 그간의 정황들은 현재 이 세컨드 웨이브의 원인을 국제적인 도퍼 범죄조직인 그레이의 짓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인류가 힘을 키워서 몬스터를 물리친다고 해도 그레이에서 계속해서 몬스터 폭탄으로 몬스터의 수를 늘려서는 사태가 진정되리라 기대하기 힘들었다. 반대로 그레이를 분쇄하면 몬스터들의 폭발적인 증가추세가 꺾이고 다시 인류가 우위를 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기대를 품게 만들어 주는 것 하나가 예거 아머였다. 예거 드럭에 반응하는 소수 도퍼 능력자들과 달리. 예거 아머는 일반인들도 몬스터와 싸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총과 같은 무기였으니까. 최초 두 개뿐이었던 예거아머는 강현이 쉘터밖에서 모아오는 다크매터를 이용해서 추가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대규모 양산하기에는 힘들었지만. 앞으로 점점 그 숫자를 늘려나가는 중이었다.
문제는 그레이를 분쇄할 방법이었다.
인류의 대부분이 몬스터를 피해 쉘터에 피신한 만큼. 지상은 몬스터의 천지. 그 때문에 쉘터 간에 무선으로 정보 교환은 가능했지만. 물리적인 교류는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일부 뛰어난 능력자 몇 명이 단신으로 이동할 수 있는 정도.
그 때문에 알렉스가 이렇게 원격회의를 열어서 제안한 거였다. 그 정도의 능력자를 한곳으로 모아서 함께 힘을 합쳐 그레이의 본거지를 공격하자고.
원격회의에 참가한 인원들은 하나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알렉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말이 끝나자 다들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 세계 도퍼 연합 팀. UD(United Doper)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팀 UD의 리더로 추천된 것은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소속 유강현이었다.
현재 유강현은 공식적으로는 탱커부터 힐러까지 모든 일반 포지션에서 1급인 도퍼 능력자. 게다가 예거아머보다 훨씬 강력한 심비오트 슈트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인류 최강의 몬스터 헌터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외의 멤버들은 여럿 거론되었지만. 선정되기 전에 선결조건이 있었다. 바로 대륙별 쉘터. 즉 집합장소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 몬스터로 뒤덮인 지상을 뚫고 유강현이 있는 쉘터까지 올 것. 한국까지 올 수 있다면 당연히 그 능력은 따로 검증할 필요조차 없을 터였다.
굳이 한국으로 집합 장소를 정한 건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세컨드 웨이브 직전 알렉스 루엘이 때마침 한국에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아 한국의 쉘터가 모든 쉘터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집 동안 강현만이 구해 올 수 있는 예거 아머의 주재료인 다크매터를 계속해서 확보하고 예거아머등 여러 가지 대 몬스터 병기를 만들기 위해서 기도했다. 다크매터를 얻으려면 몬스터 내부에 들어가서 활성화 중인 몬스터 코어를 터트려야 했으니까. 덕분에 한국정부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형태지만 한국에서만 예거 아머가 제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소집은 어디까지나 그레이의 본거지에 쳐들어갈 만큼의 인원수를 모을 때까지만 한시적인 것으로. 다른 대륙의 경우에는 현지의 지정된 쉘터에 따로 집합하기로 되어있었다. 이제는 몬스터들 때문에 비행기와 배를 타고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었으니까.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는 퍼스트 도퍼라고 불리는 노정석이 있는 쉘터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 외 다른 대륙도 그 지역의 최강 도퍼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중이었다.
*****
“저희 쉘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강현은 러시아에 이어서 중국 쪽 도퍼가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알렉스와 함께 다시 입구 쪽으로 나왔다. 중국 도퍼는 총 두 명이 왔는데 이곳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듯 둘 다 몰골이 말도 아니었다. 그중 한 명은 알렉스가 환영인사를 건네자마자 쓰러져서 강현이 황급히 힐로 치료한 다음에 함께 나온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렇게 쓰러진 중국도퍼를 보내고 나머지 한 명을 안내하기 위해 통역기를 건네다가 그 얼굴을 보고는 놀랐다. 익숙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중국도퍼는 두 손을 모아 올렸다.
-알렉스님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국에서 온 장이평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인사한 장이평은 강현을 돌아보며 다시 인사를 건네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쪽은 일이삼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그냥 강현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강현은 정이평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일이삼사라는 건.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에서 강현이 썼던 캐릭터 닉네임이었다. 당시에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 강현의 정체는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강현을 보호해야 할 한국에서 일이삼사가 도퍼 유강현이라고 까발려버렸다. 비공개 석상이었지만 그다지 보안을 기대하기 힘든 자리였기에 소문은 금세 퍼졌다. 거기다가 세컨드 웨이브 이후에 예거아머를 양산화시키면서 숨기고 있을 의미도 사라져서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었다.
어쨌든 장이평은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 내에서 중국팀을 이끌었던 리더였다. 그 시절 장이평은 강현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고, 추후 예거 아머 설계도까지 얻게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서도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장이평은 강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본명이 장이평인 것도 아니라 일부러 강현에게 장난치느라 게임 캐릭터의 이름으로 인사를 한 것이었다.
그 뒤로 쉘터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알렉스는 앞으로 있을 UD 팀의 활동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이야기한 건 멤버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강현 님을 비롯해 한 명, 러시아에서 온 슈라양과 인도에서 온 하르몬님. 일본쉘터쪽에서는 여러 가지 여건상 불참석을 통보해왔습니다.
-생각보다 수가 적군요.
장이평이 그렇게 말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넓은 중국에서도 겨우 두 명만이 이곳까지 도착했다. 최초 출발할 때는 5명 정도의 팀이었지만. 여기 오는 중에 한 명은 사망, 두 명은 부상 후 근처 쉘터에서 회복 중이었다.
-어차피 너무 많이 와도 곤란합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예거아머도 5대밖에 없으니까요. 마침 두 분이 오셔서 딱 수가 맞네요.
알렉스의 말에 장이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도 예거 아머를 입습니까?
-네. 지금까지처럼 몬스터 한두 마리를 여럿이서 둘러싸서 싸우는 게 아니라. 앞으로는 포지션에 맞춰서 싸우기 힘들 겁니다. 여기 계신 강현 님처럼 전천후처럼 싸워야 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강현님?
알렉스의 말에 강현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장이평은 그 말에 얼굴이 굳었다. 이곳까지 올 때의 험난한 여정을 떠올렸다.
-그럼 장이평님이 묵을 숙소 안내해 드릴게요.
-아뇨. 이왕 그렇게 된 김에. 그 예거 아머부터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알렉스는 의욕을 보이는 장이평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수지야. 뭐해?”
소유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여다봤다. 침대밖에 없는 쉘터내 일인 거주실 안에서 수지가 누워있었다. 수지는 자고 있던 게 아니었던지 문 쪽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누웠다.
“그냥 있삼.”
혼자 있고 싶다는 명백한 신호. 항상 털털한 수지가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정말 드물었다. 그래서 수지가 그럴 때면 다들 당황하기 마련이었지만. 소유는 수지와 몇 년 동안 함께 산 덕분에 익숙했다. 아니 안 익숙했다 할지라도 더는 몰라날 수 없었다. 수지가 깨어난 뒤로 계속해서 자신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소유는 마음을 다잡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쉘터 생활이 아주 답답하지? 너 좋아하는 바이크도 못 타고.”
다정하게 위로하는 목소리에 수지는 더는 못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소유였다.
“혹시 내가 수지 기분 상하게 한 일 있어? 아니면 뭔가 잘못 한 거라도. 알려주면 고칠게.”
소유의 애원에 한참 동안 붉은 머리를 긁적인 수지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아니 됐삼.”
하지만. 무거운 입을 열고 그 말만 내뱉은 수지는 혼자서 마무리하고는 다시 입을 닫았다.
“수지야!”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유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 모습에 수지가 깜짝 놀랐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소유가 소리치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계집애 놀랬삼.”
“미, 미안…. 하지만.”
수지의 반응에 소유가 언제 큰소리쳤느냐는 듯 소심하게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수지가 답지 않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유가 잘못한 게 있는 게 아니삼. 그냥 지금은 나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그럼.”
“무슨 말이야?”
소유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수지는 아까보다 더 긴 한숨을 내셨다.
“너랑 강현님아가 사귀는 사이인데도. 강현님아를 잊을 수가 없어서 그렇삼.”
조용히 그렇게 말한 수지는 슬쩍 소유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소유가 말이 없었다. 수지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예상한 대로였다. 이래서 자신의 이 추악한 마음을 들키기 싫었다. 강현을 좋아하긴 하지만, 절친인 소유가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멀어지는 게 더욱 싫었으니까.
“놀랐삼?”
“아니.”
소유의 대답은 의외였다.
“네가 인천에서 행방불명 되었을 때. 강현씨가 너 아는 거 보고 짐작은 했어. 전에 네가 이야기했던 도퍼가 강현씨지?”
“...그렇삼. 미안하삼.”
수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제까지 서먹하게 군거였다니.”
소유는 허탈한 듯 긴 머리를 천천히 쓸어넘겼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한 듯 양손으로 수지의 어깨를 세게 움켜잡았다. 놀란 수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걸 확인한 소유는 폭탄선언을 했다.
“네가 좋아하든 말든 난 강현씨 포기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삼.”
수지는 소유가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소유의 말은 수지의 귀를 의심케 했다.
“대신. 너도 강현씨 포기하지 마.”
“그게 무슨 말이삼?”
수지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유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휘몰아치듯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자격이 안 되니 하는 말은 내가 납득이 안되거든. 동정받는 거 같단 말이야. 친구라서가 아니라. 내가 보기에는 너도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니까.”
말을 마친 소유는 수지의 힘껏 잡았던 어깨를 놓고 창피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만약. 네가 강현씨 포기하면 나도 강현씨 포기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소유의 뺨은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수지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으응. 알겠삼. 나도 강현님아 포기 안 할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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