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5 회: 23장. 폭풍전야 -- >
23장. 폭풍전야(1)
“다녀왔습니다.”
아파트 문이 벌컥 열리고 다현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쾌하게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 들어온 다현은 의외의 향기를 맡았다.
‘라면 냄새.’
다현이는 후다닥 부엌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다현이가 오는 소리를 듣고 금방 식탁에서 일어난 강현과 식탁 위에 금방까지 강현이 먹고 있던 라면이 있었다.
“후, 또 혼자 있다고 라면 먹었어? 뭐라도 시켜먹지.”
다현이 혀를 차면서 지금까지 강현이 앉아 있던 식탁 의자에 앉았다.
“편하잖아.”
강현이 멋쩍은 나머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꾸했다. 귀국한 동생을 반기는 모양새치고는 역시 나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남매가 떨어진 건 하룻밤밖에 되지 않았다. 강현이 성제를 잡기 위해서 일본으로 향한 뒤. 그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한 뒤. 자신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는 다음 날에 나타났으니까.
강현이 그렇게 생각하든 말든, 다현은 젓가락을 들어서 강현이 먹던 라면을 후루룩 먹고는 “역시 이 맛이야.”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졸지에 먹던 라면을 뺏긴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보다 의외로 빨리 왔네. 어제저녁에야 한국으로 돌아온다고 했잖아.”
한국으로 날아가던 도중에 연락을 미리 해뒀지만. 한국에 도착한 다음에 다현과 통화할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짐을 정리하고 다음 날 점심 무렵에 한국에 도착한다? 비행기 시간을 생각하면 일반인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부엌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다현 씨가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해서. 제가 전용기로 모셔다 드렸죠.”
알렉스 루엘이었다.
“한대가 아니었나?”
“당연하죠. 한 대 빌려주면 전 뭐 타고 다니라고요.”
“말을 말아야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알렉스를 보면서 강현은 새삼 알렉스의 대화가 두통을 유발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다현이 자신이 먹던 라면을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알렉스씨. 이거 드셔 보세요. 라면 먹어본 적 없죠?”
“먹어본 적 있습니다만. 이건 좀 제가 먹어본 라면이랑 다르네요. 꽤 자극적인 냄새에다가. 면도 희한하게 꼬불꼬불하군요. 이건 기름에 튀겨서일까요?”
다현에게 라면 그릇을 받아 흥미로운 듯 살피는 모습은 사뭇 미식가다워서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하지만. 이내 강현은 알렉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이, 이건. 다현 씨와 간접키스?!’
그 소리를 듣고 알렉스를 쳐다보니 얼굴도 발그스레했고, 젓가락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30대 아저씨가 새파란 20대 초반의 자신의 동생을 보고 두근대고 있는 모습을 보자. 강현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이런 거 대접해드리기는 죄송하네요. 치우겠습니다.”
강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야 조심스레 한입 먹을 기세인 알렉스에게서 라면 그릇을 뺏어가 지고는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으악!”
“깜짝이야!”
알렉스는 순식간에 벌어진 참상에 비명을 질렀다. 그 때문에 덩달아 놀란 다현은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강현이 남은 라면을 싱크대에 버려버린 거 보고는 살짝 눈썹을 모았다.
“아깝게 왜 버리고 그래. 아직 좀 남았던 거 아니었어?”
“생각해보니까. 손님한테 먹던 걸 대접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강현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면서 그 손님의 얼굴이 처참해진 걸 보고 속으로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다현은 루엘 타워에서 대접받았던 일을 떠올리면서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러네. 알렉스님도 진정하세요. 그렇게 라면이 먹고 싶으신 거였다면 있다가 끓여 드릴 테니까요.”
“다현 씨가 직접이요?”
“네? 우리 집은 제가 주방장이니까요. 그럼 얼른 짐부터 풀어야겠어요. 알렉스씨도 도와주실 거죠?”
“물론이죠.”
세계 제일의 부호를 짐 정리에 동원하겠다는 다현의 모습이 당차기도 했지만. 왠지 다시 살았다는 듯 생기 넘치는 렉스의 목소리를 들으니. 유쾌하지 못했다.
“오빠도 도와줘.”
“알았어. 알았어.”
강현은 그렇게 대답하며 거실로 따라 나갔다.
*****
“이게 다 뭐야?”
강현은 거실을 가득 메운 박스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하나하나 크기도 작지 않은 이삿짐 박스들이 얼핏 봐도 십여 개는 되어 보였다. 아마도 다현과 알렉스가 부엌으로 들어와 있는 중에 알렉스의 직원들이 날라놓은 모양이었다.
“그야. 오빠랑. 소유 언니랑 내짐이지.”
다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이삿짐 박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박스 외부에 짐별로 꼼꼼하게 표시해둔 듯. 이것저것 확인하더니 자신의 짐을 깠다.
“거기서 몇 달을 살면서 이것저것 물건 사들이다 보니까. 부피가 좀 되더라고. 그렇다고 거기 두고 오는 것도 아깝잖아?”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은데.”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많긴 하네.”
강현이 질린 표정으로 박스를 쳐다보다가. 다현이 말하는 걸 보고 박스를 살펴보려고 할 때. 알렉스가 끼어들었다.
“제 짐도 같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그러고 보니. 강현의 짐이 한 박스, 다현의 짐이 두 박스, 소유의 짐이 한 박스, 나머지 여섯 박스가 알렉스의 짐이라고 표시되어있었다. 절반 이상이 알렉스의 짐인 셈.
“왜죠?”
“네?”
“여기에 알렉스님 짐은 왜 갖다 두셨나 고요?
“원래 제가 한번 움직이면 저 정도 짐은 됩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옷도 여러 벌 필요하고 보기와 다르게 예민해서 잠자는 곳도 많이 가리거든요. 되려 세바스찬도 많이 바쁜데 급히 준비해서 많이 간소화한 것이죠.”
따지는 듯 물어온 강현에게 알렉스의 유수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중에 강현을 만족스럽게 하는 대답은 없었다.
“설마 여기서 지낼 건 아니죠?”
이어지는 강현의 추궁. 대답해온 건 난처해하는 알렉스가 아니라 다현이었다.
“내가 갈 때 없으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어. 미국에서 신세 진 것도 있잖아.”
“그런 이유로…. 안될까요?”
다현의 대답에 이어서 강현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알렉스. 하지만 강현의 대답은 확고했다.
“안돼!”
알렉스 루엘이라면. 이 서울 내에 호텔을 아예 통째로 매입해버리거나. 새로 지어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부호. 그런데 갈 곳이 없어서 이 좁은 아파트에서 신세를 진다? 물론, 뉴욕에서 신세 진 만큼 갚아야 하겠지만. 지금의 흐름으로 봐서는 알렉스의 속셈이 훤히 보였다.
강현의 단호한 거절에. 알렉스는 금세 울상이 되었다.
“보세요. 형님. 여기 형님 애도 데리고 왔는데 너무 하십니다.”
알렉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거실의 소파에 테라가 얌전히 앉아 있었다. 강현은 그제야 테라를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의 마지막 보스를 빼닮은 테라는.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을 클리어하고 나올 때. 인벤토리에 많이 비축해 두었던 몬스터 코어로 만들어진 인공인간에 가까운 존재였다. 하지만 저런 어린 여자애의 모습인데 몬스터와 싸우라고도 할 수 없는 데다가 딱히 본인도 어떤 능력이 있다고 알려왔던 건 아니라서 [ 콩 ]과 달리 딱히 용도가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강현에게는 알렉스의 부적절한 발언을 짚고 넘어가는 거 중요했다.
“다현아.”
“응?”
“잠시 테라 눈 가리고, 너도 눈 좀 감고 있어봐.”
강현의 말에 알렉스가 움찔했다.
“히익.”
그 모습을 본 다현이 강현의 옷을 잡아끌었다.
“오빠도 장난 그만 쳐. 짐 정리하려면 한참 걸리겠는데.”
“네네.”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대답한 강현은 여전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알렉스를 돌아봤다.
“알렉스님. 여기 지내고 싶으시며 지내셔도 됩니다.”
“앗, 감사합니다.”
알렉스는 강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까지 이곳에 묵고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저 짐은 우리 집에 다 안 들어가니까. 치워주세요.”
“네. 물론이죠.”
강현이 알렉스의 짐이 들어있는 박스를 가리키면서 그렇게 말하자. 알렉스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때. 알렉스의 폰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잠시만요.”
전화가 온 곳을 확인한 알렉스는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강현은 이내 알렉스가 보란 듯이 전화를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두 배도 괜찮습니다. 네네.”
그렇게 기분 좋게 전화를 끊은 알렉스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강현에게 말했다.
“짐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네?”
“금방 전화 들으셨죠? 금방 옆집을 창고용으로 사들였어요.”
간간하게 집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알렉스를 보고 강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여기 있는 짐을 그 집으로 옮기시면 되겠네요.”
“네네. 당연하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알렉스를 보면서 강현은 결정타를 날렸다.
“알렉스님도 짐과 함께 옆집으로 가시면 되겠네요.”
강현과 다현이 둘이서 사는 이 아파트를 사들였다면. 굳이 알렉스가 이 집에 머무를 이유도 없었다.
알렉스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네? 어디까지나 거긴 창고용으로…. 이것도 농담이신 거죠?”
“진담이데요.”
“그럴 수가….”
강현의 말에 알렉스는 무너져내려 주저앉았다. 한창 자기 짐을 헤집고 다니던 다현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한국에 잠깐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옆집으로 이사 오시는 거예요? 그럼 이제 이웃사촌이네요.”
“이웃사촌!?”
다현의 말에 알렉스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한국어 수업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배운 말이긴 한데…. 이웃에 살면서 사촌 형제처럼 가까워진 이웃이라는 말이었죠. 아마?”
“네. 아무래도 자주 얼굴도 보고 할 수 있으니까요.”
“요즘에는 아파트 옆집 사람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하진 않겠지만.”
강현이 그렇게 옆에서 핀잔을 주었지만. 두 사람 모두 개의치 않아 보였다.
“잘 부탁해요. 이웃님. 나중에 이사 치킨 돌리실 거죠?”
“이사 치킨?”
이웃사촌보다 들어 본 적 없는 말.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다현이가 황급히 수습했다.
“아 한국의 풍습이에요. 이사하고 이웃사람들에게 치킨 돌리면서 인사하는 거예요.”
“그, 그렇군요. 준비하겠습니다.”
“네. 기대할게요.”
다현이 정말로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알렉스에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알렉스는 녹아내려서 싱글벙글하게 되었다. 그 꼴이 고까웠던 강현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가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테라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알렉스의 팔을 부러트린 걸 생각하면 저렇게 얌전한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다현아. 테라가 왜 저렇게 기운이 없어?”
얌전히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추욱 처져있는 모습이 기운 없어 보였다. 거기다가 기분 탓인지 조금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다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테라에게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가 일본 가고부터 줄곧 저 상태야.”
“테라, 맴매를 안 먹어성 그랭.”
강현이 다가오자. 기운 없는 말투로 테라가 말했다. 강현은 테라를 관찰했다가 확신했다.
‘확실히 좀 작아졌네. 말투는 왜 저래. 혀까지 짧아진 거야?’
다현은 테라의 말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밥? 아무것도 안 먹는다며.”
“밥은 안 먹어.”
테라는 질색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 맴매라는 게 몬스터 코어는 아니겠지?’
강현의 예감대로 테라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서 강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정확히는 손목시계로 변신해 있는 [ 콩 ]을 잡아당겼다.
“이거 이거. 맴매.”
“이건 안돼.”
강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목을 깨물려고 하는 테라를 밀어냈지만. 테라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기운 없는 와중에도 예거를 먹진 않았지만. 예거 때문에 평소에도 힘이 강해져 있는 강현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걸 보고는 강현은 놀랐다. 결국, 강현이 포기했다.
“자, 잠깐만. 다른 거 줄 테니까.”
강현은 인벤토리에 담아둔 A급 몬스터 코어를 하나 꺼내서 테라에게 건넸다. 그러자 테라는 양손으로 들어서 냠냠 뜯어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다는 듯. 쩝쩝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저 비싼걸.’
강현이 질렸다는 듯 테라를 쳐다봤다. 다현은 그때야 생각났다는 듯 집안을 둘러보다가 강현을 돌아보며 물어왔다.
“그러고 보니 소유 언니는 왜 안 보여? 같이 한국으로 왔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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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제목과 달리 일상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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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가 늦어 죄송합니다ㅠㅠ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