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0 회: 19장. 설계 -- >
19장. 설계(3)
“저토록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줄이야. 정말 놀랍습니다.”
하지메가 극찬했다. 나무 위에서 중국팀이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일본팀의 두목인 하지메가 그렇게까지 칭찬했지만. 그 칭찬의 대상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중국팀을 내려다봤다.
“중국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최고라고 말하지요. 그런 중화사상에 찌들어서 우쭐대고 있을 때. 우리 미국은 항상 외부의 피를 수혈에서 융합 발전시켜왔습니다. 육도삼략, 손자병법 등 각종 병법과 계략은 결국 인간 심리를 기초로 한 것. 거기에 현대의 프로파일링 기술을 접목하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테일러는 덥수룩한 머리 아래 기다란 코끝에 살짝 걸리고 있던 안경을 치켜세워 올렸다.
“섬세한 작업이라 심리전술분야의 일인자 저 테일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테일러의 일장연설을 들은 하지메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태도와 달리 속으로는 테일러의 반응이 불만족스러웠다.
‘흥, 결국 이 정도까지 중국팀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건 우리 닌자들의 공이 아닌가?’
그게 하지메의 본심이었다. 이곳에서 닌자라는 직업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원거리 딜러로 육성한 팀원을 민첩하게 도망칠 수 있게 훈련하고, 상점에 대량으로 구매한 수리검을 며칠에 걸쳐서 여기저기 나무 위에 숨겨두는 듯. 사전준비에 공을 들이고 실행까지 완벽하게 한 것은 자신이 지휘하는 일본팀이었다.
테일러의 계략이 대단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계략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실수 없이 실행되어야 의미 있는 건. 테일러는 그런 점에서 자신의 팀에 대해서 조그마한 배려도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대단해서 지금의 상황이 이뤄낸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그야말로 방약무인.
하지메는 알렉스의 그런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그런 기색을 일말도 내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확실히 미국의 힘이 필요했다. 이대로 중국팀과 그레이팀을 차례로 무력화시키는 게 1차 계획. 패널티 때문에 퀘스트 방해를 못 하게 만든 다음. 미국팀과 힘을 합쳐서 중급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까지가 계약이었다.
그다음엔? 당연히 상급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 100층으로 알려진 상급 퀘스트는 아직 미지의 세계. 미·일 연합팀이 그때까지 협력할 가능성도 있지만. 일본팀과 미국팀 어느 쪽이 우승하게 될지는 그때 가려봐야 할 터였다. 결국에는 예거아머는 한 대뿐이었으니까.
‘우리 대일본이 가지게 될 테지만.’
하지메는 그렇게 생각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테일러가 끼어들었다.
“그레이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하지메는 북쪽 숲 너머로 바라봤다. 금방까지의 보고에 따르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순조롭습니다. 유인하는 인원을 따라 계속해서 외부를 돌고 있습니다.”
“쯧쯧. 단순한 녀석들.”
테일러는 혀를 쳤다. 비교적 유명한 리더인 장이평과 달리 태생이 비밀범죄조직인 그레이쪽의 리더는 형상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중국팀부터 처리할 예정으로 그레이라는 변수를 상황에서 배제하게 시켰다.
“그레이쪽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스러웠는데. 기우였나 보군요.”
그레이는 꽤 단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중국팀처럼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을 터. 테일러는 다소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자신이 짠 계획의 마무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중국팀은 선두를 포함해 수십 명이 구덩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좁은 길목이라 후미의 병력은 감히 앞쪽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두목인 장이평만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다시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상정 내. 이미 매복해 있던 일본 측의 근접딜러들이 장이평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현실에서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예거 시뮬레이션 내에서는 비교적 비슷한 등급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이 상황에서 장이평 혼자 남아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제로였다.
그때.
“저건 제 데이터 내에 없습니다만.”
테일러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미처 생각 못 한 변수가 나타났다. 근육질의 삼인조가 장이평의 앞을 가로막았다. 들고 있는 무기는 각각 장총과 석궁. 그리고 힐러용 지팡이. 원딜 둘과 힐러였다. 문제는 그 뒤의 일이었다. 그 삼인조는 일본팀의 근접딜러들을 날려버린 것이다.
*****
“클라우드님. 목표가 사라졌습니다.”
앞서 일본닌자를 쫓아갔던 부하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클라우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예상했다는 태도.
“잠깐 대기한 뒤. 원숭이가 꼬리 치면 쫓아간다.”
그렇게 지시한 클라우드는 자신이 돌아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장이평이 쫓아오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장이평이 자신을 계속해서 따라오는 중이라면 일부 장이평에게 붙여둔 부하들이 먼저 보고해왔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예상대로 자신을 버리고 중앙으로 향하는 도중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때 다시 수리검이 날아왔다.
“공격입니다.”
“알고 있어.”
부하의 보고에 클라우드는 긴장감 없이 대답했다. 수리검이라고 해도 그 수는 십여 개 남짓밖에 안 됐다. 대부분 제대로 겨냥도 안 하고 마구잡이로 뿌려대는 듯 일부는 바닥에 처박히고 일부는 머리 너머로 날아갔다.
‘유도팀은 이제 셋. 아니 둘밖에 남지 않았나?’
최초에 자신들을 기습한 후에 쫓아오게 유도하던 팀의 숫자는 스무 명 남짓. 최초 추격할 때 이미 상대가 일본 닌자의 모습을 하는 것을 확인했다. 내색은 않았지만. 일본팀들이 이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 안에서조차 일본 닌자 모습을 한 걸 보고 실소하는 바람에 수리검에 맞을 뻔했다.
어쨌든. 클라우드는 똑똑히 봤다. 닌자들이 습격한 다음, 절반 정도로 나뉘어서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포인트 별로 닌자들의 숫자가 절반씩 쪼개졌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그걸 보면서도 내버려 뒀었다. 애당초 최초의 습격 때부터 클라우드는 일부러 무리하게 쫓아 왔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국팀이 어디까지 협력할 자세가 되어있나 파악하는 것과 습격하는 팀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일본팀의 움직임을 확인한 결과 클라우드 쪽에 습격한 측은 전력분산을 위한 미끼였다.
그리고 클라우드는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이제 미·일 연합팀은 중국팀을 안심하고 공격해 들어갈 터였다.
당장에 우스꽝스러운 코스프레 한 녀석들에게 농락당하는 데에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미·중·일 삼국 중에서 제일 세력이 큰 중국팀을 한풀 꺾어둘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중국팀이 허무하게 당하진 않을 터. 현 부대가 전멸한다고 해도 그 후속 부대가 쫓아와서 미·일 연합군과 난전이 벌어질게. 자명했다.
그에 반해서 그레이팀은 어느새 게이트의 북쪽을 지나서 서쪽으로 향해있었다. 게이트 북쪽의 몬스터들은 미·일 연합팀이 싹 정리해서인지 몬스터와 마주치지 않았다. 그리고 게이트 서쪽은 최초 진입로와 많이 떨어진 지역. 슬슬 몬스터들이 모습을 보일 터.
‘아마 이쯤에서 닌자들은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하면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겠지.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
클라우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의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서쪽에서 수풀을 해치면서 다가오는 소리였다. 클라우드는 다가온 존재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습관적으로 안대 아래쪽을 긁었다.
“클라우드님이 많이 따분하셨나 보네.”
“스모그. 수고했다.”
클라우드는 자신과 같이 그레이면서 그레이B팀의 팀장인 스모그를 반갑게 맞았다. 이런 전장에서 아군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선물도 들고왔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선물이란 바로 클라우드를 농락하고 있었던 닌자 코스프레하고 있던 일본팀원이었다.
“날뛸 때는 좋았지? 닌자라면 그거 해봐. 펑하고 사라지는 거. 응?”
잠시 후.
클라우드는 땅에 파묻힌 채 얼굴만 드러내고 있는 닌자의 뺨을 발로 톡톡 건드렸다. 그때 뒤쪽에서 스모그의 보고가 들렸다.
“클라우드님. 인원 장비 이상 없습니다.”
“좋아. 출발하자고.”
클라우드는 미련없이 닌자를 두고 돌아섰다. 스모그는 어느새 팀원들을 흐트러짐 없이 정렬해두었다. 스모그는 아직 그레이의 이름을 받지는 못했지만, 최근 그레이 내에서 주목받는 유능한 신인이었다. 그 때문에 곧 그레이의 이름을 받을 예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일환으로 중요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클라우드의 보좌로 임명됐다. 중국이 그레이의 연합제안을 오케이 했을 때도 이렇게 병력을 양분시켜서 대비하자고 제안한 것도 스모그였다. 이대로라면 그레이가 미·중·일 삼국을 따돌리고 예거아머를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미·중·일 삼국은 물론, 전 세계에 충격적으로 그레이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것. 본격적으로 이름을 내세우고 국제적인 단체로서 활동할 수 기반을 마련하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그렇다곤 해도 말이지.’
클라우드는 출발하기 전에 부하들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를 봤다. 한 세트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 걱정없는 거금이다. 그레이가 이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에 개입해 각종 자원아이템을 독점하고 신규 유저의 진입을 철저히 막아놓은 덕분.
그렇게 마련한 막대한 자금이 이번 작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클라우드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두가 예거 아머를 손에 넣는 데 혈안이 된 지금. 이 자금을 모두 현금화해서 차후 세컨드 웨이브에 대응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부의 생각도 이해가 안 되는 아니긴 했다. 세컨드 웨이브 이후에 몬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도퍼를 신인류라고 주창하고 있는 그레이에게. 인간의 기술로 도퍼의 힘에 필적하는 힘을 손에 넣는다면 그 근간이 흔들릴 테니까.
“뭐. 나야 까라면 까면 되겠지.”
클라우드는 망설임을 거뒀다. 자신은 몬스터와 끊임없이 싸울 수 있어서 그레이에 들어온 거였으니까. 그것만 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었다.
“네? 클라우드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갑자기 클라우드의 분위기가 바뀐 걸 눈치챈 스모그가 다가왔다. 클라우드는 빙긋 웃으면서 스모그의 어깨를 손을 얹은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다. 가자. 몬스터 잡으러.”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강현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해했다. 물론 강현의 옆에 있던 장이평의 놀라움도 더 컸다. 바로 빅사이즈, 스타로드, 인텔파이브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광경 때문이었다.
“흐이잇차!”
우측에 있던 빅사이즈가 검을 빼 들고 달려드는 일본팀 근접딜러에게 들고 있던 샷건을 휘둘렀다. 총을 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휘둘렀다. 야구방망이 휘두르듯이. 거기에 가격당한 근접딜러는 몸이 비정상으로 꺾이면서 뒤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몇몇 근접딜러는 주춤했다. 몇몇은 용기를 내서 좌측에 있던 인텔파이브에게 달려들었다.
석궁을 뒤로 짊어진 모습이 다소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해 보였던 탓이리라. 인텔파이브에게 달려들었다. 인텔파이브는 근접딜러가 휘두르는 일본도를 피한 다음에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일본팀 근접딜러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졌다. 쓰러진 일본팀 근접딜러의 몸에는 석궁용 짧은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러자 아직 여섯이나 남은 근접딜러들이 주춤했다. 아니 뒤로 물러나 도망치려고 했다. 그때. 중앙에 힐러용 지팡이를 들고 있던 스타로드가 힐러용지팡이를 휘두르면서 들이닥쳤다. 지팡이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일본팀의 근접딜러들이 볼링핀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이, 이건…. 엄청난 무공이군요.”
장이평이 이 기괴한 광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발했다. 그걸 들은 강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태연함을 연기했다.
“저희 다이내믹 코리아팀이 한 가닥 하죠.”
============================ 작품 후기 ============================
어느새 90화네요.
아직 갈길이 머네요. 열심히 달려야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