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4 회: 13장. 막간극 -- >
13장. 막간극 (6)
“세바스”
-네 마스터. 세바스 대기 중입니다.
지하실로 내려온 알렉스는 세바스를 불렀다.
“현재 치료상태는 어때?”
-노정석과 폴은 회복실에서 치료 중입니다. 말씀하신 데로 힐러대신 이번에 개발한 힐링머신을 사용 중입니다. 현재 치료상태는 각각 노정석 73% 폴 42%로 예측한 데로 D급 몬스터 코어 사용 시보다 C급 몬스터 코어 사용 시 치료속도가 30%가량 빨라집니다. 세부적인 데이터를 보시겠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미스 설은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위대하신 마스터의 힐링머신으로 총상을 치료되어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주저하는 세바스의 말에 알렉스는 순간 짜증이 났다. 좀 더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아부나 유머등 여러 가지 기능을 추가했었지만. 역시 비효율적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뜸들이지 말고.”
-현재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좀 더 경과를 지켜봐야 할듯합니다.
“그래? 무슨 변동사항이 생기면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알렉스는 정면에 멋지게 전시해둔 황금빛의 예거아머를 봤다. 알몸으로 오라고 한만큼 이번에는 이걸 입고 갈 순 없었다. 알렉스는 별다른 아쉬움이나 주저 없이 예거아머에게서 몸을 휙 하고 돌렸다.
“그럼 슬슬 나갈 준비를 해볼까.”
-다른 도퍼에게 연락을 취합니까?
“아니. 됐어. 지금 어설프게 도퍼들을 동원했다가는 더 위험할 거야. 거기다가 딱히 도퍼들이 쓸모있는 것도 아니고.”
알렉스는 습격자들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먼저 도퍼의 능력을 흡수하는 자. 다행히 능력을 흡수해서 이용하는 단계까지는 아닌 거 같았다. 두 번째 능력자는 공간장악. 이 능력도 어디까지나 조용히 범죄를 치르기 위한 능력에 가까웠다.
하지만. 퍼스트 도퍼와 폴에게 장치해둔 액션캠이 녹화한 영상을 분석한 결과 새로이 나온 제3의 인물. 퍼스트 도퍼와 거의 막상막하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퍼들의 움직임을 단기 예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듯해 보였다.
거기에 다른 남자들이 그 제3의 인물을 부른 호칭. 미스 그레이. 짐작하건대 다현을 납치한 배후의 정체는 바로 범죄집단 그레이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이만큼 특이체 도퍼들을 동원할만한 곳은 그레이 밖에 없었다.
‘근데 대체 나한테 뭘 원하기에...’
알렉스를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당장 제일 중요한 건 다현을 구출하는 거였으니까. 그것도 혼자서 해내야 한다.
‘아니 혼자는 아니지.’
알렉스는 씩 웃었다. 루엘가는 절대 승산 없는 일에 나서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세바스. 그것을 준비하도록.”
-네. 마스터.
뜬금없이 말을 꺼냈지만. 세바스는 알렉스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
그날 밤.
인적이 끊어진 메도우 코로나 공원을 한 사내가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었다.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그 사내의 모습을 공원관리원이 보기라도 했다가는 당장에 신고할법했다.
그 사내는 알렉스 루엘이었다. 다현을 납치해간 납치범들과 담판 짓기 위해서 단신으로 나선 것이다. 30대 초반이었지만. 정해진 스케쥴에 맞게 단련을 빠짐없이 하고 있어 군살 없이 단단한 몸매였다.
한참을 공원을 가로질러 가던 알렉스는 지정된 위치에 멈춰 섰다. 가까이 건물이라곤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그때 허공에 조명이 팟 하고 커지면서 지면에 파놓은 비트에 숨어있던 괴한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부자라서 정력제라도 처먹는지 실한대요?”
“조용히 해. 완전히 알몸인 거 맞지?”
알렉스는 괴한들이 자신을 보고 중얼거리는 걸 무시하고 당당하게 다리를 벌리고 허리에 손을 대고 외쳤다.
“좋아. 난 루엘가의 가주. 약속은 지킨다. 그대들이 원하는 건 뭐지?”
괴한중에 한 명이 나섰다. 이번에 새로 등장한 단기예지 능력자였다.
‘공간장악 능력자는 숨겨둔 건가?’
알렉스가 최대한 주위정보를 모으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알렉스에게만 조명이 집중되어서 밖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대표로 나온 단기예지 능력자가 입을 열었다.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였다.
“예거 프로젝트를 접는 거다. 그것만 약속하면 이 여자는 물론. 당신도 무사히 돌려보내 주지. 신세계에서 당신이 할 일은 많으니.”
이들이 말하는 예거 프로젝트는. 도퍼와 달리 일반인들이 몬스터를 퇴치할 수 있는 예거(사냥꾼)을 만들어내는 걸 중단하라는 의미였다. 대표적으로 일반인이 몬스터의 공격을 견뎌내고 공격을 할 수 있는 예거 아머. 그리고 예거 아머를 착용해서 싸우기 전에 전사로서 길러내는 훈련 프로그램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 이 두 개를 중단하길 원하는 거였다.
사실 예거 프로젝트에 대한 불만과 방해는 끊임없이 있었다. 그것도 한 집단에 의해서만. 비밀리에 이뤄지는 일이라서 미국정부에서도 파편적인 정보만 있는 상태에서 이 모든 것을 알고 방해한 집단은 단 하나였다.
알렉스는 손가락을 괴한에게 처억 가리키면서 이죽거렸다.
“역시 습격한 녀석들은 그레이였군. 당신네 최근 너무 과감한 행보를 보이는 거 아닌가?”
“당신이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쇼 때문에 우리도 더 물러날 순 없었다.”
“내 쇼를 열심히 봐준 거야 고맙지만. 이제 예거 프로젝트는 내가 죽는다고 해도 중단되지 않는다.”
알렉스의 선언에 여자가 움찔했다.
“그럼 교섭결렬인가? 이 여자를 죽이고, 당신도 죽일 수밖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현이 묶인 채로 끌려 나왔다. 조명에 비친 다현의 모습은 다소 초췌해 보였지만. 어딘가 다치거나 고문당한 흔적은 안보였다. 알렉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현.”
알렉스가 다현을 다정하게 부르자. 지쳐있던 다현이 힘을 내서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알렉스의 모습이 의심스러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자코 쳐다보고 있던 다현이 갑자기 발광했다.
“악. 알렉스 맞지? 왜 알몸인 거야?”
고개를 몇 번이나 좌우로 내젓은 다음 옆에 자신을 붙들고 나온 괴한을 보면서 애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전 저 사람 피앙세니 약혼자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제가 저런 변태랑 결혼할 리가 없잖아요.”
그 말에 알렉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통역기를 부착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닌 자들도 뉘앙스만으로 다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똑같이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어디까지나 당신네와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온 거지. 그녀를 구하러 온 건 아니니까. 죽이든 말든 알아서 해.”
“역시. 이런 하찮은 동양인 여자랑 어울릴 거 같진 않았어. 그쪽은 뒤로 끌고 가서 처리해.”
“네.”
영어를 잘 모르는 다현은 어리둥절해하면서 뒤로 끌려갔다. 비명을 질렀지만. 알렉스는 짐짓 모른척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어쩔 작정이야? 나를 죽이고, 예거 프로젝트도 멈추고 나면? 세컨드 웨이브가 왔을 때 모든 인류가 몬스터에게 당해서 멸망하길 바란단 말인가?”
“모든 인류는 아니지. 몬스터와 적응할 수 있는 인류는 괜찮아. 바로 나 같은 신인류 말이지.”
그때 다현이 사라진 쪽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그 소리에 모두 뒤쪽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예지능력자는 흔들림 없이 총을 알렉스에게 겨눴다.
“저런 여자 따위는 상관없다고 하더니만. 구출팀을 보냈나 보군. 하지만. 내 레이더에 아무것도 안 잡히는 걸로 봐서는 일반인으로 구성된 특수부대 정도일 거 같은데. 저 녀석들은 전부 도퍼들이다. 아무리 약해도 인간들에게 지진 않지.”
“워워. 진정해. 나 알렉스 루엘은 약속한 건 지킨다고. 알몸으로 혼자 왔어. 내가 약속을 지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미스 그레이. 아니 엘리야 그레이라고 부르면 될까?”
“어떻게?”
예지능력자. 아니 엘리야는 알렉스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자 놀란 듯 주춤했다. 알렉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외쳤다.
“세바스!”
엘리야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위에 명령했다.
“쏴!”
알렉스를 향해 수십 개의 총구가 겨눠지고 거기에서 불을 뿜기 직전. 하늘에서 구름을 뚫고 커다란 상자가 떨어져다. 전화부스보다 조금 더 큰 상자는 알렉스와 적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 후 수백 발의 총알이 순식간에 뿌려졌다. 탁한 모래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미스 그레이. 뭡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엘리야는 자기에게 묻는 부하에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자신의 예지에도 아무것도 집히지 않았다. 잠시 뒤 모래 연기가 걷히고 나자 그 자리에 황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예거아머였다.
“아니 어떻게...”
순식간에 예거아머를 장착하고 나온 알렉스를 보고 당황한 나머지 엘리야는 뒷걸음질쳤다.
“이거? 새로운 착장 시스템이지. 예거아머를 항상 들고 다닐 순 없잖아?”
“그럼? 아까 났던 소리도?”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엘리야가 뒤쪽으로 돌아봤다. 다현이 끌려간 곳이었다. 그때 또 다른 예거아머 한 대가 제트엔진을 뿜으며 날아왔다. 아직 컬러를 입히기 전이라 시커먼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야호. 이거 짱인데? 근데 이걸로 어떻게 싸워?”
-미스 유. 제, 제발 가만히 있어주세요.
다현이 들어가 있었다. 두 번째 예거아머는 세바스가 컨트롤 하고 있었다.
“세바스.여기 정리할 때까지 일단 위쪽에서 비행이나 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마스터.
블랙예거아머는 알렉스와 엘리야의 머리 한 바퀴 돌고 멀리 사라졌다. 그 안에서 신나 하는 다현의 함성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본 알렉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알렉스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엘리야를 쳐다봤다.
“엘리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이 세상의 멸망을 알려왔던 건 당신 아냐?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는 거야?”
알렉스와 엘리야는 초면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본격적으로 예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진행했던 것도 엘리야와 대화하고 나서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성자로 불리던 그녀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미래의 모습을 엿보던 그녀의 능력도. 엘리야를 다시 본 알렉스의 의문은 ‘그녀가 왜 이렇게 됐을까?’ 였다. 지금은 그냥 범죄조직의 간부밖에 안 되는 초라한 모습이었으니까.
“그, 그건... 에잇. 다들 한꺼번에 덤벼.”
할 말이 없어진 엘리야는 뒤로 물러나면서 지시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십 명의 괴한이 일제히 알렉스에게 덤벼들었다. 덤벼든 괴한들은 등급은 낮다곤 해도 일단은 도퍼들이었다. 강철 따윈 손쉽게 구부릴 수 있는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함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
알렉스는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팔꿈치 크기의 곤봉처럼 보이는 막대기였다. 거기에 에너지를 주입하니 막대기가 길어졌다. 길어질 뿐만 아니라 형상기억합금처럼 끝이 뾰족한 날카로운 창처럼 변했다.
“하앗.”
알렉스가 기합과 함께. 봉 끝을 양손에 쥐고 머리 위로 한번 흔든 다음 그 원심력을 이용해 발목높이로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다가오던 괴한의 발을 맞춰 그대로 분쇄했다. 이 일대는 금방 고통의 신음으로 가득 찼다.
“다음 병원비 타갈 차례는 누구야?”
그 후 3분 뒤.
자신을 공격하는 모든 괴한들을 모두 때려눕혔다. 모든 그 와중에 엘리야는 어느새 모습을 감춰버렸다. 이미 다른 팀이 엘리야를 추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의 뒤처리할 팀도 곧 도착한다고 했다. 이제는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었다.
“세바스. 이제 돌아가자.”
세바스를 원격으로 부르면서 알렉스는 제트엔진을 켜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금방 세바스의 대답이 돌아왔다.
-예. 마스터. 근처로 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이내 블랙예거아머가 나타났다. 알렉스의 옆으로 나란히 날아가고 있는데, 그 안에 다현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로맨틱한데?’
알렉스는 천천히 다현쪽으로 붙어서 비행했다. 그런 다음 손을 뻗어서 다현을 껴안았다. 다현은 곡예를 하듯 하늘을 나느라 정신없는지 꺄- 하는 함성과 비명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다현씨. 오늘 저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죠?”
“...무사하니까 됐어요. 그래도 저를 구하러 온 거잖아요.”
“다현씨...”
생각보다 부드러운 다현의 말투에 알렉스가 목이 메인 채로 다현을 불렀다. 그런데.
“잠깐. 지금 이 밑은 노팬티이죠? 꺅 변태.”
아까 알렉스가 알몸으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현이 온 힘으로 알렉스를 밀치자. 알렉스는 예거아머를 장착한 채로 아래쪽으로 추락했다.
*****
그리고 며칠 뒤.
한국 국적의 개인용 비행기 한 대가 뉴욕 외곽의 활주로에 내려왔다. 루엘가가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활주로였다. 그 모습을 알렉스는 다현과 함께 초조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건 요즘 한국에서 퍼스트 도퍼보다 유명해진 도퍼 유강현. 하지만 그의 방문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던 건 그의 유명세 때문은 아니었다. 퍼스트 도퍼도 경호원으로 불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알렉스였으니까.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강현이 자신이 열렬히 구애하고 있는 다현의 친오빠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가장의 말이 절대적. 이런 부분은 루엘가와 잘 어울릴법한 전통이었다. 강현은 자신처럼 부모님을 몬스터에 잃어서 집안의 가장이라고 들었다. 다행히 다현도 오빠라면 껌뻑 못 죽고 사는 모양이었다. 이런 오빠의 지지를 얻는다면 다현과의 결혼은 한국 속담으로 누워서 떡 먹기 일터. 긴장이 안되려야 안될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바로 승부처.’
그렇게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졌다. 비행기에서 먼저 내린 건 한국 쪽 여자 관리자. 그다음에 강현이 내렸다. 알렉스는 강현이 활주로에 발을 내딛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의 의사를 전했다.
“여동생을 저에게 주십시오. 평생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하겠습니다.”
강현은 알렉스의 유창한 한국어에 살짝 감탄한 듯했지만. 대답은 반대였다.
“전 이 결혼 반대합니다.”
예상외의 대답에 알렉스는 놀랐다. 강현도 능력 있는 남자로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충격이었다.
“왜, 왜? 제가 어디가 부족해서?
체면이고 뭐고 다 던져버린 알렉스의 울부짖음에 강현은 뺨을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아무래도 외국인 매제는 좀... 그렇단 말이죠.”
다현은 배를 잡고 바닥을 뒹굴면서 웃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분 이제야 올리네요.
추워져서 그런지 전기장판밖으로 나올기가 힘들어요;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