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6 회: 8장. 그레이 도퍼 -- >
8장. 그레이 도퍼(2)
“어라. 오늘은 그 팔찌 안 하고 가려고?”
지나가는 투로 묻는 가벼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화장대에 앉아있던 소유는 수지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살짝 움찔했다. 그 때문에 차려입은 원피스의 부드러운 비단들이 소리 없이 부비적 거렸다.
“으응. 왠지 창피해서.”
손에 쥐고 있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소유는 뒤를 돌아보면서 친구에게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수지는 금방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불꽃처럼 짧은 머리를 수건으로 마구 털어내고 있었다.
거기다 멋들어지게 드러낸 나신에는 군살 없이 하나같이 단단해 보이는 근육들이 중량감을 뽐내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소유의 말을 듣고 화장대로 다가온 수지는 팔찌를 들어 요리조리 살펴봤다.
팔찌는 흑요석처럼 보이는 검은 구슬들이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알이 작은 염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짝거렸다면 좀 더 예뻤을까? 하는 생각하며 수지는 다시 화장대에 팔찌를 놓고 말을 이었다.
“창피해할 게 뭐가 있어. 투박해 보여도 부모님 유품이라면서.”
“그게 아니라. 이 팔찌가 창피한 게 아니야. 왠지 그거 끼고 있으면 부모님이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라서. 그래.”
그래. 라고 말하면서 수지는 소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들여다보는 수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으흠~ 꽤나 마음에 두고 있나 봐? 그런데 왜 굳이 나까지 끼워서 약속 잡은 거야?”
수지는 자신의 말에 소유가 얼굴을 붉힌 채 숙인 고개를 못 드는 걸 보곤 짐짓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소유의 대답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일단 너한테 보여주고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받고 싶었거든. 난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수지가 싫다고 하면 나도 싫어.”
‘그래도 이제까지 남자한테 시달린 덕분에 이렇게도 예쁜데도 남자 한번 안 사귄 친구가 연애감정이 생겼다는데 절친으로서 팍팍 밀어줘야지.’
수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소유에게 물었다.
“근데. 원래 그 팔찌 늘 끼고 다니던 거였잖아. 인제 와서 왜 그러는 거야?”
“사실. 그때 마침 급하게 알바대타 하러 가느라 잊어먹고 안 끼고 갔을 때였거든.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중에 정식으로 소개해드릴 때 끼고 만나려고.”
“그래그래.”
졌다는 듯이 수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소유는 팔찌를 조심스레 집어들고 그 검은 알 하나하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이야기했다.
“혹시 이제까지 남자가 안 생긴 건. 이 팔찌를 끼고 있어서가 아닐까? 부모님이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시는 거야.”
“설마...”
부정하고 싶었지만. 소유가 진지한 눈빛으로 그 팔찌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겨우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한 수지는 오늘 저녁의 일정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이름이 뭐랬지? 도퍼라면 내가 들어본 이름일 텐데.”
그때. 수지의 휴대폰 전화가 울렸다. 평소에는 진동으로 해둔 수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릴 경우는 딱한 경우밖에 없었다.
“앗. 잠깐. 몬스터가 출현했나 봐.”
수지는 허겁지겁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
77빌딩 스카이라운지에 위치한 골디락스 레스토랑.
몬스터가 등장한 뒤 대부분 고급건물이 지하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런 추세에 반발하듯 유일하게 보란 듯이 고층 빌딩을 세운 유일한 곳이 이 77빌딩이었다. 개장한 지는 얼마 안 된 곳으로 다소 비싸지만, 연인들 사이에는 필수 데이트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도심에서는 몬스터가 정말 드물게 발생한다지만. 그래도 불안한 이용객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의미에서 상주하고 있는 도퍼도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레스토랑 안에서 야경이 잘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그중 남자 쪽인 강현은 다현이 골라준 빳빳한 세미 정장을 입고 있고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흑단 같은 머리를 곱게 틀어올리고, 대비되는 새하얀 속살을 어깨까지 드러낸 검은색 시폰 드레스를 입고 있는 소유가 앉아있었다.
가슴과 어깨를 가리고 있던 방어력 높은 코트는 옆의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그 때문에 강현은 부드럽게 마주 보며 깊은 브이자 계곡을 만들어내고 있는 소유의 가슴에 눈을 못 떼고 있었다.
그때. 미안해하는 소유의 목소리가 강현의 시선을 끊어냈다.
“강현 씨. 죄송해요. 친구가 급하게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됐어요.”
하지만 되려 강현은 이쪽에서 되려 이렇게 오붓한 자리를 방해 안 한 친구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친구 누군지 모르지만, 눈치 한번 좋네.’
전부터 생각했지만. 소유의 친구는 그동안 소유를 지켜준 것 까지래서 강현에게 그야말로 호감 만점이었다.
“괜찮습니다. 일하다 보면 바쁜 일이 있을 수도 있죠.”
“네에. 몬스터 출현 호출받았어요. 비상호출이래요.”
소유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 자리에서 너무 그러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강현을 향해 미소 지었다.
강현은 강현대로 ‘비상호출인데 왜 나한테는 연락이 안 오지?’라고 생각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 소유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자주 오시나 봐요?”
“저도 처음이에요. 여기 생긴지 얼마 안 됐잖아요.”
강현은 소유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옷차림도 그렇고. 앞서 요리를 주문할 때도 그렇고 이런 곳에 꽤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알았던 설소유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분위기였다.
“그 사건 뒤로는 편의점에도 잘 안 가고 내내 집에만 있었거든요. 고모부가 집밖에 잘 못 나가게 하셔서 가끔 갑갑했는데 이렇게 높은 곳에 오니까 좋네요.”
‘고모부?’
강현은 자신이 대답을 않아서 소유가 혹시 불편한 자리에 데려온 거 아닌가 하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걸 보고 황급히 대답했다.
“아 저도 좋습니다. 좋아요.”
“....”
“그보다 주문한 요리가 안 오네요.”
할 말이 없어진 강현은 무안해진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단둘이 있을 때 더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야? 어이쿠 한심해라. 혹시 금방 지겨워서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건 아니겠지?’
강현이 그런 걱정을 하면서 소유의 눈치를 봤자. 하지만 소유는 처음 봤을 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보다 친구분은 그동안 바쁘다고 하셨는데. 오늘도 출동하시고 고생 많으시네요.”
“아니에요. 사실 그동안 퍼스트 도퍼인가 하는 분이 한국에 왔다고 보러 다녔어요. 팬이라고 하더라고요. 귀여운 구석이 있죠?”
‘퍼스트 도퍼? 수지도 보러 간다고 쪽지 남겼었는데. 그 정신병자가 그렇게 인기가 있나?’
강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나저나 이제 무슨 이야기를 더하지.’
그때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음 화제를 생각해내려고 할 때. 강현을 구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에에에에엥-
몬스터 출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였다.
레스토랑 내에서는 직접 울리진 않는 듯 평소보다 반감된 소리였지만.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뿐만 아니라. 점원들도 불안한 듯 웅성거렸다. 강현은 슬쩍 자신이 품속에서 예거를 확인했다.
-손님 여러분. 몬스터가 출현한 곳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3급 도퍼들이 손님 여러분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서 상시 대기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금세 사이렌 소리가 그치고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웅성거림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분위기가 느긋해진 것처럼 보였다.
강현은 혹시라도 놀랐을 소유를 위해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난리네요. 그쵸? 하지만 여기에도 도퍼들이 있다고 하고. 저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네. 든든하네요.”
소유는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강현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런데 강현 씨는 이렇게 사이렌까지 울리는데 안 가보셔도 되나요?”
“앗 설마 제가 갔으면 하는 건가요?”
“아,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정석하며 묻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하며 손을 내젓는 소유를 보며 강현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마 제가 필요했으면 금방이라도 호출 왔을 거예요. 괜히 제 일도 아닌데 나섰다가는 밥그릇 뺏는다고 난리 날지도 몰라요.”
“그런가요?”
“네네. 요즘은 퇴치 못 하는 몬스터도 거의 없잖아요. 티비 쇼 프로도 하는데.”
“혹시 강현씨도 텔레비전 같은 데에 나오시는 거예요? 유명해지면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아뇨. 전 아직 초짜 중의 초짜라.”
강현은 손사래를 치고는 생수를 들이켰다. 소유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손으로 곱게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강현은 문득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역시 스폰서 해달라며 연락 오는 여자들보다 이렇게 만남을 가지는 게 훨씬 건전하고 좋지.’
강현이 자신의 쪽지함에서 삭제해버린 사진들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갑자기 창밖이 어둑해졌다.
‘뭐지?’
이상함을 느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몬스터가 시뻘건 눈동자를 이쪽으로 향해 쳐다보고 있었다.
*****
-캬아아아아악
파공음이 창문을 넘어 들리고. 시커멓고 거대한 새가 덮쳐왔다. 새 몬스터를 눈치챈 강현은 다급히 일어나 소유를 얼싸안고 굴렀다. 부드러운 가슴의 촉감이 느낄 새도 없이 몇 번이나 굴러서 레스토랑 안쪽으로 피했다.
비명. 고함. 소음. 절규
거조에게 습격당한 레스토랑 안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어떤 사람들은 비상구로 뛰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테이블 밑에 숨어 눈과 귀를 막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자포자기하고 주저앉았다.
“에잇. 왜 갑자기 몬스터가 여기까지 나타난 거야.”
강현은 투덜거리면서 품 안에 예거를 꺼냈다.
방송에서는 분명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안전할 거라더니. 아니 비행체는 강현도 처음 보는 것만큼 이곳까지 순식간에 날아왔을 수도 있다. 높은 하늘에 반짝거려서 좋은 먹잇감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이 막 돋아나고 있을 때. 강현은 작은 떨림이 때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소유가 자신의 품 안에서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아우....”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하죠.”
1억보다 절대로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강현은 예거를 삼킨 다음 소유를 안았다. 혹시나 소란 속에 다칠까 봐 소유에게 방어 버프까지 건 다음. 비상계단을 살펴봤다. 다행히 사람이 없었는지. 그쪽은 조용했다.
크아아으앙!
창가 쪽에서 몬스터가 내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비상계단 쪽으로 가서야 왜 사람들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먼저 이쪽으로 탈출한 사람들은 적당히 몇 층을 내려가다가 포기하고 다른 층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이 계단을 전부 내려가긴 힘들어 보였다. 자그마치 77층이나 됐으니까.
‘오히려 잘됐어.’
“꺅.”
강현은 소유를 안고 그대로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한번 뛰어내릴 때마다 반 층씩 내려갈 수 있었다. 덕분에 놀란 소유가 작은 비명을 지르면서 양손을 강현의 목에 둘렀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강현은 배 아래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졌지만. 꾹 눌러 참고 계속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층까지 내려올 때쯤에는 소유도 익숙해져서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내친김에 지하 3층에 있는 대피소까지 내려갔다.
“어, 어떻게 된 거죠.”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저런 몬스터는 처음 봐서... 그보다 여기에서 피하고 계세요. 잠깐 상황보고 올게요.”
소유는 강현이 간다는 말에 두려운 얼굴빛을 띠었지만. 금세 지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하세요.”
“금방 살펴보고 와서 괜찮으면 집까지 바래다 드릴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강현은 1층으로 올라와 건물을 올려다봤다. 레스토랑에 몬스터가 등장했을 때 그 자리에 앞장서서 몬스터를 상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층에서 소유를 지키면서 싸워나갈 자신은 없었다. 몇십 미터는 쉽게 뛰어다닐 수 있는 몸이었지만. 300미터위에서 하늘을 나는 몬스터와 자신이 싸울 이유는 없었으니까.
몬스터는 여전히 빌딩 근처를 배회하면서 빛나는 창가 쪽을 커다란 부리로 찍어내는 중이었다.
‘그래도 모르니까 혹시 채영씨한테 어떤 상황인지 연락이나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핸드폰을 찾고 있으려니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앗. 강현님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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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입니다.
이번 달도 연중없이 꾸준히 달리겠습니다. 부릉부릉.